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사회적 책임 넘어 신냉전 시대 기업의 새로운 도전 .. 정치적 책임

2023-02-08 17:42

[최남수 서정대 교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주목을 받아온 미국 대학원이 있다. 주인공은 예일대 경영대학원. 이 대학원의 제프리 소넨펠드 교수는 러시아에 진출해있는 기업들이 전쟁 개시 후 보인 행태에 따라 A~F의 평가 등급을 매기고 이를 공개하고 있다. A등급은 러시아 내 사업을 총체적으로 중단했거나 철수한 기업으로 1월 28일 현재 347개에 이르고 있다. 스타벅스, 블랙록, 포드, IBM, 넷플릭스, 나이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B등급은 일시적으로 일부 또는 전체 영업을 멈춘 상태에서 나중에 러시아로 복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488개 기업이다. 아마존, 애플, 아우디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어 C등급은 일부 중요한 사업은 축소했지만 다른 사업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167개 기업이다. 신규 투자 등만 중단하고 실질적으로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162개 기업은 D등급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F등급은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 225개 기업에 주어졌다. 예일대 경영대학원이 이 등급 명단을 수시로 업데이트해 공표하는 것은 기업들이 러시아 사업을 그만두거나 줄이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해온 1389개 기업 가운데 1000개가 넘는 기업이 사업을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 로스쿨도 예일대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학교의 연구진은 러시아에서 자회사를 운영해온 75개 비금융 유럽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들 75개 기업의 평균 ESG 점수가 100점 만점에 78점으로 다른 기업의 평균치 64점보다 크게 높다는 것이다. 특히 S(사회)와 인권 점수는 각각 81점과 84점으로 다른 기업의 64점과 67점을 많이 웃돌았다. 문제는 이렇게 ESG와 인권 평가가 좋은 기업들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지 일정 시점이 지난 후에도 러시아를 비판하는 발표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조사 당시(2022년 3월 15일) 기준으로 영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기업도 53%에 불과했다. 하버드 로스쿨은 이들 기업의 이런 행태 탓에 ESG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찌 됐건 러시아 내 사업 영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면서 많은 기업이 러시아에서 아예 몸을 빼거나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 의류기업인 유니클로의 경우 처음에는 러시아인들도 옷이 필요하다며 러시아 내 49개 점포의 문을 계속 열었지만 여론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마침내 가게 문을 닫았다. 네슬레도 상황은 마찬가지. 영업을 계속하다가 소비자들이 분노를 표시하고 해킹 사건까지 발생하자 핵심 품목을 제외한 다른 제품의 판매를 접었다.
 
이처럼 러시아 내 사업에 쏠리는 곱지 않은 시선은 무엇보다 기업들에 ESG 경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ESG는 윤리적인 경영을 포함하고 있는데 불법무도한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은 이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사업을 그만두라는 요구가 무리한 주장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오랜 기간 러시아에서 일궈놓은 사업 기반을 정치·외교적인 이유로 하루아침에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경제에 대한 정치의 지나친 개입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현실적으로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손실 규모가 만만치 않다. 예컨대 러시아 정부가 철수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는 방안을 추진함에 따라 메르세데스 벤츠는 22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형평성 문제도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고 인권운동가들을 처형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서구의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영업을 해온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소비자와 직원들이 기업이 더욱 윤리적 행동을 해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은 이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이슈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혀야 한다는 요청에 빈번하게 직면하고 있다. 퍼블릭 어페어스 카운슬의 조사 결과를 보면 이해관계자로부터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는 미국 기업의 비율은 2016년에만 해도 60% 정도였으나 2021년에는 90%로 크게 상승했다. 특히 직원들의 주문이 강한 상태이다. 지난 2018년 미 국방부가 인공지능을 이용해 드론 타격률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여기에 구글이 참여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구글 직원들이 강하게 반발한 게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구글은 직원들의 희망을 수용해 인공지능을 무기나 부당한 감시활동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지침을 마련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활동을 넘어서 이제는 ’정치적 책임 활동(CPR:Corporate Political Responsibility)’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되고 있다. CPR는 이제 기업들이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현실이 되고 있다. 정치나 외교 등 경제외적인 영역에서 비윤리적인 일이 일어나면 이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행동을 취하는 게 ESG의 가치에 부합한다는 시각이다. 기업으로서는 쏟아지는 요구를 어떻게 모두 만족시킬 수 있겠냐며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거에 흑인차별을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을 비판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적이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보다 더욱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기업이 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태도를 밝히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한국 기업에는 ‘남의 나라’ 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기업이 영업을 중단한 것은 한국 기업도 이미 CPR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기업에 대해 예일대가 매긴 등급은 B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와의 고위급 회담 등을 통해 일부 한국 기업의 러시아 잔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의사를 전해온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첨단기술 ‘전선’에서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려는 전략을 추진함에 따라 한국 기업도 점점 여기에 발을 맞추는 게 불가피해지고 있다. 경제와 무역의 정치화 추세 속에서 정치·외교적인 성격의 선택을 요구받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인권 등과 관련해 특정 국가의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태가 문제시되는 상황은 더욱 그렇다.
 
IBM은 이런 이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때 다섯 가지의 ‘이정표 질문’을 던져본다고 한다. 이 이슈가 비즈니스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가? 그동안 이런 이슈에 개입한 적이 있는가? 이해관계자들이 무엇이라고 얘기하는가? 경쟁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개입함으로써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어찌 보면 좀 나이브하고 원론적인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이슈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근거로 해서 대응 방법을 찾기엔 복잡다단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PR컨설팅 회사인 에델만이 지난해 11월 28개국에서 3만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3 신뢰 지표’ 조사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 등 19개국의 응답자 절반 이상이 기업이 기후변화, 경제적 불평등, 건강 등 논쟁적인 사회적 이슈에 대응할 때 정치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와 정치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업이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업으로선 곤혹스런 상황이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투명한 ESG경영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냉전 등 지정학적 긴장으로 인해 정치적 책임에 대한 압박도 강화되고 있어서다. 기업으로선 뾰족한 대응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대응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먼저 인권 침해 등 ESG에 어긋나는 사안에 대해서는 ESG 가치를 지키는 방향을 선택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과의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 편에 서야 하는 것 같은 이슈에 대해서는 ‘정경분리’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쓰는 게 좋을 듯싶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기업을 측면지원해 곤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외교적 해법 마련에 나서는 게 중요하다. CPR가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만큼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민관(民官)의 새로운 시선과 지혜, 그리고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때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