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정신](4) 청렴 강직의 표상, 박상과 박순…"올바른 정치 위해 목숨을 걸었다"

2023-10-09 16:18
백성들 보살피며 깨끗하게 살아 '흠결 없는 완벽한 사람'
이황 "그를 대하면 한줄기 맑은 얼음 같아 갑자기 상쾌"

 
박순의 영정 [사진=전북대 박물관]


연산군은 영산홍을 탐닉했다. 후원에 1만그루를 심으라고 전교를 내릴 정도였다. 자신의 생모를 사사한 선왕과 이를 부추긴 신하들에 대한 극도의 증오가 절대 왕권의 탐닉이라는 편집증과 광기로 나타났다. 그 광풍에 피해를 입은 것은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년),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년)로 죽거나 희생된 선비와 신하들뿐 아니라 조선이었다. 이후 붕당과 당파 대립으로 국력은 소진되고 임진과 병자 국난으로 조선은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연산군 12년(1506년)이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은 당시 전라도사로 부임했다. 1501년 28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교검, 시강원 사서, 병조 좌랑을 지냈다. 이어 관리들 비리를 감찰하는 도사가 돼 전라도에 파견됐다.
 
살아 있는 권력의 비리 척결
 

나주에 우부리(牛夫里)라는 노비가 있었다. 자기 딸이 연산군의 애첩이 된 것을 믿고 남의 농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패악을 저질렀다. '연산군일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소부리는 나주 출신 종으로 숙화가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함을 믿고 교만 방자하므로 온 전라도가 그를 맞이하고 전송하며 정성껏 모시기 바빴다.”

박상은 참을 수 없었다. 나주 금성관에서 소부리를 심문했다. 죄를 인정하지 않자 곤장을 쳤다. 그런데 그만 소부리가 죽고 말았다. ‘소부리 장살사건’이었다.

박상은 앞으로 떨어질 연산군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갔다. 이미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임금의 명을 받고 박상을 체포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박상이 정읍을 지나 10리 정도 더 갔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이상한 시늉을 하면서 큰길을 피해 샛길로 들어가더니 따라오라는 듯이 멈춰 섰다. 박상은 끌리듯이 고양이를 따라갔다. 그사이 금부도사가 큰길을 지나갔다. 서울에 올라가니 중종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박상은 가까스로 화를 피한다. 중종반정 이후 박상은 사간원 헌납에 등용됐다. 반정 공신들은 중종(中宗)을 세우고 폐정을 개혁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젊은 선비들이 등장해 왕권정치의 부활을 시도했지만 훈구파의 위세가 너무 강력했다.

결국 기묘사화(1519년)가 일어나고 선비들이 또 희생됐다. 간신들이 판을 쳤고, 왕권은 존중되지 않았다.
 
목숨 걸고 왕에게 쓴소리

 
중종 10년(1515년) 제1비인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신하들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때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무안군수 유옥 등이 논의해 박상과 김정 공동명의로 상소를 올렸다. 신비(愼妃)의 복위(復位)를 주장한 상소다.

순창 강천산 계곡에 모여 벼슬을 버릴 각오로 인수(印綬·벼슬아치가 신분증을 매어 차던 끈)를 바위에 걸쳐 놓고 올렸던 ‘삼인대(三印臺) 상소’로 잘 알려져 있다. 신비(愼妃)는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로 중종의 원비다. 신수근은 반정에 동참하지 않았고, 반정 공신 박원종과 유순정은 신수근의 딸인 신비를 폐출해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박상은 이 상소문에서 전 왕비 신씨를 복위시키고 반정 공신 박원종 등에게 죄를 물을 것을 요청했다. 또 당시 신씨를 폐출한 것은 반정 공신들의 정치적 야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명분 없는 국모 폐출이 천하고금의 대의를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다시 복권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도정치의 대의명분에 힘쓰라고 왕에게 외친 목숨 건 쓴소리였다.
 
청백리 박상, 조광조 왕도정치 동조

박상은 강직하고 청렴한 품성 때문에 오히려 훈구파들에게 배척당하면서 외직으로만 돌았다. 순천부사로 있다가 기묘사화 이후에는 충주목사로 가 '동국사략'과 '매월당문집'을 펴냈다. 이후 나주목사를 마지막으로 광주 방하동으로 귀향했다.

박상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쓰다가 가장 낙심한 적이 있었다. 신진 사림을 등용해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던 조광조(趙光祖·1482~1520)와 이별하던 때였다. 조광조는 외척과 공신을 맹렬히 비난하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다가 기묘사화로 희생된다. 박상은 광주 남문 밖 분수원(分水院)에서 능주로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의 옷깃을 잡고 울었다. 한 달 후인 12월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다.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에게 배척당했지만 박상은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났다. 정조가 그의 시문을 읽고 “맑고 높으며 깨끗하고 기이하며 빼어나게 힘차며 아름답다. 뒷사람들도 미칠 바가 없다”고 극찬했다. 박상은 어려운 백성을 위한 구휼에도 힘썼다. 그가 쓴 글을 보자.
 
