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정신](14) 고려 충렬왕 때 大문장가 정치가 정가신...왕들의 스승이었다

2023-12-18 10:28
원나라-고려 태평시대 이끌어...쿠빌라이칸, 설재의 시문(詩文)에 감탄
고려 태조 ~ 24대 원종까지 역사서 '천추금경록' 저자
왕 아래 최고위직에 올랐어도 서생처럼 청렴 강직하게 살아


  
정가신 영정

 
고려의 대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설재 정가신(鄭可臣·1244~1298년)은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동 금안(金鞍)마을에서 태어났다. 전라도 3대 명촌(名村)으로 꼽힌다. 다른 두 곳은 전북 정읍의 신태인, 영암의 구림마을이다. 금안은 금으로 된 말 안장이란 뜻이다. 정가신이 원나라 황제 성종으로부터 금으로 된 말 안장과 백마를 선물로 받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금안마을 한가운데에 쌍계정(雙溪亭)이 있다. 1280년 정가신이 나주의 진산 금성산 북동쪽 자락 금안동 중앙에 세운 누정(樓亭)이다. 쌍계(雙溪)라는 이름은 금성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정자 양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붙여졌다. 정자의 쌍계정(雙溪亭)이란 한자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 한호(韓濩), 한석봉의 글씨다.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고색창연한 소나무 몇 그루가 여름이면 풍성한 녹음을 만들었고 정자와 그 주위를 덮어 더위를 피하게 했다. 지금도 여름엔 마을 서당이 열리고 음력 4월 20일에는 대동계 계원들이 모여 선행상과 효행상을 시상하고 있다.
 
금안마을 표지석. 나주시는 금안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안내지도와 표지석을 세웠다.
 
금안마을 지도
 
쌍계정. 현판의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다.


32살에 대과 급제하고 벼슬길
 
정가신이 태어날 당시는 고려 무신들이 득세하던 때였다. 대외적으로는 몽골(몽고)의 칭기즈칸이 맹렬하게 정복전쟁을 하고 있었다. 고려도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혀 참혹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정가신은 어려서부터 무척 영민해 인격이 높은 사람이란 뜻으로 ‘대인’(大人)이라고 불렸다. 책을 읽고 글쓰기에 능했다. 17살 때 승려인 천기(天琪)를 따라 강화도로 상경한다. 불교를 숭상하던 시절이라 천기는 조정의 중요 인물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정가신은 당시 종4품 벼슬을 지낸 안홍우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한다. 당시에는 남녀평등 의식이 강해 처가살이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특히 출세를 보장하는 과거시험을 치르려면 실력은 물론 가문의 배경이 필요했다. 정가신은 처가 덕에 고종 30년(1243) 20살에 국자감 시험에 합격하고 32살 때 대과에 급제한다. 이후 충렬왕 3년 때 정5품 보문각대제가 된다.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보문각의 최고 수장이다. 이어 조정의 서무를 총괄하는 중서문하성에서 정4품에 올라 첫 시련을 겪는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이분희 형제가 고려의 명신(名臣) 김방경을 모함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고관들 싸움으로 조정 분위기는 아부와 모함이 뒤섞이며 혼란스러웠다. 정가신은 이 와중에 조정의 일을 하는 것이 치욕스러워 사직하고 나주로 낙향한다.
 
원나라에 세자와 함께 파견돼 기나긴 타국살이

그러나 낙향 1년 만에 충렬왕의 부름을 받아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시관(試官)이 돼 문과급제자와 국감시 합격자를 선발하다가 승지 감찰사로 승진해 지방장관의 부정을 감시하고 관리들을 단속하게 된다. 또 왕으로부터 가신(可臣)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대단한 총애다. 1290년(충렬왕 16년), 정가신은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인 정당문학(政堂文學), 즉 세자의 스승으로 임명된다. 최강국으로 커진 원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자 왕원(후일  충선왕 )과 함께성절사로 파견돼 수차례 원나라를 방문한다. 이 때문에 원의 고관대작들과 인맥이 두터웠고 국제 정세에 눈 뜨게 된다. 특히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이 정가신의 시문(詩文)에 감탄해 그를 특별대우하고 자주 보기를 원했다. 세자 왕원이 세조를 배알할 때는 반드시 정가신이 수행하게 했다. 그렇게 원에 머물기를 5년. 정가신은 고향이 그리워 사향시(思鄕詩)를 쓴다.
 
‘고려국 남쪽에 금성산이 있는데
그 산 아래 내 집이 초가로 두어 칸 있네.
마을 골목과 동산에 내가 심은 복숭아와 버드나무는
봄이 오면 주인 오기를 기다리겠지.
내 집은 머나먼 삼천리 밖에 있고
내 몸은 화려한 십이재왕성에서 놀고 있구나.
옥퉁소를 불며 고향 생각을 달래는데
창밖의 무심한 달은 벌써 새벽녘을 알리고 있구나.’
 
이 시를 본 원나라 성종은 정가신에게 고려로 환국하도록 명하고 금으로 만든 말안장과 금으로 만든 허리띠, 백마(白馬)와 용이 그려진 벼루(龍硯)를 선물했다.
 
귀국 후 정가신은 1297년 첨의중찬이라는 최고위직에 오르고 다시 세자의 스승에 임명된다. 이듬해 1월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받자 정가신은 글을 올려 은퇴를 청했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고 5일 만에 한 번씩 조정에 나오도록 명했다. 정가신은 그 후 석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강원도 연천군 왕징면 기곡리 묘자원이다.
 
