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아직 끝나지 않았다"…'4·3사건' 유네스코 등재 나선 제주

2023-04-03 10:31
4·3사건 75주년…희생자 가족 아픔은 여전
4.3기록물 3만303건 수집…국내 심사 진행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 대정읍 인구는 2만1329명이다(2020년 2월 기준). 대정읍에선 총 639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사진=신진영 기자]

"제 큰아버지가 4·3사건 희생자입니다"
 
강병삼 제주시장은 지난달 18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공개했다. 그는 지난해 8월 22일 제주시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4·3사건 직권재심 국선변호인으로 활동했다.

강 시장은 "제 큰아버지는 군법회의 희생자"라며 "제 부친은 큰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속에 사셨고, 큰아버지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 나서야 한을 풀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제주 제주시 중앙로8길 제주북초등학교. 1947년 3월 1일 이곳에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다. [사진=신진영 기자 ]

여전히 이름이 없는 '제주 4·3사건'

1947년 제주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발포 사건은 4·3사건 도화선이 됐다. 기마경찰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기마대는 다친 아이를 두고 그냥 갔고, 군중들은 흥분해 돌을 던졌다.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이 모습을 본 미군정 경찰은 구경꾼들을 향해 총을 쐈다.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다쳤다. 그해 3월 10일부터 22일까지 제주도 전체 총파업이 이어졌다. 

이듬해 1948년 무장자위대 봉기가 시작됐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 진압 등으로 양민들이 대거 희생됐다. 적게는 1만4000명, 많게는 3만명이 다치거나 숨진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제주 4·3기념사업회에 따르면 2021년 6월 기준 희생자 1만4660명 중에 생존자는 0.8%인 116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제주 4·3사건은 아직 정확한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처럼 제대로 된 이름이 명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날 제주 4·3공원 관계자는 "어쩌면 4·3사건은 영원히 이름이 없이 '~사건'으로만 기억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이 불탄 것은 이승만 정부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눈 덮인 한라산에서 토끼몰이처럼 쫓기고 쫓겨 악에 받친 산사람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는 소행도 있었다"고 전했다.   

1948년 4월 3일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 좌익 세력의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당시 무장시위대와 군경찰을 비롯한 우익 단체들은 서로를 '통일 반대 세력'이나 '빨갱이'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눴다. 군경은 한라산으로 올라간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해안가 마을로 강제 이주시키고 산간 마을을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을 폈다. 

이주 명령을 접하지 못한 상당수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에 의해 붙잡혀가거나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군경에 붙잡혀 간 사람들은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았고,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 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거나 오랜 기간 옥살이를 했다. 

수형자들은 제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을 담아 편지를 썼다. 제주 4·3추모관에 전시된 이들 편지엔 당시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주 섯알오름에 있는 고사포 진지. 일제강점기 때 미군 항공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략적인 군사 시설. [사진=신진영 기자]

말 못 한 그날...2003년에야 대통령 공식 사과

하지만 생존 피해자 일부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예비검속으로 목숨을 잃었다. 무장대와 관련이 있거나,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수백명이 섯알오름에 있는 옛 일본군 탄약고 터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뒤 암매장됐다. 

당시 23세였던 A씨는 "우리 언니네가 서문통에서 고무신 장사를 했는데, 그 상점에 앉아서 비행장으로 사람들을 나르는 것을 봤어.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때 비행장에서 800명을 죽여버렸다고 했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함부로 말해선 안 됐던 4·3사건이었다. 이 일은 2000년 '4·3 특별법 제정'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2003년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때는 4월 3일이 국가 지정 추념일이 됐다. 

2021년엔 4·3특별법 전부·일부 개정으로 희생자 보상과 4·3 군법회의 수형인 직권재심, 가족관계 작성·정정이 이뤄졌다. 희생자와 유족의 실질적인 피해회복과 명예회복을 실현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관계자는 "제주 4·3이 진상규명으로 시작해 실질적 피해회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20세기 비극에 대한 21세기적 최선의 해법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속도…"과거사 해결 선도 모델"

제주는 4·3사건 75주년을 기념해 제주 4.3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유네스코 등재 신청을 위해 등록한 기록물은 총 3만303건에 달한다. 사건 당시 공공기관 생산기록과 군·사법기관 재판기록, 미국 생산기록 등이다. 사건 이후 4·3 희생자 심의·결정 기록을 비롯해 도의회 조사 기록, 피해자 증언, 진상규명운동 기록, 화해·상생 기록 등도 포함됐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란 기록유산 보존에 대한 위협과 이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세계 각국 기록유산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1992년부터 운영 중인 사업이다. 진정성과 완전성, 세계적 중요성, 독창성, 희귀성, 보존 상태 등을 판단해 등재를 결정한다.

4·3기록물은 현재 문화재청 공모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문화재청은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 심사를 거쳐 이달 말 기록물 2건을 선정한다. 선정 기록물은 2024년 상반기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한다.

제주 4·3기념사업위원회 관계자는 "제주 4·3 기록물은 자발적인 화해·상생 노력으로 국가폭력 극복과 해결을 이뤄낸 전 세계 과거사 선도적 해결의 총체적 기록물로 평가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