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실적 쌓기용 품앗이 입법 발의
2023-07-3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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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 있을 때 흔히 접하는 풍경 중 하나가 ‘입법 품앗이’다. 법안을 발의하려면 동료 의원 동의가 필요한데 최소 10명을 채워야 한다. 문제는 상당수 의원들이 법안 내용을 꼼꼼히 살피고 당위성에 공감해 동의하기보다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이 법안을 발의할 때 동의해줬던 의원이 요구하면 갚는 식이다. 이게 아니라도 다음을 염두에 두고 공동 발의에 참여하는 경우가 흔하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입법 품앗이 결과는 부실 입법을 양산한다.
언론 보도(중앙일보)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기준 21대 국회에서 의원발의 법안은 2만1127건이다. 매일 18건씩 쏟아진 셈이다. 20년 전 16대 국회(1651건)와 비교하면 12배 이상 폭증했다. 그만큼 의원들이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이니 반길 일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국회 기능 가운데 입법은 가장 고유하며 우선한다. 자신이 발의한 법안이 만들어진다면 정치인으로서는 흐뭇한 일이다.
하지만 양과 질이 비례하지 않는다. 급증한 법안 발의와 달리 입법 품질은 떨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법안 가결률에서 확인된다. 16대 국회에서 법안 가결률은 37.7%였다. 이후 17대 25.5%, 19대 15.7%, 20대 13.2%, 21대 9.4%로 갈수록 내리막길이다. 쉽게 말해 16대 국회에서는 10건 발의하면 4건은 제정됐다. 반면 21대 국회에서는 10건 가운데 1건꼴이다. 법안 심사조차 받지 못한 채 폐기되는 법안이 수두룩하다. 법안 내용을 살피지 않은 채 서로 이름을 빌려주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다.
법안 발의 실적을 현역 의원에 대한 평가지표로 활용하는 민주당에서 이 같은 현상은 극심하다. 민주당 의원 176명이 SNS에서 법안 발의를 품앗이했다는 보도도 있다. 매일경제는 ‘민주당 의원 176명 전원이 가입한 법안 발의용 단체 텔레그램 방에서 2분 만에 공동 발의에 동의하거나 1시간 안팎이면 10명을 채운 사실을 확인했다’며 공동 발의 남발을 지적했다. 법안 발의는 총선을 앞두고 부쩍 늘어난다. 조선일보는 2019년 10월 한 달 동안 법안 발의가 집중됐다고 보도했다. 21대 총선을 앞둔 그해 10월 31일 실적까지 공천 지표로 활용하는 민주당 방침 때문에 10월 23일부터 30일까지 민주당 의원들이 200건을 발의했다고 한다. 한 달 전 90건과 비교하면 큰 폭이다. A의원은 20대 국회에서 모두 83건을 발의했는데 20건을 10월 30일에 쏟아냈다.
품앗이 발의와 함께 ‘복붙 법안’과 ‘쪼개기 법안’ 관행도 문제다. ‘복붙 법안’은 문구만 바꿔 동일한 법안을 여러 개 복제해 발의하는 것이다. 언론은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 사례를 제시했다. 이 의원은 지난해 4월 국회 14개 상임위에 ‘장애인 차별조항 정비 개정안’을 일제히 제출했다. 이 의원은 공무원 해임 사유로 '심신장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경우'를 '사고 또는 신체적‧정신적 질환으로 장기간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경우'로 수정해 발의했다. 이 의원도 신체장애가 있기에 민감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심신장애’라는 문구를 수정하기 위해 70개 법률 개정안을 낸 건 지나쳤다는 지적이다.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면 앞다퉈 비슷한 법안을 발의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사망사고와 휴가 중인 군인이 음주운전으로 사망하자 너도나도 발의한 게 대표적이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대형마트에서 시각장애인 안내견에 대해 입장을 거부하자 관련 법을 발의했다. 장애인 보조견 자원봉사자 출입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할 경우 1년 이하 징역(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이다. 현실성이 떨어지기에 2년 넘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김남국 의원 코인 논란을 계기로 비슷한 법안도 10건 발의됐다.
공동 발의 제도는 신중한 법안 발의를 통해 입법 기준선을 높이고 법안 품질을 높일 목적이다. 또 서로 다른 상임위끼리 크로스 체크함으로써 위헌 소지를 최소화할 목적도 있다. 그러나 공천용 실적 쌓기나 이슈에 올라탄 이름 알리기, 그리고 품앗이 공동 발의 관행이 맞물리면서 행정력 낭비와 부실 입법을 반복하고 있다. 의원들 사이에서도 법안 발의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무소속 이성만 의원은 지난해 12월 일본식 용어와 한자를 순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의원들이 용어만 고쳐 법안을 남발하는 행태를 막기 위해서다. 국회 사무처 또한 ‘입법 규제 영향평가’ 도입에 나섰다. 입법조사처와 전문기관을 통해 함량 미달인 입법을 막겠다는 취지다.
친분 있는 초선 의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있다. 발의 건수에 집착하지 말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법안을 만드는 데 주력하라고 조언한다. 임기 4년 동안 한 해에 1건씩 4건만 만든다는 각오로 임하라고 한다. 시대정신을 녹여낸 법안을 4건만 남긴다면 평가받을 수 있다. 내용으로 평가받는 정치여야 한다. 오기형 민주당 의원은 “어떤 법이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질적 평가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노자는 “법 조항이 많을수록 도둑이 늘어난다”고 했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은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민심을 얻었다. 양은 중요하지 않다. 공동체 변화를 이끌어낼 법이 중요하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