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의 시선] ​민주당 일본관계, 김대중주의냐 문재인주의냐

2023-03-30 17:05

 

윤 대통령에게 악수 청하는 기시다 총리 (도쿄=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지난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회견을 마친 뒤 윤석열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1965년 한·일 협정과 국제법에 어긋나는 2012년 대법원 징용 배상 판결이 한·일 관계가 뒤틀어진 문제의 발단이었다. 여기에다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포퓰리즘이 합세하면서 지난 5년 동안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윤석열 정부는 시급히 복원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가 한·일 관계라는 기대를 안고 출범했다.
윤 대통령의 한·일 정상회담과 대일 외교 정책은 방향을 잘 잡았다고 본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가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진지한 설명이 모자라고 “내가 책임질 테니 따라와요”라는 식이다. 한·일 관계에선 역사적으로 누적된 국민정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통한 역사 인식을 포함해 역대 내각의 인식을 앞으로도 계승할 것을 확인한다”고 말하고 마친 것은 한국 국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사과나 사죄라는 말을 반복하기가 싫어 ‘지난 시절 선배들이 한국에 미안하다고 했는데, 나도 이하동문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일본에서 바짝 다가온 지방선거와 보궐선거를 의식했다는 관측이다. 회담 후 한국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떨어졌는데 기시다 총리 지지율이 오른 것을 보더라도 ‘이하동문’ 사과가 일본에서는 통한 것 같다.
징용에 관한 한 제3자 변제 명목으로 일본한테 다시 돈을 받아내기는 어렵다. 단돈 1엔도 못 낸다는 것이 일본의 확고한 입장이다. 국제법에도 어긋나고 한·일 협정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 정부가 머리를 짜낸 것이 양국 재계를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가 함께 ‘미래청년기금’을 조성해 양국의 청년 세대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발전을 명분으로 강제징용 배상 협상 과정에서 일본 측 피고 기업의 판결금 변제 대신 제시된 해법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과 대법원 판결이 배치되는 좁은 틈을 비집고 만든 안이다. 다만 한국의 미래청년기금을 일본 돈을 들여다 만든다니 이 돈을 받기도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방향을 다시 전환할 수는 없다. 상황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민주당 책임이 크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죽창가를 부르고 있다. 민주당이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대안을 내놓고 따져야 한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 중에서 김대중과 문재인은 한·일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인식이 다르다. 민주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실패한 문재인 정신이 아니라 김대중 정신이다. DJ가 1965년 한·일 회담과 대통령이 된 직후 1998년 일본을 국빈방문해 이뤄낸 김대중-오부치 정상회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 데서 찾을 필요도 없이 《김대중 자서전》에 나와 있는 내용을 옮겨본다.

한·일 회담과 정상회담에서 현실론 택한 DJ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는 첫 과제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들고 나왔다. 당시 한국은 절대 빈국(貧國)이었다. 정부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할 자금이 필요했다.
미국도 물밑에서 한·일 관계 정상화를 적극 지지했다. 동아시아 안정을 위해 한국·미국·일본의 3국 안전보장 체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한국으로서는 미국 덕분에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켰고, 세계가 미·소 양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냉전 시대에 우방의 권고를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제1야당인 민정당의 윤보선 총재는 한·일 협정에 대해 3억 달러에 과거 침략행위를 면책해주고 일본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승만 라인’을 팔아넘기는 매국(賣國)행위라고 규탄했다. 일명 평화선으로 불리는 이승만 라인은 이 대통령이 한반도 주변 수역에 한국 주권을 선언한 해양주권선이다.
야당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제2야당인 민주당의 박순천 총재는 윤 총재의 강경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국가 이익을 위해 한·일 관계 정상화는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민주당 소속인 김대중 의원도 박 총재와 생각이 같았다. 그는 야당 연합 모임에서 상호 이익이 보장된 협상안이라면 야당도 반대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대안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 식민지로 있던 나라들도 국익 때문에 그들을 지배했던 나라들과 수교했습니다. 다만 유의할 것은 협상에서 불이익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시중에서는 김대중은 사쿠라(여당에 매수된 야당 정치인) 중에서도 왕사쿠라라는 비난과 함께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여당의 앞잡이를 하면서 조흥은행 남대문지점에서 수표로 거금 3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소문이 소문을 낳으면서 고향 하의도에서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다. 편지로는 성이 안 찼던지 서울에 올라와 질책했다. “앞길이 창창한 네가 어째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다닐 일을 하고 다니는가.”
1965년 전국에서 한·일 회담에 반대하는 거센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는 군대의 힘으로 진압되었다. 야당의 기세도 완전히 꺾였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세계의 흐름, 민심의 향배를 모르고 강경 투쟁만을 부르짖던 야당은 박 정권의 독재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다’고 회고했다.
1965년 6월 22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기본 조약, 청구권, 어업 문제 등에 관한 한·일 협정이 정식 조인됐다. 독도 문제는 보류됐다. 민정당과 민주당은 한·일 협정 반대 투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야권을 통합해 민중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윤씨가 낙선하고 박순천 여사가 대표 최고위원에 뽑혔다. 신당 내에서도 윤씨의 강경 노선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일 협정을 체결한 후 박정희 정부는 일본에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원조를 얻었고 미국에서는 절대적 지지를 이끌어 냈다. ‘1965~1969년 박정희 정부는 일본 차관과 무상 자금, 베트남 파병에 따른 본국 송금, 군수산업 호황 등에 힘입어 경제를 안정시키고 경제성장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연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고속도로를 만들고 많은 빌딩을 짓고 울산공업단지를 확장하는 등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김대중 자서전) 반면 이를 고비로 야당은 세력이 약화됐다.

반일 정서 올라타 국익 해치는 정치는 실패

그 후 수감 생활, 미국 망명, 도쿄 납치사건 등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은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어 1998년 10월 7일 일본을 국빈방문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며 강경책을 썼고 이는 또 다른 강경책을 불러왔다. 양국의 외교 채널은 끊기고 외교 관계는 나빠질 대로 나빠졌을 때였다.
한국에서 일왕이냐 천황이냐 호칭 논란이 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나라 사람들이 불러주는 대로 하는 것이 좋다며 궁성 만찬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을 썼다. 아키히토 천황은 만찬 석상에서 “교토에 도읍한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에서 온 귀화인이라고 합니다”는 말을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오부치 총리의 사과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나온 사과 중 정점을 찍었다.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하였다.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대중문화를 개방한 것도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 문화 개방이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일본에서 오히려 한류(韓流)가 일어났다. 한·일 어업협정도 체결했다.
남한산성의 피난 조정에서 최명길은 “조정과 백성을 살리기 위해 청나라에 항복하고 화친을 맺자”고 주장했고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주전론을 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최명길을 매국노로 규정했고 김상헌을 지사로 떠받들었지만 지금의 역사적 평가는 그때와 달라졌다.
2019년 중국 청두(成都)에서 열린 이후 문을 닫은 한·중·일 정상회담도 다시 살려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손을 잡고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구도에서 한·미·일 안보협력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일본 기피증이 심각해 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해서도 경계를 했다. 안보협력은 팀워크가 중요하다. DJ는 1965년 한·일 회담에 무조건 반대하는 윤보선 총재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북한·중국·소련에 둘러싸인 한국이 일본까지 잠재적 적국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일본과 관계 정상화는 당연히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반일(反日) 정서에 기대 일본을 때리면 지지율은 올라가게 돼 있다. 그러나 국익을 생각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정치를 하려면 거품 같은 지지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