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소년 펠레, 축구의 신이 돼 하늘로

2022-12-30 10:31

8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고(故) 펠레. [사진=AP·연합뉴스]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에드송 아란테스 두 나시멘투.

가족들은 아이를 '디노'라고 불렀고, 친구들은 '펠레'라고 불렀다.

맞다. 우리가 아는 축구의 왕이자, 신인 펠레다. 펠레는 학창 시절 가난하게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축구를 가르쳐 준 것은 무명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였지만, 펠레에게 축구화와 축구공을 사주지 못했다.

그런 펠레는 양말에 신문지를 채워 넣고 끈을 묶었다. 이조차 없다면 자몽으로 대체했다.

양말과 자몽을 맨발로 트래핑하던 펠레는 아마추어 시절 여러 팀을 거쳤다. 

바우루 애슬레틱 클럽 주니어 소속일 때는 브라질 상파울루주 청소년 챔피언십을 2회 들어 올렸다. 풋살도 병행했다. 풋살에서도 독보적인 모습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펠레가 프로로 전향한 것은 15세이던 1956년이다. 소속팀은 산투스. 데뷔 골은 그해 9월 7일 성공했다. 신성의 등장을 알린 순간이다. 펠레는 이 골로 명성을 얻었다. 당시만 해도 반응은 반신반의했다.

반의가 무너진 것은 1957년. 16세의 나이에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펠레를 불러들였다. 프로 진출 10개월 만이다.

15세에 산투스 유니폼을, 16세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첫 월드컵은 1년 뒤인 1958년. 스웨덴에서 월드컵이 열렸다. 브라질의 결승 상대는 홈 팀 스웨덴.

결승 명단에 펠레가 있었다. 17세 249일의 나이로다. 이는 월드컵 최연소 출전 기록이다. 펠레는 결승에서 두 골을 넣었다. 브라질은 5대 2로 우승했다. 우승 직후 17세인 펠레는 골키퍼 길마르의 품에 안겨 울었다.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17세 소년이 이끈 월드컵 우승은 유럽을 강타했다.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벤투스 등 걸출한 팀들이 펠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인터 밀란은 계약을 성사했으나, 브라질 팬들의 폭동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로 지정했다.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함이다.
 

고(故) 펠레. [사진=AP·연합뉴스]

결국 펠레는 브라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산투스에서 1974년까지 뛰었다. 636경기 618골을 쌓았다. 1경기당 거의 한 골을 넣은 셈이다.

해외로 나간 것은 1975년이다. 1977년까지 3년 동안 뉴욕 코스모스에서 64경기 37골을 넣었다.

그 사이 펠레는 1962 칠레 월드컵, 1966 잉글랜드 월드컵, 1970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다. 1962년과 1966년은 월드컵 기간 중 부상에 시달렸다. 1962년은 부상에도 팀이 월드컵을 들었지만, 1966년은 탈락의 고배를 들었다.

1966년 이후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결정은 1970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바뀌었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구애 때문이다. 결승에서 브라질은 이탈리아를 상대했다. 경기 결과는 4대 1. 펠레는 직접 월드컵을 들어 올렸다. 브라질의 공격 포인트 중 53%는 펠레의 발끝에서 나왔다.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펠레는 브라질 유니폼을 입고 92경기에서 77골을 넣었다.

펠레는 축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가 공을 잡으면 '아름다운 게임'이라는 문구가 연상될 정도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탁월한 골잡이였다. 173㎝의 작은 키에도 헤더 역시 훌륭했다.

스포츠맨십 또한 훌륭했다. 1970 멕시코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펠레는 바비 무어를 따듯하게 안아줬다.

펠레는 은퇴 이후 유네스코 친선 대사, 브라질 스포츠 장관 등을 지냈다. 1997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는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전 세계의 빈곤하고 소외된 아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역사에 남은 고(故) 펠레의 바이시클 킥. [사진=AP·연합뉴스]

펠레의 사생활은 축구처럼 따듯하지 않았다. 3번 결혼했고, 여러 차례 불륜을 저질렀다. 자녀도 여러 명이다.

1977년 이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고관절 수술을 받고 휠체어를 탔다. 이후 신장 결석 제거 수술, 종양 제거 수술 등을 진행했다. 심장 문제로 병원으로 이송된 것은 2022년 11월이다.

유명을 달리한 것은 12월 29일. 병명은 대장암의 합병증(다발성 장기 부전)이었다.

펠레의 죽음에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웸블리 스타디움 아치를 브라질의 노란색과 녹색으로 꾸몄다.

전·현직 축구 선수들과 전 세계 축구 구단은 추모 행렬을 이루었다.

펠레는 왕에서 신으로 추앙된 선수다.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는 "펠레처럼 플레이하는 것은 신처럼 플레이하는 것"이라고, 브라질의 호마리우는 "펠레는 우리에게 신과 같다"고 했다.

1970 멕시코 월드컵 결승에서 펠레를 전담한 이탈리아의 수비수 타르치시오 부르니치는 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펠레도 다른 사람처럼 피부와 뼈로 만들어졌다. 신이 아니다."

부르니치는 펠레를 막는 데 실패했다. 펠레는 전반 18분 득점했고, 부르니치는 27분 옐로카드를 받았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축구의 신임을 증명했다.
 

두 손에 입 맞추는 고(故) 펠레. [사진=로이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