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비석을 겸한 융합형 탑이 되었으니
2023-02-16 09:02
불교중앙박물관 직원들의 출장길에 얹혀 함께 길을 나섰다. 본 업무인 충남 청양 칠갑산 깊은 계곡에 자리 잡은 장곡사(長谷寺)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을 찾았다.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고 새로 지은 유물관 규모도 장대하다. 연못도 복원하고 건물터도 발굴을 거의 마쳤다. 이 모든 작업을 뒷받침한 주인공은 오층석탑이다.
도심의 평지 안에 우뚝 솟아 있는 이 탑은 14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창건 당시 모습 그대로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된 연유 가운데 하나는 탑신에 새겨진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592~667)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씨도 한몫했다. 역사가 주는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 하겠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말해주는 또 다른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평제탑(平濟塔·백제를 평정했다는 의미)’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제 글씨는 풍우로 마멸되어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글씨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지나갈 만큼 희미해졌다. 제목인 시작 부분의 큰 글씨도 눈을 부릅떠야 보일 정도다.
비문은 탑 하단 4면에 빙 둘러 새겼다. 1면에 24행, 2면에 29행, 3면에 28행, 4면에 36행 등 총 117행이다. 각 행에는 16자 또는 18자를 새겼으니 총 2216자가 된다. 옆으로 누워 있는 ‘사면 비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글씨는 당시에 가독력을 높이려고 붉은 칠까지 했다고 한다. 색은 이미 바랜 지 오래되었다. 어쨌거나 비석을 겸한 융합형 조형물이 된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왜 제대로 된 거창한 기념비석을 만들지 않고 기존 탑에 부랴부랴 새긴 것일까? 그 시절 일정을 대충 살펴본다면 해답이 나올 것도 같다. 660년 7월 18일 왕도 부여에 진입했고 660년 8월 15일(신라 태종무열왕 7년) 탑에 기록을 남겼다. 한 달 정도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뭔가 허겁지겁했던 당시 분위기가 감지된다. 백제 부흥군의 강력한 저항은 물론 동맹인 신라와 외교적 마찰까지 겹치면서 참전비조차 여유롭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존의 가장 잘생긴 탑에 비석의 역할까지 맡긴 것이다. 하긴 궂은 역사도 역사다. 승자의 갑질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를 넘은 무례함의 극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백제·신라는 물론 당나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시간 또한 흐르고 흘렀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 등에 의해 탑 주변에 대한 발굴작업이 있었다.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참고로 태평은 요(遼)나라 연호다. 태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데, 서기로 환산한다면 1028년이 된다. 이 덕분에 본래 이름인 ‘정림사 탑’을 되찾게 된 것이다.
궁리 끝에 나무에서 돌로 재료를 바꾸었다. 목탑 제작 기법으로 석탑을 만들었다. 목탑 같은 석탑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돌이 나무와 같을 수는 없다. 목조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해야 했다. 그 시작이 정림사 탑인 것이다. 그 기술은 신라 고려로 이어지면서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미학을 이렇게 정리했다.
화이불치 검이불루(華而不侈 儉而不陋)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