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승일교-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2022-10-06 16:59

[원철 스님]


광복 후 삼팔선은 지도 위에 존재한 가상선이었지만 현실세계에도 군데군데 주요한 지점에는 반드시 표식을 남겼다. 강원도 철원 가는 길에서 삼팔선 표지석을 만났다. 여기에서 목적지인 승일교까지 차로 이동하는 데 30분가량 걸린다.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삼팔선 너머 북쪽으로 그 시간만큼 더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길가에 서 있는 ‘남북경협거점도시’라는 공익광고판을 스쳐 지나간다.
 

 

 늦은 오후인지라 승일공원 주차장은 한적하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강가로 천천히 내려갔다. 길이 끝나면서 가파른 내리막 시멘트 계단이 나왔고 그 계단마저 끝나는 급경사 부분은 물가까지 좁다란 철계단을 설치하여 다리를 강바닥에서 하늘 방향으로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탄강의 검은 협곡 위로 시멘트로 만든 두 개의 장대한 교각을 중심으로 반월형 구조물 3개가 서로 이어지는 당당한 연출이 장관이다. 그 옆으로 나란히 1999년 ‘한탄대교’가 개통되었지만 오히려 승일교(본래 이름이 ‘한탄교’였다)의 짝퉁처럼 보일 만큼 오래된 오리지널 다리로서 여전히 그 위엄을 과시했다.
 

 
다시 공원 방향으로 올라와서 다리 상판 위로 걸을 수 있는 길 입구를 찾았다. 건설한 지 오래된 다리인지라 차량 이동이 가능한 시절에도 13톤 이하 자동차와 장갑차만 통과할 수 있다는 표지판을 세웠던 모양이다. 특히 ‘대형 장갑차 통행금지’를 의미하는 표식을 함께 병기한 것이 전방 군사지역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준다. 대형 다리를 새로 만든 뒤에는 모든 기능을 새 다리에 넘기고 본래 다리는 사람과 자전거만 통과하는 관광레저용으로 바뀌었다. 밤에는 조명 빛까지 더해진다고 하니 야경 감상까지 하려면 따로 시간을 내야겠다. 길이 120m, 높이 35m, 너비 8m인 다리는 튼튼해 보이는 교각과 달리 상판 바닥과 난간은 100여 년 비바람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서 바랠 만큼 바랬다.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다리 위를 걸으면서 좌우와 전후 풍광을 찬찬히 음미했다. “···험한 세상의 다리 되어 너를 지키리···”라는 오래된 노래 가사가 딱 어울리는 곳이다.

 

 

남북을 이어주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건설된 뒤 탄생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 입으로 전해졌고 또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변주에 변주를 거듭했다.
첫째, 승일교(承日橋)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북쪽의 김일성이 시작하고 남쪽의 이승만이 완성했다는 뜻이다. 삼팔선이 그어진 뒤 북쪽에서 필요에 의해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된 뒤 휴전이 되면서 남쪽에서 나머지 부분을 완공했다는 것이다.
둘째, 승일교(勝日橋)다. 남북이 극도의 긴장관계를 지속하면서 이 다리를 인근 군부대에서 관리하던 시절에는 ‘김일성을 이기자(勝日橋)’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더라고 유홍준 선생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권2에서 당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를 양념처럼 끼워 놓았다.
셋째, 승일교(昇日橋)다. 6·25 전쟁 때 한탄강을 넘어 북진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한 박승일(朴昇日) 연대장 공적을 기리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1985년 승일교 입구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현재 정설로 굳어졌다. 유홍준 선생은 같은 책에서 1번 설을 완전 지지하는 내용만 실었다가 급기야 유족 측의 거센 항의를 받고서 3번 설을 추가하여 다시 출판했던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네 번째 새로운 설이 2006년 2월 28일자 철원신문에 등장했다. 지역주민인 박상용씨가 소장하고 있던 새로운 자료가 공개된 것이다. 1952년 미군 공병대 장교인 제임스 N 패트슨 중위의 일기였다. 영어로 된 원문 20여 장과 공사 현장 사진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한다. 그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공사가 시작된 미완성 다리를 1952년 미군 공병대가 나머지 부분을 완공했다는 내용이다. 남북 합작이 아니라 미일(美日) 합작인 셈이다. 이 설을 따른다면 착공 시기는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어쨌거나 특이한 것은 그 와중에도 다리를 설계한 사람 이름과 경력이 전해 온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김명여 선생으로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일본 규슈(九州)공대 출신이며 진남포 제련소 굴뚝을 설계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설계자는 단 한 명이다.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시공·관리 주최국을 모두 열거한다면 한국, 북한, 일본, 미국 등 4개국이다. 진짜 다국적 다리인 셈이다.
 
어쨌거나 승일교는 한반도의 아픔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조형기념물이다.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시기를 달리하여 부분 부분 이어가며 만들긴 했지만 결국 하나의 다리로 완성될 수 있었다. 착공과 준공의 주관자가 달랐고 시공자와 공법이 각각 다른 까닭에 보통 사람 눈에도 아치의 크기와 교각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역사성과 함께 아름다운 조형미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다리의 건설은 양쪽을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남북 연결이라는 토목 공학적인 본래 의미가 부각되면서 당시 동네 주민과 공사장 인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불린 이름이라는 1번 설에 대한 심정적 동조자는 계속 늘어나게 마련이다. 남과 북의 의도치 않은 합작은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뒷날 ‘남북경협의 원조’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 4번 설까지 보태지면서 합작의 의미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럴 때는 한글이 최고다. 한자는 빼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승일교’라고 부르면서 2번 설, 3번 설을 포함하여 각자 시각에서 해석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하고 지지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금강경은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고 했다.
만약 모든 이름이 진짜 이름이 아님을 알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이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