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미 있는 젊은 천재'의 탈, FTX 설립자 샘 뱅크먼-프리드

2022-11-19 11:56

FTX 설립자 샘 뱅크맨프리드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덥수룩한 펑키 머리에 그래픽 티셔츠와 반바지 패션, 컴퓨터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의 열렬한 팬, 사무실 구석의 빈백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을 청하는 채식주의자. 실리콘밸리나 월스트리트 어딘가에서 컴퓨터에 몰두하고 있을 법한 쿨하고 자유분방한 천재 트레이더 혹은 IT 너드(괴짜)의 이미지이다. 바로 최근 파산 신청을 한 가상화폐거래소 FTX의 설립자이자 전 CEO인 샘 뱅크먼-프리드(일명 SBF)이다. 
 
20대의 나이에 포브스 선정 세계 400대 부자에 이름을 올린 ‘영 앤 리치’, ‘코인계의 워런 버핏’, ‘가상화폐의 JP모건’, ‘크립토 골든 보이’ 등등 가상화폐와 부를 상징하는 각종 수식어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경제적 부를 넘어 그는 가상화폐계를 상징하는 아이콘과도 같았다. 세계 제2의 가상화폐거래소인 FTX를 설립한 후 유명세를 타며 빌 클린턴, 샤킬 오닐, 지젤 번천 등 각계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고 백악관까지 드나들며 워싱턴 정계와도 친분을 쌓은 샘 뱅크먼-프리드. 현대판 ‘개츠비’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더욱 깜짝 놀란 것은 ‘효율적 이타주의’라는 그의 사상적 신념이다. 효율적 이타주의란 이타적 목적을 위해 수익을 추구하는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타적인 선의의 목적을 위해 높은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 중 상당 부분을 자선 기부 등에 사용함으로써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조이다. 뱅크먼-프리드는 마치 “나는 돈밖에 모르는 속물이 아냐”라고 외치는 듯이 ‘효율적 이타주의’를 주장하고 다녔다.
 
실제 그는 효율적 이타주의 운동을 위해 ‘FTX재단’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했고, 올해 초에는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2010년 설립한 자선단체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에 가입해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 사업에 사용하는 서약을 했다. 뱅크먼-프리드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요트를 원하지 않는다”며 사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직접 언급했고,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가상화폐업체들에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백기사’로 나서기도 했다.
 
FTX 설립자라는 가상화폐계 내 독보적 입지에 MIT 졸업이라는 좋은 스펙, 스탠퍼드대 로스쿨 교수 부모를 둔 유복한 가정환경과 한때 160억 달러(약 21조원)에 달했던 재산. 이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탈한 행보를 보이며 효율적 이타주의라는 인간미 넘치는 신념을 가진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심지어는 종교적 신앙심 비슷한 것도 생겨났다. 29세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몰리 화이트는 “샘 뱅크먼-프리드 주위에는 이런 컬트와도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그는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선구자로 비쳤다”며 “사람들은 종종 천재성을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찾곤 하는데 아마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샘 뱅크먼-프리드의 민낯
하지만 FTX의 파산으로 며칠 새 그가 보유한 재산의 대부분이 증발해버렸다.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샘 뱅크먼-프리드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가 해외 규제 기관 및 다른 가상화폐업체 관계자들을 대할 때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고, 미팅에서는 수시로 욕설을 내뱉었다고 보도했다.

FTX의 초기 투자자로 참여했던 세계 제1위 가상화폐거래소 바이낸스의 창업자 자오창펑과의 좋은 관계도 틀어졌다. 가상화폐업계가 탈중앙화를 외치고 있는 동안 그가 미국 정치권의 규제 강화에 협력한 것도 결국 경쟁자를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는 제보들이 올라왔다. 가상화폐업계 전체가 뱅크먼-프리드에게 등을 돌렸다. 그동안 그가 보여준 소탈하고 쿨한 이미지 뒤에 가져 있던 어두운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다. FTX와 뱅크먼-프리드가 재산을 불린 방법도 전형적인 폰지사기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FTX는 자체 가상화폐인 FTT 토큰을 발행해 계열사인 알라메다로 대출한 후, 알라메다는 FTT 토큰을 담보로 대출받아 다시 그 자금으로 FTT 토큰을 매수한다. FTT 토큰 가격이 오르면 알라메다 대차대조표상의 수익도 오르고 이를 통해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면 해당 자금도 다시 토큰을 매수하는 데 사용한다. 담보에 담보로 돈을 빌려 레버리지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된다.
 
