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중국몽 맞선 '미국몽' 파상공세 …제조업, 발상을 전환하자
2022-10-30 17:04
이들 조치로 미국 주요 첨단산업에는 앞으로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다. 지난해 11월 인프라법이 미 의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탄소 포집 같은 신 청정에너지 기술에 200억 달러 이상이, 그리고 전기자동차 충전소에 80억 달러가 투자될 예정이다. 반도체 및 과학법은 반도체 시설 건축과 연구, 인력 개발 등에 520억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비롯해 인공지능 등 첨단산업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2800억 달러의 연방 재정을 동원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자동차를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해 큰 논란이 일고 있는 인플레 감축법은 에너지와 기후변화 대응 부문에 3860억 달러를 지출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일련의 조치들은 미국 제조업의 실지(失地)를 회복하겠다는 ‘미국몽’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가 지난 9월 9일 오하이오주의 리킹 카운티에서 열렸다. 인텔의 새 공장 착공식이 열리는 자리였다. 여기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날 바이든은 미국 정부가 양자컴퓨터에서 생명공학까지 모든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미래의 산업에서 세계를 리드하겠다”는 야심 찬 출사표를 던졌다.
미국이 신(新)산업정책의 깃발을 본격적으로 든 순간이었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산업정책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이를 거부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뤄왔다. 정책이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에 대한 견제심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는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중국이 제조 2025, 일대일로 등 대내외를 겨냥한 확장정책을 펴면서 미국의 턱밑까지 추격해왔기 때문이다. 정부가 앞장서는 국가자본주의의 힘에 기댄 중국의 진격이 위협적인 만큼 미국도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제조업 리더십을 부활시키겠다는 맞대응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미·중 산업정책의 격돌이다.
미국 정부의 이 같은 정책 선회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래된 깊은 논의 속에서 정책의 판이 움직여온 결과이다. 이 변화의 과정을 들여다봐야 앞으로 미국 산업정책의 방향타를 잘 가늠해볼 수 있다.
36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86년 말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은 산업생산성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산업적 성과가 심각하게 퇴조해 국가 경제의 장래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3년 후인 1989년 이 위원회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부제: MIT가 진단한 미국 경제 재건을 위한 처방)’라는 제목의 책자를 펴냈다. 이 책은 미국 제조업의 취약점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경영자들이 단기적 목표에 너무 집중하고 있고, 노동력의 질적 수준이 떨어졌으며, 인적 자원이 경시되고 있는 등의 문제점을 망라했다. MIT는 정책 처방전으로 기초연구 투자, 현대적 설비와 공정 엔지니어링에 대한 지원 강화, 혁신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 제거 등을 제안했다. 이 대학교는 2010년대 들어서는 <메이킹 인 아메리카>라는 비슷한 제목의 새 책을 출간해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제품에 대항하려면 제조업의 부흥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미국 정부에 피력했다.
제조업의 중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이 제조업을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야기된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미국의 간판급 자동차 회사인 GM과 크라이슬러는 빈사 상태에 놓였다. 결국 정부가 직접 긴급 자금을 수혈하면서 이들 회사는 기사회생한다. 상황이 악화되면 문제가 보이는 법. 오바마 행정부는 제조업이 공동화라는 심각한 중병에 걸려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사이에 사라진 제조업 일자리는 500만개에 달했다. 제조업의 실질 부가가치 성장률(연간)도 1990년대의 4.9%에서 1.4%로 뚝 떨어졌다. 병(病)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한 오바마 행정부는 2012년에 ‘제조업 르네상스’를 기치로 내걸고 제조업 부활 정책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이 가진 문제의식은 같은 해에 나온 개리 피사노 등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두 명이 집필한 <왜 제조업 르네상스인가>라는 책에 잘 정리돼 있다. 이들 교수는 미국 제조업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은 전략의 오류에 따른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연구개발은 미국에서 하고, 제조는 생산비가 낮고 시장이 있는 해외로 넘기는 전략이 패착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와 관련해 ‘산업공유지’와 ‘거리의 경제’가 산업경쟁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산업공유지’는 기술과 지식, 경험 등을 공유하는 공급업체, 고객사, 숙련 근로자, 대학 등을 한데 묶은 개념이다. ‘거리의 경제’는 이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활발한 소통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경쟁력 강화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제조업체들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산업공유지와 거리의 경제가 가져오는 상승효과가 사라지면서 제조업의 경쟁력이 취약해졌다. 심지어 미국에 남겨뒀던 연구개발 기능마저 제조망이 있는 해외로 이동시켜야 하는 일도 벌어졌다. 코닥이 대표적 사례이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한 코닥은 완성품과 부품의 제조에 필요한 공급망을 일본 등 아시아지역으로 옮겼다. 문제는 연구개발과 제조 활동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서 오는 ‘동맥경화증’이 가시화하자 아예 연구개발기능마저 아시아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해외이전이 가져온 제조업의 공동화가 국가의 경제안보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민주당 정부의 대부분 정책을 폐기했던 트럼프가 제조업 르네상스 정책만을 존속시켰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제조업 중시 정책의 기조는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와 글로벌 공급망의 혼란 사태를 계기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안에 위치한 제조업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제조업이 전체 국내총생산(GDP)과 직접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11%와 8% 수준이다. 하지만 기업 연구개발 투자 중 비중이 70%에 달하고 있으며, 수출의 60%, 생산성 증가율의 35%, 자본투자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중요도가 그만큼 큰 산업이다. 이렇게 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지금 펼치고 있는 산업정책은 제조업 르네상스를 대폭 강화한 확장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별 정책들의 수면 밑에서는 중국을 제치고 제조업 리더십(현재 제조업 순위 1위 중국, 2위 미국)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그랜드 플랜 ‘미국몽’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리쇼어링이든 프렌드쇼어링이든 핵심은 미국 제조업의 부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만큼 필요할 경우 같은 맥락의 입법과 행정조치들이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이런 산업 기류의 변화에 한국 경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정부는 현재 기업의 활력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2022년 경제정책 방향에서는 차세대 성장동력 보강을 위한 방안으로 유망 신산업 육성, 주력 제조업과 서비스산업의 혁신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 국회에서는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진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법조차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글로벌 무대에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산업정책을 내세운 제조업의 ‘한 판 승부’가 본격화하고 있는 상황에 비춰볼 때 안이한 대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제조업에 대한 시선을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제조업은 이제 경제 자체를 넘어 경제 안보의 주축이 된 상황이다. 반도체 등 제조업에 대한 지원을 특혜로 본다면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특혜가 우려된다면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담보하는 조치로 보완하면 될 일이다. 제조업이 국가경제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미국이 잘 보여주고 있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