 먼 시골 백성 살리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마을마다 하소연에 관아 뜰은 온통 울부짖음뿐이로다.
 몇 달 근심에 귀밑머리가 온통 하얗게 쇠었네.
 닭 묶어가는 아전들 호통에 길거리마다 소란스럽고
 송아지 꿰어가니 처자식들 영락없이 거위 울음을 우네.
 백성 삶을 보살피려면 겉치레 없는 은덕을 베풀어야 하네.
 곧장 죄목을 하나하나 들춰내서 거친 강물에 쓸어버려야겠네!
- 荷荷大笑又荷荷(하하 크게 웃고 또 하하)
 
박상은 훈구와 사림의 교체기에 사림의 태도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백성들 삶을 보살피며 청렴과 강직이란 무엇인지를 실천했다. 동생 박우는 그의 '눌재집(訥齋集)'에 “퇴계 이황은 형님을 평가하기를 선비로서 완인(完人·명예와 신분에서 흠결이 전혀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했다”고 썼다.

박상의 아버지 박지흥은 세 아들 박정, 박상, 박우의 교육에 힘썼다. 박정은 아우인 박상과 박우를 가르쳤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박상의 아우 박우는 홍문관 교리, 병조 좌랑, 직제학, 강원도 관찰사, 이조 참의, 전주 부윤을 지냈다.
 
박순 선생을 모신 포천 옥병서원.

도덕 정치와 민생 안정에 주력한 박순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1589, 중종 18~선조 22년)은 아버지 박우가 개성유수를 지낼 때 교유하던 서경덕을 스승으로 삼았다. 박우가 처가인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서 살 때 박순이 태어났다. 명종(明宗·1534~1567)은 중종의 둘째 적자이자 인종의 아우로 재위 때는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 동생인 윤원형이 주동이 돼 을사사화(1545년)를 일으켰다.

박순은 25세 때인 1547년 부친상을 당했고 31세인 1553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556년 수은어사(搜銀御史)가 됐다. 수은어사는 중국 사행길에서 들여오는 밀수품을 적발하는 일을 했다. 의주에서 수은어사를 할 때였다. 검은 비단과 향료를 적발했는데 알고 보니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물건이었다. 박순은 가차 없이 적발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시절이니 항명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1561년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는 ‘임백령의 시호’ 문제로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의 미움을 사 도성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1565년 성균관 대사성이었을 때는 이량, 이감, 윤백원 등 당시 실세들을 탄핵했다. 그해 5월 대사간에 올랐고 8월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윤원형의 죄를 논하며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결국 권력을 농단하던 윤원형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박순은 외척 권신이 판치는 세상에서 도덕 정치를 앞세우고 민생 안정에 주력했다. 정철, 이이, 이산해, 김효원, 유성룡 등 신진 세력들이 조정에 진출하는 데 정치적 보호막이 됐다. 이황, 이항, 조식과 같은 원로 사림들이 복권되자 민생경제를 개혁했다.
 
경기도 포천 옥병서원에 있는 청옥병암각화.

신진 사림의 정치적 구심점
 
선조(宣祖·1552~1608) 원년 이황이 홍문관 제학에 임명될 때 박순은 대제학이었다. 박순이 임금에게 건의했다. “나이 많은 석유(碩儒)가 차관 자리에, 후진이며 초학인 신이 그 위에 있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니 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이황도 그냥 있지 않았다. “품계는 연령이 많고 적은 것이나 학문이 앞서고 뒤서는 것과 별개입니다.” 난감한 선조는 둘을 조정해 결국 박순의 뜻대로 했다. 그는 퇴계를 존경했다. 그에게 보낸 편지다.
 
고향 생각이 구슬처럼 아니 끊어지시는지요/이 아침 말 타고 한양을 떠나 가시네요/영남의 매화가 추위에 묶여 봄이 와도 피지 않으면/꽃은 두었다가 노선(老仙) 돌아오실 날 기다리겠습니다. -고향으로 가시는 퇴계 선생님께-
 
죽을 때까지 매화를 사랑했던 이황의 고향 길을 극진히 배웅했다. 이황도 “박순을 대하면 빛나기가 한 줄기 맑은 얼음 같아 정신이 갑자기 상쾌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홍문관 대제학, 이조판서에 임명됐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됐다. 신진 사림의 정치적 구심점이었고 사림 최초로 재상이 됐다.
 
평생 올바른 정치 실천
 

선조 16년인 1583년 박순과 심의겸이라는 선배 사림과 김효원과 허엽이라는 후배 사림이 대립하면서 서인과 동인의 붕당이 시작됐다. 선조에게 서정쇄신, 공물 헌납 개편, 군현 통폐합, 군정 개혁, 감사의 관리 감독권 강화를 요청했지만 임금은 냉소했다.

박순은 나이를 핑계 삼아 자리에서 물러나 경기도 영평, 지금의 포천 백운산으로 아래로 들어갔다. 낚시도 하고 촌로와 술잔을 나눴다. 친구 없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1589년 선조 22년 67세였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송호영당이 있다. 박순과 박상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들 후손인 ‘떠나가는 배’ 박용철 시인의 생가가 바로 그 앞에 있다.
눌재 박상의 유적은 광주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 봉산재가 있다. 사암 박순의 유적은 탄생지 나주 왕곡면 송죽리 마을과 경기도 포천에 옥병서원이 있다. 박상과 동생 박우의 아들 박순은 올곧은 선비로 사림(士林)의 절개와 정의, 청렴이 무엇인지를 평생의 삶을 통해 보여줬다. 광기 어린 역사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정치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다.

 *참고문헌 : 국역 눌재집(양성지), 사암집(차주환), 사림열전(이종범), 호남사림의 학맥과 사상(고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