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칼럼] 韓日 '약식' 정상회담이 남긴 씁쓸함

2022-09-28 06:00

[조진구 교수]

필자는 하루에 몇 차례 인터넷을 통해 일본 신문을 본다.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약 30분간의 한·일 정상회담(뉴욕시간 21일 오후, 서울시간 22일 오전)이 끝난 뒤인 22일 저녁 7시 25분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한 간담(대통령실은 약식회담이라하고 일본 외무성은 간담(懇談)이라고 달리 부름)의 무대 뒤’를 취재한 기사를 뉴욕발로 실었다.
 
아사히신문 기사에 의하면, 한국 정부는 여러 차례 정상회담 개최를 요청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이 지정한 시간과 장소로 찾아가” 기시다 총리를 만났으나 “조금이라도 시간을 길게 하려던” 윤 대통령의 말을 기시다 총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들었다고 한다. 일본 측의 한 배석자는 최대현안인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아무런 성과가 없는 가운데 (한국 측이) 만나고 싶다고 하니 우리 쪽은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만났다. 일본은 한국이 (일본에) 신세를 지게 했다. ‘당연히 다음에는 제대로 성과나 진전을 가져오겠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기시다 총리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친구들(CTBT Friends)’ 정상급회의에 참석했다. 이는 8월 1일 일본 총리로는 처음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회의에 참석했던 기시다 총리가 기존 외교장관급 회의를 정상급으로 격상하자고 제안해 열린 첫 번째 회의였다. ‘CTBT의 친구들’ 회의 자체가 2002년 일본과 호주가 중심이 되어 독일, 캐나다, 네덜란드, 핀란드 등 6개 나라가 CTBT의 조기 비준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 회의가 열린 옆방(隣室)까지 가서 ‘약식회담’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종이신문에 이 기사는 실리지 않았으나 대통령실이나 외교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아사히신문사에 항의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기사가 사실이라면 무엇을 위해 이런 굴욕적인 회담이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일 정상회담 후 윤석열 대통령은 예정에 없었던 제7차 글로벌펀드 재정공약회의에 참석해 3년간 1억 달러의 기여를 약속했는데, 글로벌펀드는 2000년 7월 규슈-오키나와 G8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같은 자리 연설에서 글로벌펀드 설립 이후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등 3대 감염증으로부터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구하는 높은 실적을 올렸다면서 일본은 향후 3년간 최대 10.8억 달러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것은 9월 20일(뉴욕시간)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유엔총회 일반토론 연설에서 “글로벌 감염병 대응이라는 인류 공동과제 해결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글로벌펀드에 대한 기여를 획기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힌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 회의를 마친 윤석열 대통령이 비속어를 사용해 논란이 일고 있지만, 대통령실 관계자가 “공적으로 말한 게 아닌 사적 발언”을 “외교적 성과에 연결 짓는 것은 대단히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보고 필자는 아연실색했다. 정치지도자의 부적절한 발언이 뜻하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는 일은 적지 않지만, 정치가는 말로 유권자를 설득해야 하고 외교에서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해 아베 총리가 외상의 입을 빌려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었지만, 그 뒤 국회에서 직접 사죄할 뜻이 있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아베 총리는 “(그럴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고 말해 우리 국민의 공분을 사지 않았는가.
 
대통령 발언의 적절성이나 대상이 미국 의회냐 우리 야당이냐는 차치하더라도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이 규범 기반의 국제질서 강화를 주도해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국가’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비전을 국제사회로 발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가안보실은 2차장 산하에 있던 외교정책비서관과 통일정책비서관을 1차장 산하로 옮기고 경제안보비서관을 신설해 기존의 안보전략비서관을 포함해 4 비서관 체제로 확대·개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교안보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 국가안보실이 제 역할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을 겸하는 1차장의 역할과 비중이 커졌지만, 그는 지난 9월 15일 한·일 정상회담 개최에 ‘흔쾌히 합의’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 일본 측의 항의를 받아 신뢰를 훼손했다.
 
무엇보다 19일(뉴욕시간) 열린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강제징용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해 계속 협의할 것을 확인했음에도 정상회담 개최를 내켜 하지 않았던 일본이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단 30분의 약식회담이 왜 필요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강한 의문이 남는다. “일본과는 2년 9개월 만에 정상회담을 개최해 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대통령실의 설명은 성과의 포장에 불과하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과 김태효 1차장은 이명박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에도 깊숙이 관여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해외 순방국으로 일본을 선택할 정도로 한·일관계를 중시했으며, 정상 간의 셔틀 외교를 복원하는 등 집권 초반의 한·일관계는 양호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한·일관계는 점차 나빠졌다. 특히,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와 국민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는데, 일본 정부는 이런 과거를 잘 기억하고 있다.
 
외교부는 한·일 간 상호신뢰 회복을 토대로 현안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지만, 정상회담을 둘러싸고 벌어진 한·일 간의 엇박자는 관계 개선은커녕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키는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현재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서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양국 정부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 정부가 책임을 지고 해결하라는 일본과 이를 위해서는 일본 측의 ‘성의 있는 호응’이 필요하다는 한국은 서로 상대측에 볼을 넘기고 있다. 필자에게 한·일관계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상대측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위험한 상태로 비친다.
 
윤 대통령은 국가 운영의 기준으로 국민과 국익을 강조해왔는데, 이를 위해서는 국가안보실의 조직 개편과 인사 쇄신이 불가결하다. 특히, 세계 10위권 국가의 국격에 걸맞은 외교를 전략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은 물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지역전문가를 적소에 등용해 활용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모든 정책에 정통할 수 없으나 무엇이 국익과 국민을 위한 것인지 판단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때로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아야 하며, 쓴소리하는 사람과 경청할 자세도 필요하다. 주저하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조진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도쿄대 법학박사(국제정치전공)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