홍콩 H지수 ELS 대량 손실의 또다른 원인...부실한 '투자자 적합성평가'
2024-01-12 05:00
단순 설문조사로 고위험 상품 판매, 금융당국도 책임 있어
홍콩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발행한 주가연계증권(ELS)의 만기가 다가오며 투자금의 절반 이상이 손실 구간에 접어드는 등 대규모 원금 손실이 발생하자, 판매사들의 '불완전 판매'가 논란이 되고 있다. 업계는 금융당국이 고위험 금융 상품 판매를 위해 만든 '투자자 적합성 평가'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며 판매사에게만 으름장을 놓을 일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1일 현재 시행되고 있는 투자자 적합성 평가 제도는 2020년 제정된 ‘금융소비자보호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법은 은행이나 증권사 같은 금융상품 판매업자가 펀드 등 투자성 상품을 소비자에게 권유하기 전에 원칙적으로 소비자에게 받은 정보를 토대로 추천하기 부적합한 상품을 선별하는 절차를 두도록 하고 있다. 이 절차를 투자자 적합성 평가 또는 ‘투자자 성향 평가’라고 한다.
금융사에 따라 세세한 부분에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 평가는 당사자에게 △소비자 연령대 △연소득 △금융자산 △투자자산 비중 △일반 금융투자경험 유무 △투자 목적 △금융지식수준(상품 구조 및 위험 이해도) △투자 예정 기간 △감내할 수 있는 원금 손실 비중 △파생상품 투자 경험 기간 등을 묻는다. 각 문항에 수치나 객관식 선택지로 답하는 형식이다. ‘평가’란 표현을 쓰지만 단순 설문조사에 불과하다.
지난 5일부터 만기 손실이 확정된 홍콩 H지수 ELS는 그 이름처럼 홍콩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설계한 ELS다. 3년 전인 2021년 초 H지수가 폭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로 예금 금리 이상의 수익을 원하는 투자자에게 금융사가 대거 판매했다. 하지만 2021년 상반기 1만~1만2000구간에서 움직이던 H지수가 작년 말 반토막(5500선)이 났다. 10일(현지시간) 종가는 5421.23이며 그 움직임에 따라 손실이 더 커질 수도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3년 11월 기준 이 상품 총 판매 잔액은 19조3000억원이다. 은행이 15조9000억원, 증권사가 3조4000억원을 팔았다. 전체 91.7%(17조7000억원)가 개인에게 판매됐다. 금감원은 홍콩 H지수 ELS 주요 판매사 12개사에 현장 검사를 진행해 불완전 판매 여부 등을 파악하고 위법사항을 확인하면 책임을 묻겠다고 했지만, 현행 제도상의 허점에 대해선 자성하지 않는 분위기다.
당국이 금융사의 불완전 판매와 같은 위법 사항을 바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손실이 큰 투자자 대상 판매 관행만을 점검한다는 건 소극적인 접근이다. 이에 더해 부실한 투자자 성향 평가 제도를 보완하는 방안도 고민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한국거래소 선물·옵션 거래처럼 사전 상품 이해, 투자위험 숙지를 돕는 의무교육 과정을 이수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