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에서 투자로" 외치는 日…장벽은 고령화
2023-09-20 10:17
아시아 비즈니스 리뷰
예금으로 묶인 1000조엔, 시장으로 나올까
밑천도 없고, 젊은이도 없다
예금으로 묶인 1000조엔, 시장으로 나올까
밑천도 없고, 젊은이도 없다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해외 투자 촉구에 나선다. 기시다 총리는 21일(현지시간) 오후(일본 시간 22일 새벽) 뉴욕에서 경제·금융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한다. 이 강연에서 기시다 총리는 자산운용업에 대한 ‘구조개혁 단행’을 통해 일본을 ‘투자하는 나라’로 바꾸겠다고 천명할 예정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는 이번 뉴욕 방문에서 일본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국내 투자, 임금 증가, 주가 등 각종 지표를 언급하며,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선전할 예정이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에 투자할 적기라는 것이다.
일본의 자산운용 부문이 운용하는 자금은 800조엔(약 7200조원)으로, 3년간 1.5배나 급증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연설에서 대형 은행, 증권, 보험 그룹 등 자산운용회사 외에도 연기금 등의 개혁을 통해 자산운용 부문의 활성화를 강조할 계획이다. 또한 해외 펀드 진입을 촉진하기 위한 규제 완화 검토는 물론이고 구조개혁에도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임금 인상과 함께 여성이나 외국 인재가 활약할 수 있는 노동 개혁은 물론이고, 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 분야에 대한 민·관투자 활성화 방안 등도 함께 발표한다.
이에 기업들도 발맞추는 모습이다. 닛세이애셋매니지먼트는 운용 성과가 상여금에 반영되기 쉬운 평가제도를 도입했다. 미쓰비시 UFJ 국제투신은 젊은 층을 펀드매니저로 발탁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기존에는 운용에 전념하려면 입사 후 15년 정도의 경력이 필요했지만, 새 제도에서는 이르면 20대에도 펀드매니저로 등용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이렇듯 정부와 운용사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인구 고령화와 젊은층의 낮은 임금으로 인해 기시다 정부가 추진하는 ‘저축에서 투자로’가 성공하긴 어려울 것이란 비판이 잇따른다. 현금을 꽉 쥔 노인들이 투자에 나서거나, 젊은 세대의 임금이 크게 늘지 않는다면, 투자 부문 활성화는 구호에 그칠 것이란 지적이다.
예금으로 묶인 1000조엔, 시장으로 나올까
일본은 ‘자산운용입국’의 실현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자산운용입국이란 지난해 5월 기시다 총리가 영국 런던 금융가인 시티에서 ‘인베스트 인 기시다’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표명한 ‘자산소득 배증 플랜’을 기반으로 한다. 당시 기시다 총리는 “약 2000조엔에 달하는 일본 개인의 금융자산이 일본 경제의 큰 잠재력이 될 것”이라면서 “국민 자산소득을 2배로 늘리겠다”고 강조했다.정부는 그해 11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회의'에서 개인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소액투자 비과세 제도(NISA)의 보급과 자산운용회사의 운용력을 높이기 위한 환경 정비 등 ‘자산소득 배증 플랜’을 수립했다. 이를 통해 5년간 NISA의 전체 계좌수를 현재 1700만개에서 3400만개로, 매입액은 28조엔에서 56조엔으로 두 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늘리는 것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2014년 첫선을 보인 NISA는 상장 주식 등에 연간 120만엔까지 투자할 경우 5년간 비과세 혜택을 주는 제도다.
일본 정부가 가계의 금융자산 확충에 목표 금액을 정하고 투자를 촉구하는 것은 막대한 예금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일본 내각부의 자료에 따르면 가계금융자산은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2007조엔이다. 문제는 그 절반에 달하는 1102조엔이 예금액으로 은행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만약 1102조엔의 일부라도 증시 등 투자 부문으로 들어간다면 일본 주식 시장에 활기가 돌 수 있다. 주식 시장 활성화를 통한 기업가치 향상은 가계의 자산소득 확대로도 이어질 수 있다.
밑천도 없고, 젊은이도 없다
문제는 일본인들이 투자에 나설 밑천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 총무성의 가계조사보고에 따르면 2인 이상 가구의 2022년 평균 저축액은 1901만엔(약 1억7000만원)이다. 그러나 이는 평균일 뿐이다. 66.3%는 이를 하회한다. 100만엔 미만이 9.7%로 가장 많고, 100만~200만엔 미만이 5.4%, 200만~300만엔 미만이 4.6% 등을 기록했다.가와이 마사시 인구감소대책 종합연구소 이사장은 최근 한 언론에 낸 기고문을 통해 “세금과 사회보험료 부담 상승에 고물가까지 더해져 생활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지금의 가처분소득으로는 투자하고 싶지도 않다’, ‘투자하라고 한다면 임금 인상이 먼저일 것’ 등 현실을 벗어난 ‘자산운용 입국’ 구상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몰아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젊은층은 가계부채에 헉헉대고 있다. 가계조사보고에 따르면 부채를 보유한 가구가 37.7%에 달했다. 이러한 부채 가운데 91.3%가 주택이나 토지 관련 부채다. 주택담보대출(주담대) 등의 이자를 내느라 투자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이다.
연령대별로 보면 50대가 되고 나서야 저축액이 부채를 웃돈다. 50대의 순저축액은 1208만엔, 60대는 2251만엔, 70세 이상은 2321만엔이다. 50대가 넘어서야 부채를 어느 정도 갚고 저축할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계의 금융자산 잔액 2000조엔 중 예적금 1000조엔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자산이다. 총무성 자료 등을 바탕으로 연령별 보유액(2021년 기준)을 추산한 결과 60세 이상이 600조엔 이상을 보유했다. 예적금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가 넘는 것이다. 70세 이상은 350조엔 이상, 60~69세는 260조엔 이상이었다.
문제는 고령층의 투자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가구당 저축에서 유가증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기준으로 60대가 16%, 70세 이상이 17%에 그쳤다. 대부분이 예적금에 돈을 묶어 두고 있다.
가와이 이사장은 “50대가 되면 자녀의 대학 진학이나, 부모의 간병 등으로 목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진다”며 “투자를 생각할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60대지만, 60대 이상에게 투자는 부담이 크다”고 짚었다. 이어 “젊었을 때는 주가가 장기 침체하더라도 참고 오르기를 기다리겠다는 선택지를 취할 수 있지만, 고령이 된 후의 투자는 그렇지 않다”며 “고령층 입장에서는 원금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금융상품을 선택하는 게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가와이 이사장은 “이대로 정책을 추진한다면 기존 투자자나 부유층을 우대하는 데 그칠 것”이라며 “젊은층 다수가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소득 수준이 됐을 때 자산운용 입국이 실현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