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강국의 역설, 디지털런 공포] 20초 만에 전액 인출…불안심리가 '디지털런' 위기 키운다
“옛날 패턴대로 은행에서 예치금이 빠져나가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고 하면, 금융당국도 그 시간 동안 여러 고민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도 모바일앱을 통해 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가 30여 시간 만에 망했지 않습니까. 이젠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만큼 정책도 빛의 속도로 반응해야겠죠.” (오건영 신한은행 자산관리(WM)사업부 팀장)
지난 2011년 국내 금융권에 큰 파장을 몰고 온 저축은행사태 당시 금융당국으로부터 ‘정상’ 판정을 받았던 토마토2저축은행에서도 뱅크런은 여지없이 발생했다. 은행 영업점에선 '안전하다'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당시 금융당국 수장이던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해당 기관을 직접 찾아 2000만원을 예치하는 등 뱅크런 위기 진화에 총력을 다했지만, 돈을 찾으려는 예금자들로 영업점은 북새통을 이뤘다. 결국 닷새 만에 1895억원가량이 빠져나갔다.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른 '디지털런(디지털 뱅크런)'은 12년 전의 뱅크런보다 한층 진화된 형태다. 은행 점포나 ATM 기기에 국한됐던 예금 인출 수단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기를 통해 단기간에 대량 인출이 가능해지면서 은행 영업시간과 무관하게 상황이 악화할 수 있다. 실제 미국 내 자산규모 16위권인 SVB에서 하룻밤 새 56조원 규모의 인출 시도가 있었고 결국 36시간 만에 파산한 사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스마트폰 등 디지털기기를 통한 뱅킹 거래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놨다.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모바일뱅킹 이용률이 높고 디지털금융이 잘 발달한 한국에선 '디지털런' 쇼크가 더 빠르게 퍼져나갈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SVB 파산 사태 이후 디지털런에 대한 위기감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관계당국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긴장하고 있다. 당국은 금융규제 완화와 새로운 디지털 금융시스템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데, 디지털런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추진 중인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당국이 검토 중인 '스몰라이선스'의 경우, 비은행의 소액결제시스템 전면 참가 허용에 한국은행이 제동을 걸기도 했다. 한은은 "고객 체감효과는 미미한 반면 디지털런 발생 위험 확대 등으로 지급결제시스템의 안정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디지털화폐(CBDC) 도입과 관련해서도 금융불안 리스크 발생 시 '디지털런'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지적도 부각되고 있다.
만약 한국에서도 특정 은행이 불안하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계좌 속 자금은 얼마나 빠르게 빠져나갈까.
시중은행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활용해 실험한 결과, 자유입출금식 통장에서 타행 통장으로 전액 이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최소 15초였다. 절차가 간단한 소액 이체의 경우 은행 앱을 켜고 간편화된 본인 인증을 거쳐 송금한 뒤 ‘완료’ 메시지가 뜰 때까지 20~30초가 소요됐다. 스마트폰이나 앱의 처리 속도, 은행 앱에 대한 친숙도, 회당 최대 이체 한도에 따른 분할 이체 등을 고려해도 최대 1분을 넘지 않았다.
이미 은행들이 연쇄 파산한 해외 사례를 지켜본 만큼, 국내 금융시장을 바라보는 불안감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지난달 말 인터넷전문은행인 토스뱅크가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을 중심으로 때아닌 위기설에 휩싸이면서 일부 금융소비자들이 예금을 인출하거나 계좌를 해지하는 등 소규모 디지털런 해프닝이 발생했다. 일부 예금주들은 돈을 다른 은행 계좌로 이체하고 화면을 캡처해 SNS 등을 통해 게시하는 '인증'에 나서면서 이슈를 확대재생산하기도 했다.
이달 중순에도 OK저축은행, 웰컴저축은행 등 국내 주요 은행에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련 1조원대 결손이 발생해 지급정지에 나설 예정이라는 가짜뉴스가 나돌았다. 곧 지급정지 조치가 단행되는 만큼 서둘러 계좌 잔액을 모두 인출하라는 내용의 게시물이 빠르게 퍼져 나가자 해당 저축은행과 관련 협회가 직접 진화에 나섰다.
금융감독원도 이번 가짜뉴스 사태에 대해 "두 저축은행 모두 자기자본 비율이 규제 비율을 크게 상회하고 지난해에 이어 올 1분기 순이익이 예상된다"면서 "해당 기관들이 악성 루머 관계자에 대해 고발 등 법적 조치를 진행 중"이라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합동 루머 단속반'을 확대해 악의적인 뜬소문 생성과 유포 행위를 집중 감시하고 유관 금융회사의 건전성 현황 파악에도 주력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시장 불안요인에 대해 디지털화된 환경에서도 작동될 수 있는 보다 치밀하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면서 "특정 회사에 대한 허위 사실이 시장을 교란시키는 사례가 있는 만큼 금융위원회, 수사기관과 긴밀히 공조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처럼 한번 불길이 번지면 국내외 전체 금융시스템에 파장을 미칠 수 있는 '디지털런'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지적이 일자 관계당국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크게 보면 거시금융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지급보증 담보자산 비율을 높이는 방향의 논의와 금융소비자 보호의 일환으로 현재 5000만원 수준인 예금자보호한도 상향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먼저 한은에선 사전 안전장치로 지급결제 보증을 위한 은행의 담보자산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창용 총재는 지난 14일 미국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은 결제망에 들어오는 기관은 지급보증을 위한 담보 자산이 있는데, 결제하는 양이 늘어날 때 담보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은은 현재 70% 수준인 지급결제 담보비율을 수년 내 100%까지 점진적으로 올리겠다는 계획인데 이 총재의 발언은 이 계획을 더욱 앞당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지급결제'란 계좌이체와 어음, 수표, 신용카드 등 임의 형식으로 이뤄지는 자금이체 행위를 말한다. 지급결제는 지급인이 거래 은행에 맡겨놓은 돈을 수취인에게 지급해 달라고 요청해 이뤄지는데 은행은 수취인에게 돈을 우선적으로 지급하고, 한은 당좌계좌를 통해 타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받게 된다. 자금은 결제 건마다 발생하지 않고, 일일 단위 차액으로 거래된다. 그런데 만약 한 은행이 파산하기 시작해 돈을 내지 못할 경우 30%의 미결제 금액이 발생하게 돼 다른 은행들이 미결제 손실 부담을 떠안는 구조다. 즉, 디지털런에 따른 파산으로 은행이 지급결제 불능 상태에 빠질 것에 대비해 사전 안전장치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매년 국감 단골 이슈로 등장하던 '예금자보호한도 상향 논의'도 탄력을 받고 있다. 지난 2001년에서 멈춰선 예금자보호 한도가 20년 넘게 묶여 있어 시대에 맞게 보호한도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미 대부분 예금은 현재 '5000만원 한도' 내에서 안전하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런 논의는 내 예금이 안전하지 않다는 심리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데서 의의가 있다는 관측이다.
전문가들은 선제적 예방뿐 아니라 이슈가 불거졌을 경우 통화·금융당국이 사후적으로 어떻게 하면 신속하게 시장에 신뢰를 심어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랜 금융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공포감에 휩싸여서 뱅크런이 발생할 때 이를 사전에 알고 막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결국 정부에서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장에 알림으로써 공포 도미노 현상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인출금지명령과 같은 제도는 되레 시장 내 불안감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유동성을 포함해서 사전적으로 관리·감독하는 당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면서도 "하지만 인출금지명령은 오히려 정부의 유동성 공급이 어렵다는 것으로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는 은행권 신뢰를 모두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