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답지 않다?...대법 "피해자마다 대처양상 달라" 가해자 무죄 파기

2022-09-18 10:27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성추행 피해자답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하급심 판단에 대해 대법원이 '잘못된 통념에 의한 판단'이라고 지적하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가 보여야 할 태도를 정해두고 이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70)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8일 밝혔다.

A씨는 2019년 1월 채팅앱으로 만난 B씨(30)를 모텔로 데려가 생활비에 보태라고 말하며 50만원을 B씨 가방에 넣은 뒤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구체적으로 A씨는 "여기는 너무 추우니 국가대표 감독을 한 적 있는 나를 믿고 모텔에 가자"며 피해자를 모텔로 데려간 것으로 조사됐다.

직접증거는 피해자 진술뿐인 상황. 재판에서 A씨는 합의에 의한 신체접촉이었다고 주장했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1심은 B씨가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에 비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B씨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라는 점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인 사정과 피해자의 심리 및 정서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태도가 강제추행 피해자라고 하기엔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2심 재판부는 △B씨가 별다른 거부 없이 A씨와 모텔에 들어간 점 △모텔에서 나와 A씨의 차를 타고 자신의 차량이 있는 곳까지 함께 이동한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또 △추행행위에 대한 B씨의 묘사가 일관되지 않다는 점 △B씨가 사건 발생 이튿날에야 경찰에 신고한 점도 고려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이 잘못됐다고 보고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잘못된 통념에 따라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두고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 진술의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와 경험칙에 따른 증거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나이나 지능, 처한 상황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등에 따라 대처하는 양상이 다를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피해 상황에서도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며 “일정 수준의 신체접촉을 용인했더라도 자신이 동의한 범위를 넘어서는 신체접촉을 거부할 수 있고 피해 상황에서 명확한 판단이나 즉각적인 대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지능이나 상정, 사회적 지위와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이번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라며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고령의 피고인이 '춥다'며 모텔에 가자고 해 제안에 응한 것이라는 B씨 진술에 대해 "피고인과 피해자의 나이 차이, 피해자의 심리 상태 등에 비춰 비해자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해자가 가해자의 차를 탄 상황에 대해서도 "극도로 당황하고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 상황이라면 피해자가 홀로 모텔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A씨의 차를 탄 점이 매우 이례적이라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봤다.

또 △B씨의 지능지수(IQ)가 72로 낮다는 점 △이 사건 무렵 사기를 당하는 등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처해있었던 점 △이 사건 이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점 등도 참작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성폭력 범죄의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피해자의 특정 반응들이 통상적일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설시해 성폭력 사건에서의 경험칙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