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장 기업 '모 아니면 도'…제도 미비 틈타 증권사 멋대로 가치산정

2023-09-05 08:57

[그래픽=임이슬 기자]

국내 증권사들이 비상장기업 주식 평가에 대한 특정 기준이 없다는 점을 악용해 원금 손실률은 숨긴 채 투자자들에게 관련 상품을 팔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증권사는 상품 계약 전 투자자에게 상세한 설명을 마쳤다고 주장하지만 손실률은 밝히지 않아 '선관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실률 공개하지 않는 비상장주식 신탁 상품
4일 국내 증권사들이 판매 중인 비상장주식 편입 신탁 상품 손실률을 투자자들이 보지 못하도록 계좌 정보를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투자자들이 계좌에서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 원금 확인은 가능하지만 일반 주식 계좌처럼 수익 또는 손실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품을 해지할 때는 확정 손실분을 제한 금액만 가져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비상장주식 종목이 100% 편입된 신탁 상품에 투자한 A씨 계좌를 보면 투자원금(약 10억원)에서 수수료(2%)와 각종 비용을 제한 9억7000만여 원이 계좌에 찍혀 있었다. 실제 수익이나 손실은 계좌 정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주기적으로 오는 운용보고서를 살펴봐도 원금 손실률은 0%로 나온다. 계좌 잔액 증명서에도 수수료를 제한 원금이 그대로 표시돼 투자한 상품이 수익을 내고 있는지, 손실을 보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도록 돼 있다. 

해당 증권사 관계자는 "비상장주식은 말 그대로 상장되지 않아 정확한 수익률 책정이 불가능하다"며 "이 같은 사실과 관련해 투자자에게 사전 고지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해당 증권사 반기 보고서에는 이익접근법, 시장접근법, 자산접근법 등에 따른 평가 결과를 종합해 주식 가치를 산출했다고 기재돼 있다. 투자자에게는 수익률 책정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증권사 내부에서는 수익 또는 손실 여부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손실이 나도 증권사는 확정 수수료 2% 선취
증권사는 비상장주식 종목에서 손실이 나도 피해는 없다. 선취 수수료로 투자자의 최초 순자산(AUM)에서 약 2%를 먼저 떼가기 때문이다. 여타 상품은 손익에 따라 수수료를 연동한다. 하지만 비상장주식 편입 신탁은 초기 투자비에서 수수료를 먼저 뗀다. 손실 여부를 떠나 증권사가 얻는 수익은 똑같다. 

비상장주식신탁 투자에 참여했던 한 기관투자자는 “선취 수수료를 떼다 보니 손실이 커도 증권사는 같은 수수료를 받게 된다"며 "제도가 없다 보니 증권사에 유리하게 상품을 설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탁이란 위탁자(투자자)가 계약 또는 유언에 의해 자기 재산을 수탁자(증권사 등)에 이전시키는 일대일 계약이다. 일반 공모펀드처럼 누구나 금액 조건만 맞추면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와 신뢰를 바탕으로 투자를 하는 만큼 별도로 당국 가이드라인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상품은 기본 10억원 이상이 있어야 가입 가능한 '고위험'군에 속한다. 구체적인 금융당국 가이드라인이 없어 증권사들은 고액 자산가들을 상대로 꾸준히 판매 중이다.

문제는 기업공개(IPO) 시장이 쪼그라들어 관련 상품 수익성이 크게 낮아졌다는 점이다. 한 증권사 PB는 "올해 만기 도래하는 비상장투자신탁 상품 대부분이 손실을 보고 있어 고객들한테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비상장주식 시가, 객관적 평가 기준 만들어야
상황은 계속 나빠지는데 관련 제도가 없다 보니 증권사들이 스스로 손실 여부를 밝히는 사례도 드물다. 따라서 만기가 임박했을 때 손실 여부를 파악하는 사례도 있다. 김민기 자본시장연구원은 "비상장주식 종목 편입 신탁은 대부분 기업 생애 주기상 업력이 짧은 기업들에 투자를 하는데 10개 종목 중 한두 종목이 회수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라면서 "증권사도 이 점에 유의해 투자자들에게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고위험 상품을 파는 만큼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접근 가능한 환경이라는 것은 회의적"이라면서 "정보 비대칭성이나 불완전 판매 이슈가 나오지 않도록 투자자와 판매사 모두 이 점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투자업계에서는 비상장주식 신탁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서며 금융당국이 명확한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 피해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는 만큼 시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비상장주식 편입 신탁은 당국 차원에서 정한 기준이 없다"며 "불완전 판매 등 판매사에 책임 소재가 있어 보이면 사례별로 검토하고 사후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상준 법무법인 대건 변호사는 "비상장주식은 시가 평가를 명확히 할 수 없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면서 "시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투자자에게 얼마를 주기로 어떤 방식으로 손실률을 공지해주는지 등 각 증권사별 자의적인 판단이 아닌 객관적으로 발표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