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만에 독립운동 훈격 재평가 추진된다

2023-03-05 11:10
보훈처,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 구성·7일 첫 회의
이회영·이상룡·최재형 선생 등 훈격 재평가 국민여론 수렴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부가 60년 만에 독립운동에 대한 훈격을 재평가한다. 독립유공자 포상이 본격 실시된 1962년 이후 처음이다.
 
국가보훈처는 역사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의 전문가로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오는 7일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위원장은 유영렬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이 맡는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 김종민 변호사, 최완근 전 보훈처 차장, 김능진 전 독립기념관장, 언론인 등 17명이 위원으로 위촉됐다.
 
이회영 선생 손자인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김상옥 의사 외손자인 김세원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이사,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전 국회의원 등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자문으로 참여한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김호태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민인홍 대종교 총본사 전리도 자문으로 위촉됐다.
 
위원회는 6개월 가량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보훈처는 공적 재평가 필요성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 등 폭넓은 토론과 숙의 과정을 거쳐 위원회의 권고사항을 반영하고 정책 방향을 마련할 계획이다.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은 1949년 최초로 실시돼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등이 1962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규모 포상이 이뤄지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무려 60년에 이르는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포상 당시에는 확인되지 않았던 자료들이 다수 발견됐고, 관련 연구들도 활발히 진행됐다.
 
이에 따라 보훈처는 공적 재평가에 대한 각계의 제기를 수렴하고, 독립운동 공적뿐만 아니라 훈격의 영예성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없도록 심사기준을 명확하게 하는 등 독립운동 훈격 전반에 대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을 방침이다.
 
◆ 독립유공자 훈격 상향 주장 지속 제기

보훈처에 따르면 일부 독립유공자는 공적에 비해 낮은 훈격으로 포상돼 공적 재평가를 통해 상향돼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훈격 상향 주장이 제기된 대표적인 독립유공자는 김상옥(1962년 대통령장), 박상진(1963년 독립장), 이상룡(1962년 독립장), 이회영(1962년 독립장), 최재형(1962년 독립장), 나철(1962년 독립장), 헐버트(1950년 독립장) 등이다.
 
김상옥 의사는 1920년 조선총독부 고관 처단을 시도하다 도피 후 궐석재판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1922년 조선 총독 처단과 총독부 폭파 등을 재차 시도하다 체포를 피해 경찰 체포대에 맞서며 격렬히 저항하다 순국했다.
 
박상진 의사는 1915년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다. 그는 같은 해 당시 국내 최대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총사령이 돼 1917년 칠곡 부호 장승원 처단과 1918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 등을 지시했다.
 
이상룡 선생은 1896년 가야산에서 의병 봉기를 시도하고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해 회장에 추대됐다. 그는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1911년 대가족을 이끌고 중국 만주로 이주했다. 1911년 경학사 사장, 1919년 군정부 총재 및 서로군정서 독판을 지냈다.
 
이회영 선생은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당시 국내 최대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고, 경술국치 직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1912년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1924년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데 이어 1932년 만주사변 이후 주만일본군사령관 처단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최재형 선생은 1906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창설했다. 그는 1909년 한인신문 ‘대동공보’를 발행하고,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 처단 장소로 하얼빈을 추천하고 사후 대책을 준비했다.
 
1911년 권업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고, 1910년대 막대한 재산을 들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의병 세력을 지원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후 피살됐다.
 
나철 선생은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국권 회복을 위한 민간외교를 펼치고 1907년 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하다 체포돼 유배 10년 형을 받은 뒤 사면됐다.
 
1908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국권 회복 방안을 모색하고 1909년 귀국 후 훗날 대종교가 되는 단군교를 창립하고 초대 교주가 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헐버트 박사는 1919년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외국인 단체인 한국친우회에 합류, 미국 주요 도시를 돌며 강연을 벌였다. 그는 미국 상원에 한국독립 문제를 다룬 문건을 제출했으며 1942년 워싱턴DC에서 한인자유대회에 참석,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이들에 대해 관련 기념사업회 등이 훈격 상향을 꾸준히 요구했지만, 상훈법상 동일한 공적에 대해 훈·포장을 중복으로 수여할 수 없어 공적 재평가에 대한 제도적 어려움이 있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실제로 상훈법 개정으로 인한 훈장 등급 증설(1990년) 등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공적 재평가를 통해 훈격을 상향한 사례는 없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과거 포상된 분들의 경우 당시 확인된 자료만으로 훈격이 부여됨에 따라 사료가 추가 발굴되는 시점에서 억울한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포상 이후 추가로 확인된 공적까지 종합적으로 다시 평가하겠다”고 강조했다.
 
박 처장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하루라도 빨리 공적 재평가를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억울한 사례가 생겨나지 않도록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듣고 촘촘하게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훈격 결정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의 영예성을 담보하고 그 헌신을 예우하는 일류보훈 실현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