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국방부·해병대 전 수사단장 '이첩 보류 명령' 공방 격화

2023-08-11 14:30
'집단항명' 혐의 박정훈 해병대 전 수사단장 국방부 수사 거부
국방부 검찰단 "수사 거부는 수사 방해…법에 따라 수사 진행"
외압 의혹 불거지며 대립 구도…채 상병 사건 진상 규명은 요원

경북 예천 실종자 수색에 투입됐다가 숨진 고 채수근 상병의 분향소가 마련된 포항 해병대 1사단 내 김대식관에서 지난 7월 20일 해병대원들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호우 피해 실종자를 찾다 순직한 채수근 상병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해병대 수사단의 채 상병 사건 조사 보고서가 경찰로 넘겨졌다가 국방부의 제지로 회수된 경위를 둘러싸고 국방부와 박정훈 해병대 전 수사단장 간 공방이 격화하고 있다.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을 처벌대상에서 제외하려 윗선이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까지 불거져 양측 대립 구도는 한층 선명해지고 있다. 특히 채 상병 사건과 관련해 집단항명 수괴 등 혐의로 입건된 박 전 수사단장이 자신에 대한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 거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파장이 커질 전망이다. 채 상병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수사가 첫걸음도 떼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모양새다.
 
◆ ‘채 상병 사건’ 수사 논란의 전말
해병대 제1사단 소속이던 채 상병(당시 일병)은 지난달 19일 오전 9시쯤 경북 예천 내성천에서 구명조끼 착용 없이 실종자 수색을 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이후 해병대 수사단은 이번 사고 경위 등에 대한 자체 조사를 벌였다.
 
해병대 수사단은 같은 달 30일 임 사단장과 채 상병 수색 작업에 관여한 중위·중사 등 상급자 8명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담은 조사 보고서를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했다. 이 장관은 이 보고서를 결재까지 끝냈다.
 
하지만 이 장관은 같은 달 31일 돌연 해병대에 언론 브리핑과 경찰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 경찰 수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언론과 경찰에 공개할 내용에서 책임자 범위와 혐의 사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박 전 수사단장은 이 장관의 이첩 보류 지시를 명시적으로 전달받은 적 없고, 오히려 국방부 관계자들로부터 ‘채 상병 사고 조사 보고서에서 군 관계자들의 혐의 내용을 빼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수사단장은 8월 2일 오전 사건을 경북경찰청에 이첩했다. 국방부는 같은 날 오후 경찰로부터 사건기록을 회수했다. 국방부는 이와 동시에 박 전 수사단장을 보직 해임했으며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했다.
 
채 상병 사건 조사 결과의 경찰 이첩을 둘러싼 논란 속 국방부 장관보다 윗선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채 상병 사망에 책임이 있는 관계자들 명단에서 임 사단장, 박상현 1사단 7여단장을 제외하라는 지시가 해병대 수사단에 전달됐다는 주장이다.
 
임태훈 군인권센터소장은 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해병대 수사단장은 임 사단장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있고 (경찰에) 이첩하겠다고 해 국방부 장관도 결재했는데 돌연 취소가 됐다”며 “안보실에 보고되면서부터 일이 꼬였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서 이 장관(당시 대령), 임 사단장(당시 소령)은 외교안보수석실 행정관으로 근무했는데, 현재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도 마찬가지로 외교안보수석실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이른바 ‘윗선 개입 의혹’에 사실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고(故) 채수근 상병 수사와 관련해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단 앞에서 입장을 밝히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해병대 전 수사단장 “외압 받았다”…수사 거부
박 전 수사단장은 11일 서울 용산 국방부 검찰단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방부 검찰단은 적법하게 경찰에 이첩된 사건 서류를 불법적으로 회수했고, 수사에 외압을 행사하고 부당한 지시를 한 국방부 예하 조직으로 공정한 수사가 이뤄질 수 없다”며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명백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박 전 수사단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수사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를 해병대사령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대면보고했다”며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국방부 법무관리관으로부터 수차례 수사외압과 부당한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수사단장은 이달 1일 오전 9시 43분께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과 한 통화에서 “법무관리관이 직접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으로 (혐의를) 한정해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 통화는 박 전 수사단장이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기초수사 결과를 지난달 30일 보고해 결재받은 이후 이뤄진 것이다.
 