설재서원의 모습
 
설재서원에 있는 비석


원나라 세조와 정사 의논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는 어땠을까.
몽골과 기나긴 전쟁을 하던 최씨 무신정권이 결국 몰락하자 원종은 1270년 몽골이 세운 원나라와 강화조약을 맺는다.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고 왕정을 복구한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 것이다. 새 왕이 된 충렬왕에게 원나라 세조의 딸을 왕비로 삼게 했다. 고려를 ‘사위의 나라’로 만든 것이다. 왕과 왕실을 격하시켰다. 고려왕은 반드시 원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아야 하고 그 소생은 왕위계승권을 갖게 했다. 원은 고려의 덕을 본다. 원의 세조는 중국 문화를 잘 이해하는 고려 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건국이념과 종교, 사상을 확립하고 정착시켜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다. 정가신은 그 가운데 중심 인물이었다. 당시 원 세조와 나라의 정사를 의논할 정도였다. 원나라에 머물면서 세조와 그의 외손자인 충선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고려와 화합을 조절해 큰 탈 없이 태평시대를 지냈다. 그의 외교적 역할로 두 나라는 상생할 수 있었다. 결국 정가신은 고려 충렬왕, 충선왕, 원 세조에게까지 스승으로서 존경과 아낌을 받았고 그들의 통치 이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강직한 성품에 불편부당한 처신
 

설재 정가신은 행정 실무직을 맡은 적이 없었다. 주로 문한(文翰)이나 감찰직을 맡았다. 청요직(淸要職)이었다. 청렴해야 하는(淸) 중요한(要) 자리(職)라는 뜻이다. 누군가 꼭 맡아야 하고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걸 맡는 관원들은 정계에서 자칫 따돌림 당하기 쉬운 관직이다. 그의 학덕이 크지만 강직한 성품과 불편부당한 처신이 작용했다. 특히 감찰이나 간관직(諫官職)을 자주 맡은 것은 왕의 시혜일 수 있지만 직책 특성상 왕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의미도 된다. 설재 정가신은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특히 원나라와 중요한 외교에서 탁월한 협상력을 보여줬다. 정가신이 비서윤(祕書尹)이라는 직책을 맡았을 때 필도지(必闍赤·必導赤)에도 참여한다. 필도지는 나라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비상대책기구였다. 당시 왜국 정벌을 앞두고 있었고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조정은 국가적인 위기라고 생각해 별도의 기구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문벌과 거리가 먼 신흥세력들이 많이 참여했고 그들의 유대감과 결속력이 강했다. 정가신은 필도지에서 이들과 조화롭게 많은 일을 결정, 처리했고 오랫동안 교류했다. 왕 아래 최고위직에 올랐으면서 평생 서생처럼 청렴하게 살았다.
 
쌍계정 옆에 있는 고목. 수령이 7백년이 넘는다.
 
금안한글마을의 가볼만 한 곳을 표시한 안내판. 금안마을은 한글 창제 주역인 신숙주 선생이 태어난 곳이어서 한글마을로도 불린다.


충렬왕 천추금경록에 불만 많아
 

정가신은 충렬왕 때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썼다. 해동금경록(海東金鏡錄), 그냥 금경록이라고도 한다. ‘천추’는 ‘세월’을, ‘금경’은 거울을 뜻한다. 고려 태조의 조상인 호경대왕으로부터 고려 24대 왕인 원종에 이르기까지 기록이다. 총 7권이지만 아깝게도 이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정가신의 역사관과 생활철학에 비춰 내용을 추론할 뿐이다.

전남대 변동명 교수는 “정가신은 유교적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하는 인물이었다. 천추금경록을 쓴 까닭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국왕에게 간절하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충렬왕의 측근들에 의해 저질러진 횡포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왕권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보다 국왕이 덕을 쌓기를 갈망했다”고 말했다.
 
천추금경록은 정가신 자신의 희망을 역사의 교훈성에 의지해 표현한 책이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는 감계주의(鑑戒主義)에 입각한 역사서라는 것이다. 충렬왕은 ‘왕을 가르치려고 한’ 이 책에 불만을 품고 민지(閔漬)를 시켜 내용을 고치도록 명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다.
 
충선왕 개혁정치 동의
 
정가신의 정치철학은 무엇일까. 그는 고려에 비해 힘이 강한 원(元)을 섬기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려왕조의 이익을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충선왕의 개혁정치에 동의하고 깊이 관여했다. 충선왕은 세자 때부터 아버지의 통치방식에 비판적이었다. 즉위하자 왕 측근들의 불법행위를 바로잡고 국정을 쇄신했다. 충렬왕 때 정치에서 소외된 세력, 특히 사림원 학사들 같은 신진세력을 중심으로 국정을 폈다. 이들은 정가신이 지공거 시절 과거 시험으로 뽑은 인재들이었다.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정가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아떨어진다. 충선왕이 세자 시절 오랫동안 스승이었으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충선왕의 개혁은 수구세력의 반발과 원나라 간섭으로 재위 8개월 만에 중단된다. 부왕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참고문헌 : 충선왕(고병익,한국의 인간상 1965), 논문 ‘정가신과 민지의 사서편찬활동과 그 경향’(변동명), 논문 ‘고려 후기 지배세력의 존재 모습’(김태욱),나주정씨 홈페이지 선세 인물, 민족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