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자의 食슐랭] 스팸·매운맛 떡볶이…전쟁이 탄생시킨 식품들

2023-11-24 12:00
스팸, 미국서 개발…2차 세계대전 전투식량 채택
한국전쟁 발발한 1950년대, 미군 통해 스팸 들여와

1980년대 스팸의 시판을 알리는 광고 이미지(왼쪽), 스팸 광고 이미지 [사진=CJ제일제당]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등 국가 간 전쟁이 연이어 터지면서 비극적인 소식이 하루가 멀다고 매스컴을 통해 전해진다. 전쟁의 참상은 갈수록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점차 피폐해지고 있다. 전쟁의 피해를 입은 주민 구호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럴 때일수록 보관이 용이하고 오래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유용하다. 현대인들의 실생활에서도 접할 수 있는 전투식량도 꽤 있다. 스팸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로 좁히면 한국인의 '소울 푸드(soul food)'인 매운맛 떡볶이도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우연히 탄생했다.  
 
스팸과 흰쌀밥 연출 이미지 [사진=CJ제일제당]
'스팸'이 짠 이유 아시나요?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

한국에서 스팸은 밥반찬이다. 짠맛이 강해 밥이나 빵과 곁들여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스팸이 짠 이유는 무엇일까. 

가공 햄인 스팸은 보관의 용이성을 위해 염도를 높게 설정했다. 스팸이 한국인 입맛에도 짜게 느껴지는 이유다. 스팸이란 용어는 양념된 햄을 뜻하는 '조미 햄(Spiced Ham)'을 줄여 만들어졌다. 스팸의 주 재료인 돼지의 앞다리살과 뒷다리살(Shoulder of Pork and Ham)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스팸을 개발한 호멜 식품(Hormel Foods)은 1891년 미국 미네소타주(州) 모워군의 오스틴(Austin)지역에서 조지 호멜(George A. Hormel)이 설립했다. 당시 영국에 육류를 수출하던 소규모 식품회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지 호멜의 아들인 제이 호멜(Jay Hormel)이 세계 최초로 통조림 형태의 햄을 개발하면서 글로벌 식품회사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한다. 제이 호멜이 '캔으로 포장한 돼지고기'를 처음 선보인 것은 1926년이다. 처음엔 비닐이나 종이 포장에 비해 유통을 용이하게 하고 유통기간도 늘리기 위해 캔 포장을 택했다. 당시엔 오늘날의 소용량 캔이 아니라 '대형 캔' 형태로 출시됐다. 

스팸이 전 세계적으로 퍼진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전투식량으로 채택되면서다.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미군을 통해 스팸을 처음 접했다.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음식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때였던 만큼 스팸은 부유층이나 미군 부대와 연줄이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스팸이 대중화된 것은 CJ제일제당이 1986년 호멜식품과 기술 제휴를 맺고 1987년 국내 생산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출시 첫해에만 500톤(t)이 팔려 나갔다. 이미 시장에 나와 있던 비슷한 제품인 ‘런천미트’, ‘로스팜’ 등을 제치고 단숨에 1위로 치고 올라섰다. 일반 캔 햄 제품에 비해 고가이긴 했지만, 밥반찬으로 제격인 데다, 휴대와 사용이 간편하고 보존 기간이 길어 소비자의 반응이 좋았다.

특히 스팸은 찌개와 쌀밥과 자연스럽게 결합하면서 한국의 식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란 광고 문구만 들어도 소비자들은 자연스럽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짭조름하고 고소한 '스팸'의 맛을 연상하게 될 정도다. 여기에 식생활에 간편화, 고급화 바람이 불면서 육류 소비량이 급증한 점도 한몫했다.

이러한 인지도 향상에 따라 스팸의 매출도 가파르게 성장했다. 출시 첫해인 1987년 70억원에 불과했던 스팸의 매출 규모는 1997년 520억원으로 10년 새 7배 넘게 성장했다. 이후 2021년엔 4900억원의 매출고를 올리며 5000억원 가까이 신장했다. 이는 출시 34년 만에 매출 규모가 70배 폭증한 수준이다. 시장 점유율 역시 2017년부터 50%를 넘어서며 독보적인 1위에 올라섰다.
 
국물 떡볶이와 튀김류. [사진=스쿨푸드]
밀가루 원조 계기…한국전쟁 때 탄생한 고추장 떡볶이 

떡볶이는 대표적인 길거리 분식이자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하지만 초기 떡볶이는 오늘날의 고추장 기반의 떡볶이와 모양과 맛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궁중이나 사대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의 '겸암집(1595년)'과 김흥락의 '서산집(1907년)'을 보면 떡볶이가 제사, 잔치 등 의례상에 올랐다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조선 왕가의 일대를 다룬 '승정원일기(1751년)'나 궁중음식 조리서인 '이조궁정요리통고(1957년)'에서도 떡볶이를 찾을 수 있다. 조선 말기에 편찬된 조리서 '시의전서'에도 떡볶이가 등장한다. 여기서 나오는 떡볶이는 가래떡, 등심, 참기름, 간장, 파, 버섯 등을 함께 볶아 만들었다.

현재 고추장 기반의 떡볶이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란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진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마복림씨가 서울 중구 신당동 노점상에서 팔면서 시작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전쟁 이후 해외 원조로 밀가루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고추장 떡볶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건 197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1960년대 말부터 본격화한 '분식 장려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분식 장려 운동은 쌀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밀가루 소비 촉진을 위해 시작한 것으로, 1969년 정부는 '매주 수·토요일 분석의 날'을 지정하기도 했다. 1969년 1월 23일부터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5시 사이에 쌀로 만든 음식 판매를 못하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파로 당시의 떡볶이는 쌀떡에 비해 값이 저렴한 밀가루로 만든 떡을 주로 사용했다. 1969년 보건사회부에서 주최한 분식 조리법 연구 발표회에서도 밀가루로 만든 떡볶이가 등장했다. 마복림씨의 신당동 떡볶이가 입소문을 타면서 1970년대 후반에는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