박 전 수사단장은 “직접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직접 물에 들어가라고 한 대대장 이하를 말하는 것이냐”라고 물었더니, 법무관리관이 “그렇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에 박 전 수사단장은 “나는 사단장과 여단장도 사망의 과실이 있다고 보고 광의로 과실 범위를 판단했다”며 “어차피 수사권은 경찰에 있으니 경찰에서 수사해 최종 판단하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 법무관리관에게 “지금 하신 말씀은 외압으로 느낀다. 제삼자가 들으면 뭐라 생각하겠나. 이런 이야기는 매우 위험하다. 조심해서 발언해달라고 했다”고 박 전 수사단장은 전했다.
 
전날 국방부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 법무관리관이 박 전 수사단장과의 통화에서 ‘죄명을 빼라, 혐의자 및 혐의사실을 빼라’고 했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법무관리관이 “죄명을 빼고 사실관계만 적시하거나 공문 처리해서 기록만 넘기는 등 이첩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라고는 말했다고 국방부 관계자는 전했다.
 
박 전 수사단장은 “지난달 30일 해병대사령부 정책실장으로부터 대통령실 안보실에서 수사 결과보고서를 보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수사 중인 사안이어서 안 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다만 박 전 수사단장은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이 전화해 수사서류를 보낼 수 없다면 언론브리핑 자료라도 보내주라고 지시해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언론에 브리핑할 예정이었던 자료를 안보실 김모 대령에게 보냈다”고 했다.
 
고(故) 채수근 상병의 안장식이 7월 22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되는 가운데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이 추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국방부, 전 수사단장 수사거부에 “매우 부적절”
국방부는 이날 박 전 수사단장의 수사 거부에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국방부 검찰단은 “박 전 수사단장의 오늘 수사 거부는 신속하고 공정한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어 군의 기강을 훼손하고 군사법의 신뢰를 저하시키는 매우 부적절한 행위”라고 밝혔다.
 
특히 국방부 검찰단은 “국방부 검찰단은 강한 유감을 표하며, 향후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해병대 사령부도 박 전 수사단장의 증언을 반박하고 나섰다. 해병대 사령부는 “현역 해병대 장교로서 해병대 사령관과 일부 동료 장교에 대해 허위 사실로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에 유감을 표한다”는 입장을 냈다.
 
해병대 사령부는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은 7월 31일 정오, 채 상병 순직사건 조사 자료에 대한 경찰 이첩을 보류하고, 국방부 법무 검토 후 이첩하라는 지시를 장관으로부터 수명(受命·명령을 받음)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에 따라 해병대 사령관은 (7월 31일) 당일 오후 4시 참모 회의를 열어 ‘8월 3일 장관 해외 출장 복귀 이후 조사 자료를 보고하고 이첩할 것’을 수사단장에게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는 박 전 수사단장이 지난 9일 처음으로 낸 실명 입장문과 정면 배치된다. 앞서 박 전 수사단장은 “국방부 장관 보고 이후 경찰에 사건을 이첩할 때까지 저는 그 누구로부터도 장관의 이첩 대기 명령을 직·간접적으로 들은 사실이 없다”며 “다만 법무관리관의 개인 의견과 차관의 문자 내용만 전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국방부는 채 상병 사건을 조사본부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이 장관은 지난 9일 채 상병 사건을 국방부 조사본부로 이관하고 법령에 따라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국방부는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에 대한 추가적 검토가 필요해 사건을 국방부 조사본부로 이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관련자들의 과실과 채 상병 사망 간에 직접적이고 상당한 인과관계에 대해 명확한 설명이 없어 범죄 혐의 인정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