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칼럼] 전쟁의 선과 악 …지정학의 귀환? 가치의 복귀?
2023-06-28 05:00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하는 국제질서 변화
2012년 이후 국제사회, 특히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미국의 상대적 쇠퇴현상의 장기적 지속과 그 무렵 본격 시작된 중국의 공세적 대외정책, 그리고 러시아의 상대적 국력회복과 인도의 새로운 부상 등이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사고를 촉발시켰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앞으로 국제질서는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내다본 용어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귀환 가능성은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로부터 손쉽게 떼어내어 자국령에 편입시킬 때 서방국가들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분명해졌다.
국제정치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본적으로 다극체제가 되면 복수의 주요 행위자들을 중심으로 국제정치가 전개되고 주요 행위자들 간에는 일종의 세력균형 체제가 작동하게 된다. 세력균형 체제 안에서는 주요 행위자들이 서로 합종연횡을 해가며 어느 한 세력이 지배적 우위를 점하지 않도록 한다. 다극체제 하에서는 이런 상호견제 작용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안정이 대체적으로 유지된다. 2차 대전 후 70년간은 미국이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홀로 국제질서 유지를 담당하였던 ‘미국의 패권기’였기에 국제질서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과거처럼 홀로 질서유지를 감당하기 힘들어지면 다극체제가 들어서고 지정학의 관점에 입각한 세력균형 체제가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양극체제보다는 다극체제가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이라는 것이 국제정치학계의 다수설인데 양극체제는 두 진영 간의 경쟁을 격화시킬 뿐 아니라 경쟁을 완화시킬 균형세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다시 선악을 기준으로 국제정치를 재단하고 미국이 2차 대전 후 창설한 규범기반 국제질서로 복귀할 수 있을까? 즉 지정학의 귀환이 실현되지 않고 다시 20세기 후반과 같은 미국 주도 질서가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봐야 할 때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내어야 앞으로 다가오는 국제질서를 예측할 수 있고 이에 맞춰 우리 외교정책도 제대로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귀환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질 때 우리는 국제사회가 앞으로 대변혁의 시기를 거칠 것이며 이 대변혁의 시기는 20세기 후반의 국제질서와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이 강했다. 즉 20세기 후반 미국이 압도적인 패권으로 국제질서를 홀로 유지해 나갈 때는 규범 기반 국제질서가 당연시되었으나 이것이 변화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대변혁 시대가 되면 각국은 각자도생의 길로 가고 주요 행위자들은 국제사회 공동이익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고 자국 이익을 위해 약소국 이익을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었다. 좀 더 거칠게 표현하면 약육강식의 시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가 돌아올 것이고 이것이 국제정치의 본연의 모습이기에 지난 70년의 질서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21세기에는 지정학적 요인이 가치적 요인보다는 국제정치를 더 지배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국제정치의 질적인 변화의 예고편을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하의 미국 대외정책에서 이미 목격하였다. 그런데 현 바이든 정부하에서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제한적 지원을 계속하면서 가치중심, 규범기반 국제질서를 회복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 이런 바이든 정부의 정책이 다음 미국 정부로 계속 이어질 것인가를 물어봐야 한다. 이미 시작된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트럼프가 바이든을 앞서고 있으며 지난 총선에서 미 하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된 것을 감안하면 다음 대선은 트럼프 또는 트럼프류의 대통령이 당선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미국의 대외정책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 바이든 행정부조차도 가치 및 규범기반 국제질서를 충실히 이행하거나 이를 지켜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과 우호국들을 결집하여 중국과의 대결전선에 임하려 하고 있다. 즉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동맹과 우호국들의 가치연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반도체 분야에서는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 수출을 못하도록 막으면서 미국 IT기업들은 중국과 거래를 여전히 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에서도 미국 기업에게만 혜택을 주고 한국 등 동맹국들의 기업에게는 차별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런 것은 미국이 만들었던 ’규범기반 국제질서‘, 즉 내·외국 기업을 동등 대우하는 WTO 규정을 미국 스스로가 어기고 있는 사례이다. 미국은 가치와 규범을 미국의 국익에 부합될 경우에만 적용하는 방식, 소위 ’선택적 가치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들이 쌓이면 지정학 시대의 도래를 촉진할 것이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엄한 가치의 잣대를 갖다 댄 미국이 최근 중국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도 가치일변도 외교의 한계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면서 침략국의 오명을 벗을 수는 없게 되었고 이로 인해 EU를 비롯한 서방국들이 러시아를 규탄하면서 자유진영의 결속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등 내부에서는 러시아가 패퇴할 때까지 우크라이나를 무제한 지원하자는 주장에 대한 반론들이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양측이 수용할 수 있는 타협안을 찾아 가급적 종전협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전쟁 피로감’이 쌓일 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의 경제에 주름살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즉 서방의 가치연대가 견실히 오래가지 못하고 각국은 자국이익 중심의 외교로 복귀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인도, 남아공 등 소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 속하는 주요 국가들과 비서방 국가들은 선·악으로 양분된 가치외교의 틀 속에 자국의 외교를 속박시킬 것을 거부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원인에 대하여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들 국가와 연대하여 반서방 연대를 더 확장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러한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으로 인해 세계는 자유, 권위 양 진영으로 이원화되지 않고 다분화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즉 가치보다는 지정학적 고려가 더 우선되는 시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튀르키예와 이탈리아, 헝가리 등 서방국가 선거에서 계속 민족주의적 극우 성향의 지도자가 당선되는 것을 보면 서방국가 내부에서도 가치보다는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더 농후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흐름 전반을 고려하면 지정학의 시대가 10년 전부터 예고되어 오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고 계속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런 큰 저류의 흐름 위에 일어난 작은 파랑에 불과하다. 파랑이 만든 물결을 보고 물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이런 속단을 할 경우 작은 배는 물살의 흐름에 실려 정처없이 떠내려 갈 것이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 특임대사 △주호주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