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2023-03-20 10:13

[사진=연합뉴스 ]

지난 2010년 9월 동중국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인근 해상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의 순시선과 중국 어선 한 척이 충돌했다. 8개 섬으로 이뤄진 센카쿠 열도는 지리적·군사적 요충지로 일본과 중국이 수십 년째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곳이다.

일본이 중국인 선장을 구금하자 중국은 희토류 수출을 금지하며 응수에 나섰다. 일본은 센카쿠 열도 일부 섬의 국유화를 선언하며 갈등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이렇게 시작된 중·일 분쟁은 4년 넘게 이어지다가 2014년 11월과 2015년 4월 두 차례 정상회담이 진행되고서야 가까스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사이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중국 내 '재팬 보이콧'은 상상 초월이었다. 도요타 등 자동차 기업은 중국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산둥성의 파나소닉 공장은 중국인들로부터 습격 당했다. 많은 도시에서 일본 브랜드 매장과 차량이 무시로 파괴됐다. 일본인들 역시 분노하기는 마찬가지. 1972년 수교 이후 양국 관계는 극악으로 치달았다.

싸움의 승패는 분명치 않다. 양국 모두 서로의 요구를 일정 수준 수용했고, 센카쿠 열도 역시 여전히 어느 한 쪽으로 귀속되지 않은 채 있다.

확실한 건 중국이 대일 경제·무역 보복으로 일본을 무릎 꿇리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희토류 수출 규제는 일시적으로 효과를 봤지만, 일본 정부도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정책 지원과 수입선 다변화를 추진했다. 일본의 대중 희토류 수입 의존도는 85% 수준에서 2015년 기준 55%까지 떨어졌다.

2016년 일본 관광에 나선 중국인은 630만명으로 분쟁이 한창이던 2012년보다 5배 넘게 증가했다. 중국 소비자들은 가성비 높은 '메이드 인 재팬'에 다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대일 교역으로 먹고 살던 중국 기업들은 당국을 향해 소심하게나마 조급증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양국 간 분쟁으로 중국의 대외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다. 중·일 관계는 '정랭경열(政冷經熱·정치적으로 경색돼도 경제 교류는 활발한)' 상태를 유지해 왔는데 중국이 경제 보복에 나서며 이 전통이 깨졌다. 

이후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과 호주를 상대로 한 금수 조치 등이 이어지면서 중국은 '말로 안 되면 경제 보복을 하는 나라'라는 각인 효과가 생겼다. 2014년 세계무역기구(WTO)는 중국의 제재가 부당하다며 일본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10년 가까이 지난 중·일 분쟁 사례를 반추할수록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결과에 더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4년째 지속되던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가 풀렸다. 그 대신 한국은 WTO 제소를 취하하기로 했는데, 관련 사안을 잘 아는 전직 고위 관료는 WTO 주변 분위기가 한국에 유리했다고 귀띔한다. 

수출 규제 품목인 불화수소와 불화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초기 충격을 딛고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에서 성과를 내던 중이었다. 불화수소의 경우 규제가 시작된 2019년 3630만 달러였던 대일 수입액이 2021년 기준 1250만 달러로 66% 감소했다. 포토레지스트는 벨기에에서 수입을 늘려 대일 의존도가 50% 밑으로 하락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수입액 중 일본(394억 달러) 비중은 15% 안팎에 불과하다. 이 수치는 2019년 17.1%에서 2021년 15.9%, 2022년 15.1% 등으로 계속 낮아지는 중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5월 "한일 쟁점 중 수출 규제는 실패"라고 규정했고, 비슷한 시기 닛케이는 경제적 수단으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한다는 건 원래 일본에 없던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대일 무역적자액은 2018년 240억 달러에서 소부장 품목 수입이 줄어든 2019년 191억 달러로 감소한 뒤 지난해 241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일 교역 상황은 평온하다. 

강제징용 문제 해법과 화이트리스트 재지정,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재개 등 다른 정치·경제·안보 이슈와 관련해서도 정상회담을 통해 손에 쥔 결과가 옹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회담 직후 "봄이 시작된 시기에 한·일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 기회가 찾아왔다"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공허하고, 얄밉기까지 하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흉노 왕에게 강제로 시집 간 절세 미인 왕소군을 그리며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고 읊었다. 때가 이르렀는데 상황은 여의치 않다는 비유로 자주 인용되는 시구다. 올 여름 혹은 가을에는 꼭 신록의 미덕이나 수확의 풍요로움을 향유할 수 있길 바란다. 
 

[이재호 경제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