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北 미사일 도발 절정인 지금 …다시 통일을 생각한다
2022-10-12 06:00
서방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동쪽에선 중국이 대만공격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소식이다. ‘일대일로와 하나의 중국’을 강요하는 현 중국공산당은 홍콩을 금융의 자유시장에서 권위주의 통치체제로 만든 이후 본격적으로 대만을 복속시키겠다는 의도를 나타내보이고 있다. 2024년 대만의 총통선거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무력도발을 감행한 뒤 인민해방군 건군 100주년을 맞는 2027년 본격적인 군사도발을 통해 대만을 복속시킬 것이라는 이야기 까지 들려온다.
문제는 이러한 전장이 확대된다면 미국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만이 침공당하면 주한미군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잔뜩 북한핵 위협에 있던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 위협 속에 빠지게 된다. 그동안 북핵은 미국과의 협상용이라며 남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투로 핵개발을 간접 용인해왔던 국내 진보여론은 또다시 ‘전쟁이냐 평화냐’하며 미군철수와 북한 달래기로 모든 국내 이슈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은 요즘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다. 10월 5일 발사한 미사일은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로 사정거리가 4600㎞나 된다. 북한의 이러한 도발은 아무리 한국이 한·미군사훈련을 하고 있어도 핵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이는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기정사실로 하여 북·미관계를 공세적으로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며, 7차 핵실험이 가까웠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북한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주인이 되겠다는 의도를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6·25 한국전쟁도 ‘조국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일으킨 무력통일의 일환이었고 이후로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남조선해방투쟁”을 벌여왔다. 통일, 이 말은 한반도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말이다. 핵무기가 가장 강력한 무기이니, 핵무기의 주인이 한반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경찰이 빠진 자리에선 칼잡이가 왕초 노릇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통일운동이란 무엇인가? 아버지는 생전에 자주 이 나라의 통일을 말씀하셨다. 남북통일은 정부관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셨다. 나로부터 통일을… 통일은 ‘우리’부터가 아니라 ‘나’로부터 출발한다.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신과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꼭 신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누구인가’ 하는 끝없는 질문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구성하는 내 몸과 마음이 무엇을 중심하고 사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이다.
“그래, 너는 몸과 맘이 통일됐냐?”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는 데 여러 해 걸렸다. 내 인생의 비전이나 꿈을 세우고 그 꿈을 향한 내 몸과 맘이 제대로 정렬되어 있는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 노력의 과정이 바로 통일이다. 즉,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며칠 전 글로벌피스재단에서 주최한 코리안드림 마라톤에 출전한 바 있다. 처음으로 31㎞에 도전했다. 변변한 준비 없이 출전했지만 31㎞를 3시간 안에 들어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프를 뛰고 골인지점에 와서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10㎞를 더 달려야 하는데 그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나는 목표지점이 가까워오면서 조금이라도 기록을 앞당기고 싶은 욕심에 혼신을 다해 질주했다. 그러나 마라톤은 그렇게 달리는 게 아니었다. 꾸준하게 일정한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려야 한다. 다리에 힘을 주자마자 갑자기 장딴지에 마비 증세가 왔다. 누워서 다리를 세차게 두드리고 주물렀다. 발가락을 움직이자 차차 뭉쳤던 근육이 풀어졌다. 마라톤은 의지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이 주체라고 해도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3시간 안에 들어오겠다는 강한 마음이 있지만 몸을 살살 달래가며 겨우 시간 안에 골인했다. 몸을 달래주던 그 시간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 한 몸의 통일되는 과정도 이렇게 험난하다. 가정에 있어서 통일은 더 어렵다. 일본인 아내와 원만한 부부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다. 부부는 연인과 다르다. 문화와 풍습이 다르고 민족의 골이 깊은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개인의 애정이나 친분을 훨씬 뛰어넘는 사회환경의 벽을 넘어야 한다. 국가간의 갈등이 우리 가정 안에 그대로 들어온다. 그것이 부부간에 문제를 일으키고 또 부모와 자식 간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문화와 관습은 생활태도이지만 역사와 영토는 현실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의 목표는 ‘우리가 먼저 화목한 가정이 되어 한·일 간에 화해의 다리가 되자’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부부간에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 끊임없는 대화와 심정적 교류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유명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한·일교류에 영향력을 갖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어느 정도의 가족간의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 가정에 있어서 통일은 불만과 오해 그리고 화해하고 고민하며 계속 진행형이다. 이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끈끈한 가족애를 잃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만남이 사소한 거 같지만 어쩔 수 없이 양쪽의 가문과 민족과 국가를 대표한다고 해도 이 사소한 사랑이 이 거대한 것들을 포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통일 또한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국해방’이니 ‘민족해방’이라는 명분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77년이 지났으며, 미국이나 유엔으로부터 원조를 끊고 오히려 저개발국을 돕고 사는 나라가 되었다. 2009년 11월 25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했다. 1969년 정부예산규모 3000억원이던 시절 우리는 국제사회로부터 800억원에 가까운 지원을 받았다. 국제사회의 공적개발원조(ODA)로 연명해온 것이다. 그런 우리나라가 세계경제 10위권의 나라가 되어 국제 사회에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런 나라를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북한이 미제국주의 식민통치 하에 있다며 해방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진보’라고 불러 준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혐오를 보이고 있다는 통계자료가 나오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무장의 위협은 같은 동포로서 끌어안기보다는 이 나라의 가장 큰 위협이며 적대세력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나라 안에서 이러한 상이한 세계관으로 분립된 데에는 우리의 독립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에 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쓴 선각자들은 일제에 함께 항거하면서도 독립된 나라의 꿈은 둘로 나뉘었다. 상해임시정부의 명칭에서 보듯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말 속에는 대한이라는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될 거라는 꿈을 간직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해방되자마자 이 나라는 두 개의 다른 체제의 나라를 세웠고 그 갈등은 서로를 원수로 여기며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번져 전쟁사에 유례없는 전쟁참화를 겪었다. 여기서 생긴 감정의 골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남과 북 모두 통일을 바라고 있지만 통일된 나라의 형태에 대해서는 아직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그 합의점은 우리 민족의 시원, 즉 우리가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념하는 단군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처음 나라를 열면서 천명했던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라는 이 비전만큼 우리 민족을 하나되게 하고 글로벌한 가치를 갖게하는 이념은 없을 것이다. 통일은 모두가 하나의 유니폼을 입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주체와 대상이 하나의 목적 혹은 비전을 중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결과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적 현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통일을 이야기할 때는 주체와 대상이 공동의 목적 혹은 비전을 공유하고 공감해야 한다. 주체든 대상이든 한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주적 가치를 가진 존재로 대해야 한다. 석가가 가르친 ‘천상천하유아독존’과 같은 우주 유일의 '나'라고 하는 존재감과 ‘하느님을 아버지처럼 그리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 홍익인간 정신에 포섭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보다는 남을 위하여 살라’는 내 아버지의 가르침 또한 홍익인간이다. 나는 오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5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