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우리들의 영웅 '아버지'

2023-06-20 06:00

[이두수 작가]


지난 16일 용산아트홀에서 서울그랜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 참석했다. 영화음악은 영화의 명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그런 힘도 가지고 있다. 영화 '미션'에서 ‘가브리엘의 오보에’(넬라 판타지아)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저며온다. 영화 '기생충'에서 헨델의 음악이 느껴지는 ‘믿음의 벨트’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빈부격차와 계층 간 갈등을 극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내 가슴에 남는 것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엔딩 장면에 나오는 이동준 감독의 ‘에필로그’다. 이 음악은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영화 전체를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다. 한국 영화음악 콘서트에서 이 음악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며 전쟁과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충(顯忠), 국가를 위해 충과 의를 떨치며 다한 삶을 기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많은 아버지들의 삶이 그랬고 이 분들의 노고에 의해 현재의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며 우리의 아버지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힘없이 구부정한 노인들의 모습이 구질구질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우리의 영웅들인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우리 6형제는 아버지에게 모두 각을 세웠고 심지어는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시대에 뒤진 것 같은 아버지의 삶의 태도와 완고함은 자식들에게 반발을 샀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께 너무 심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지만 그땐 그랬다. 나도 자식을 키우지만 자식은 내 맘처럼 커주질 않는다. 자식이 나의 바람과 기대에 어긋나도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두 번 들 때가 아니다. 나도 훌륭한 부모라는 소리까지 듣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아이들과 대화가 잘 안 되고 때로는 한동안 대화조차 없는 때가 있기도 하다. 자식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나도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고루하고 고집만 센 그런 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뒤돌아보면 나도 아버지와 자잘한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다. 벌초를 하면서 듣은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 농사 일손을 거들며 듣은 전쟁 때 겪은 얘기 등 대부분 서사적인 이야기들이다. 어쩌다 전화를 걸면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건강 잘 챙기고 열심히 살아” 한마디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해 주는 얘기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이야기, 한·일 관계에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세계와 인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등 교훈적인 이야기뿐이다.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삶의 원칙 앞에서는 단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자녀가 독립적으로 크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적 일원이 되지 못한다. '애들을 응석받이로 키우니까 사회가 이 모양이다'라는 뭐 이런 꼰대 같은 관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다. 어릴 때는 이상을 좇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현실화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적정한 선에서 이상과 현실이 타협하거나 이상을 포기하고 과도하게 현실에 집착하기도 한다.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적정하게 맞추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아버지.
1930년 6월생인 아버지는 어릴 때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나 보다. 특히 글씨를 잘 써 큰집 할아버지에게 자식 제대로 교육시켜 보라고 논과 밭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사람으로서 기본교육에 해당하는 소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갈 형편은 못 되어 농사를 거들었고 훈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한학을 잠시 배우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되던 그해 15살에 큰집 할아버지 주선으로 양평에 사는 20살 난 서씨 여인과 결혼했다. 광복과 더불어 그의 국적만 바뀐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리지만 한 집안에 가장이 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은 것이다. 광복 후 나라의 혼란만큼이나 본인도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에 갔던 삼촌은 돌아오지 못하고 숙모가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본인에겐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동생들이 4명이나 더 있었고 1년 후엔 첫딸을 얻어 책임감이 강한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큰집의 맏이로서 일가와 가족이 굶지 않으려면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20살이 되던 해에는 전쟁이 났다. 38선 부근이라 바로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했지만 한동안은 잠잠하다가 추석 무렵 인민군에게 징집명령을 받았다. 추석을 쇠고 다시 모이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런데 추석날부터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인민군들은 서둘러 퇴각했다. 국군이 고향을 수복하고 나서는 군인으로 징집된 것은 아니지만 자경단원으로 차출되어 지역 치안 유지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하면서 자경단도 군인들과 섞여 대전까지 후퇴했다. 