투자 대상만 바꿔 놓고 생각하면 2007~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및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러더스를 비롯한 주요 투자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을 기초 자산으로 한 파생상품 CDO를 연거푸 발행해 레버리지가 치솟았던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시장 경기와 유동성 환경이 좋으면 그러한 사업 모델이 계속 진행될 수 있겠지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피해는 본인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된다.
 
또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뱅크먼-프리드는 FTX가 계열사 알라메다의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100억 달러 규모 고객 증거금을 유용한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위법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것이다. FTX는 말 그대로 거래소이기 때문에 고객 증거금을 보관하는 것 이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고객 증거금에 손을 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투자자 신뢰를 훼손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FTX는 회사 경비 사용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고가의 부동산을 구매하기 위해 회삿돈을 사용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가 의회 청문회에서 공개와 투명성을 외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의 전형적인 예이다.
 
'인간미 있는 젊은 천재'의 탈
FTX 파산 6개월 전 발생했던 가상화폐 테라와 루나의 대폭락 사태 당시 코인 발행자였던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는 “실패와 사기는 다르다”고 강변했다. 예상치 못한 요인으로 일이 잘못되기는 했지만, 의도적으로 투자자들을 기만할 의도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뱅크먼-프리드 역시 자신의 사업이 안고 있는 리스크를 의도적으로 숨기지는 않았다. 자기가 보유한 대부분의 자산이 ‘대부분 비유동적’ 자산이라는 것을 시인했고,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폰지 사업’에 가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도 ‘상당히 적절한 반응’이라며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상당히 솔직하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사업을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실패할 때도 있다. 하지만 현재 많은 사람들이 샘 뱅크먼-프리드에게 분노하고 실망하고 있는 것은 투자 손실의 이유와 함께 배신의 감정에 기인한 부분이 커 보인다. 그가 만들어 낸 유능하고 솔직하면서도 인간미 있는 젊은 테크놀러지 천재의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을 기만했다는 것이다.

뱅크먼-프리드가 과거 잠시 근무했던 효율적이타주의센터(CEA)의 공동 창립자인 윌리엄 맥아스킬은 "나는 둘 중 어느 감정이 더 큰지 모르겠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해를 끼친 샘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그런 기만에 빠진 나에 대한 슬픔과 자기혐오인지"라고 말했다. 이전에 FTX에서 근무했던 한 사람은 “샘은 이타주의 뒤에 숨었다”며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포브스는 ‘너드의 옷을 입은 악마: 샘 뱅크먼-프리드의 천재 컬트가 어떻게 모두를 속였나’ 제하의 분석기사를 통해 “가상화폐계의 내부자들은 주요 투자자들이 구애하다시피 하는 카리스마 있는 테크놀러지 대부의 이미지를 그려낸다”며 “심지어는 자기 가상화폐거래소의 불안한 사업에 대해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장부를 몇몇 내부자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비공개할 때도 그렇다”고 언급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리자면 ‘가스라이팅’이 적절한 단어일 것이다. 자신이 인위적으로 창출한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세뇌하고, 통제하는 것.
 
사실 FTX 사태와 비슷한 일은 전에도 있었다. 닷컴버블 때도 그랬고, LTCM 사태도 그랬다. 올해 있었던 테라-루나 대폭락 사태도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세상은 선구자적인 젊은 천재들에게 열광하고, 때로는 맹목적으로 베팅을 한다. 인간미까지 갖췄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이를 아는 사람들에게 ‘젊은 천재’ 이미지는 종종 악용되기도 한다.
 
뱅크먼-프리드는 작년 5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효율적 이타주의에 대한 질문에 “세상에 좋지 않은 직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직업들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부정적이라면 설령 여러분들이 그 일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효율적인 자선 단체들에 환원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신망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FTX 파산의 여파가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보면 굉장히 모순이 있어 보이는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되묻고 싶어진다. 도대체 그가 추구한 효율적 이타주의는 무엇인지, 또 궁극적으로 그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