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장쩌민 사망…中 시장경제 발전 이끈 '상하이방' 수장
2022-11-30 18:57
WTO 가입 등 대외개방에 적극
中 두자릿수 경제 고속성장 일궈
톈안먼 사태로 악화된 中이미지 개선
한중수교 '중심'…1995년 방한
中 두자릿수 경제 고속성장 일궈
톈안먼 사태로 악화된 中이미지 개선
한중수교 '중심'…1995년 방한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11월 30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장쩌민 전 주석 부고를 발표했다.
통신은 "장쩌민 동지는 숭고하고 명망 있는 탁월한 지도자로,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로 공산주의 전사이자 중국 특색 사회주의 위대한 사업의 걸출한 지도자"라고 묘사했다.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에 이어 중국을 이끈 3세대 지도자로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재임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다.
그가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한 것은 1985년 상하이시 시장으로 선출되면서다. 기술 관료의 실리를 살려 상하이시를 중국 최고의 경제·금융 중심지로 키우고 상하이 당서기 자리에 오른다.
특히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를 맡고 있던 그는 시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상하이 현지 학생들과 유혈 충돌 없이 소요 사태를 잘 진정시켜 중앙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직후 열린 공산당 제13차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3기 4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며 톈안먼 사태로 실각된 자오쯔양(趙紫陽)의 뒤를 이어 당총서기 직까지 맡았다.
장쩌민은 2002년 11월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 부주석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준 것을 시작으로 다음 해 3월 국가주석직을 이양한 데 이어 2004년 당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국가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순차적으로 물려줘 평화적 지도부 교체도 이뤄냈다.
은퇴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정치적 영향력을 축적하여 막후에서 큰 발언권을 행사했다. 특히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시 출신 간부들로 구성된 ’상하이방(上海幇)’을 적극적으로 챙긴 것으로 유명하다. 상하이방은 태자당(중국 고위관료 자제),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출신)과 함께 중국 공산당 3대 정파를 이뤘으나, 시진핑 5세대 지도부 들어 '반부패 운동'을 벌이며 상하이방 세력이 숙청되며 사실상 와해됐다.
전문가들은 장쩌민이 중국을 경제 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당시 그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신을 이어받아 보수파 반대를 무릅쓰고 시장경제의 발전을 용인하고 주도했다.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이끌면서 중국 경제를 두 자릿수 고속 성장으로 이끌었다.
장쩌민이 제창한 '삼개대표론(三個代表論)'이 그의 시장경제 사상을 잘 대변한다. 공산당이 노동자·농민(인민)뿐 아니라 지식인과 자본가의 이익까지 대표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론으로, 당시 기업인을 당으로 포용한 획기적인 이론이었다. 이는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함께 중국 공산당 지도 이념으로 당장에 삽입됐다
장쩌민은 또 경제 전문가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발탁해 계획경제 체제인 당시 금융과 국영기업 체제에 대수술도 단행했다. 장쩌민 집권 아래 중국은 전 세계 주요 제조강국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악화된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미·중 관계를 회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외국어에 능통한 상하이방 수장답게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춰 외교무대에서 미국 팝송을 즐겨 부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2년 한·중 수교 중심에도 그가 자리 잡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인 1995년 11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