추운 겨울 정식 군인이 아니라서 보급품도 없이 각자도생하는 상황이라 생각없이 인민군 옷을 속에 껴입었다가 적의 첩자로 몰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 그때 마침 헌병대장이 자경단을 조직했던 사람이라 아버지를 알아보고 보증을 서 주어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니 첫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가족과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 이번엔 국군 영장이 나왔다. 제주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백마고지가 있는 철원지구 부대로 배속되었다. 휴전을 앞둔 당시는 고지전을 벌이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쌍방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사상자가 엄청 많이 나던 때였다. 매일 같이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그런 죽음의 전장에 배속되었지만 그는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행정병으로 뽑혀 다행히 고진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고지전에 투입된 전우들은 대부분 전사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폭격 후유증으로 안면근육마비증이 생겨 평생 찡그린 얼굴 모습을 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지만 해마다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어찌 어찌해서 겨우 넘기고 있었다.  마른 땅에도 잡초가 나듯이 자녀는 2년에 한 명씩 태어났다. 그런 와중에도 동생들을 다 출가시켰고 자신의 맏아들은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농사만으로는 집안을 이끌 수 없어 목상(나무 장사)을 시작했다. 때를 잘 만났는지 제법 돈도 벌었고 서울을 들락거리다 마누라보다 훨씬 젊은 여자도 만나 한때 딴살림도 차렸다. 사고가 생겨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사업이 쫄딱 망해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동네의 새마을 지도자가 되었다. 동네 진입로가 소달구지 한 대 겨우 지나갈 돌투성이 길이라 대부분  지게로 짐을 나르던 시절에 마을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바꾸었다. 이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하사품인 자전거 한 대를 받았다. 자전거를 받던 날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나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삼천리 자전거에는 금빛 메달이 걸려 있었고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일만큼 자랑스러워했다.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였는데 그때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네가 매일 바뀌기 시작했다. 소로 밭을 갈던 것에서 경운기로 바뀌어 가는 외형적인 변화 이외에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태도도 바뀌었다. 그동안 겨울 농한기 때에는 매일 같이 술과 노름판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누가 더 새끼를 잘 꼬고 가마니를 많이 짜는지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식사 전에 퇴비를 한 짐 베고 논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 전깃불이 켜지던 날 어두컴컴했던 부엌이 대낮 같이 밝던 날 우리 가족은, 아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텔레비전은 그보다 좀 더 일찍 들어왔다. 뒷집 기춘이네 집에는 서울에 간 기현이 형이 사서 보낸 텔레비전이 있어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보는 동네 극장이 되었다. 안테나는 뒷산 꼭대기에 설치해 마을까지 연결했고 전원은 배터리로 해결했다. 가끔 배터리가 나가 연속극을 볼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연속극에 푹 빠진 동네 어른들이 돈을 갹출해 배터리를 장만하면서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전원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우리 집안의 형제들은 서울 간 큰형 이외는 모두 중학교만 졸업하면 모두 생활 전선으로 내보냈다. 막내였던 나는 시대적인 혜택으로 도회지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가서 대학까지 다녔다. 당시 대학은 공산주의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대학생이면 반정부 데모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했다. 학과 공부보다는 이념 서클 활동이 의식 있는 학생처럼 보였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이념적 갈등은 비켜가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선택한 것에 대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마라. 그리고 무엇을 하든 열심을 다해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대단한 삶을 사셨다. 식민지 광복과 새로운 나라 건설기에 가장이 되었고, 전쟁과 국가 건설 기간에는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싸웠다. 그리고 농촌 계몽과 근대화의 시기에는 마을 리더로서 주민들의 의식 혁명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썼다. 세계 최빈국에서 이제는 살 만한 세상의 토대를 만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로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떠오른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언젠가 나도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무덤가에 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나도 열심히 살았다고,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정의가 무엇인지, 공정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었다.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때 최선을 써본다. 한자로 써보면 最善, 즉 최고의 선은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 자기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며 사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온 우리들의 아버지, 꼭 안아드리고 싶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에필로그를 들으며 6월의 하늘을 본다.
 

 

내 앞을 지나가는 작고 초라한 노인을 본다. 어깨는 축 처지고 힘이 없어 보인다. 수많은 이야기가 그의 가슴속에 가득할 텐데 누구도 들어주는 이 없어 걷는 걸음에도 생기가 없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가 없고, 존경의 눈으로 그를 보아주지 않는다면 나도 작고 초라한 늙은이가 되는 것이다. [이두수 작가 제공]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