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장 주도권 뺏길라…'인플레 감축법'에 속 타는 현대차그룹

2022-08-30 05:08
수출길 막힌 전기차…정의선 회장, 지난주 미국행 등 대응 분주
IRA 유예 기간·수입 물량 쿼터 확보 기대…정부대표단 설득 실패 땐 사업 수정해야

정부 합동대표단이 북미산 전기차와 배터리에만 보조금을 주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하고자 방미에 나서면서 현대자동차그룹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를 설득한다면 IRA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양보가 전혀 없다면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사업은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와 현대차그룹은 IRA 대응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날 정부 합동대표단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31일(현지시간)까지 워싱턴에 머무를 예정이다. 앞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23일 공영운·장재훈 현대차 사장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정 회장의 자세한 일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IRA 타개를 위해 미국 정·관계 인사를 두루 만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IRA가 가져올 파급력 때문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당장 전 세계 3대 완성차 시장인 미국에서 전기차 주도권을 잃을 수 있으며, 설상가상 유럽 시장에도 IRA와 같은 자국우선주의 불씨를 댕길 수 있다. 특히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 상반기 테슬라에 이어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약 9%) 2위까지 올랐다. 쾌조의 흐름을 보이는 중에 공든 탑이 단번에 무너질 수 있다.

한편에서는 자동차와 배터리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 석유화학제품 등 대미 수출 주요 품목으로 규제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조기에 담판을 지어 산업계 전체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래픽=아주경제 그래픽팀]

그러나 시장에서는 현대차그룹이 IRA에 당장 대응할 만한 카드가 많지 않다는 중론이다. 국내에서 만든 전기차 반조립 제품을 미국 앨라배마와 조지아 공장에 가져다 최종 조립하는 방식이 거론되지만, 이는 국내 일감을 줄이고 수요 예측마저 부정확해진다. 생산비 증대까지 불러와 비효율성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지적이다.

배터리도 자체 조달이 아니기 때문에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등과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2025년 가동을 목표로 한 미국 조지아주의 전기차 공장 구축을 서두르는 것도 제약사항이 많아 실천이 쉽지 않다.

전기차 전용공장을 구축하기 전까지 인센티브를 확대해 판매량을 수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나 이 역시 판매 손해에 따른 수익성 악화가 뒤따른다. 앨라배마 생산라인을 전기차로 일부 전환하는 방법은 내연기관차 생산이 그만큼 줄어드는 문제에 부딪치며, 국내 노조 동의를 얻어내야 하는 숙제가 남는다.

최상의 타개책은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다. IRA 유예기간을 최대한 확보하거나 수입 물량의 할당(쿼터)을 받아낸다면 IRA 후폭풍을 최대한 비껴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IRA가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재편이라는 점에서 동맹국과 함께 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다.

다만 미국 정부가 최근 동맹국 논리를 저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설득 과정이 여의치 않을 전망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애플은 중국 YMTC와 손을 잡고 아이폰에 사용할 낸드플래시를 공급받기로 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반도체지원법 등을 통해 다른 나라 기업들의 중국 반도체 사업은 제한하고 있지만, 자국 기업의 중국 지원은 외면하는 철저한 경제적 실익에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계 한 관계자는 “IRA는 정부 중재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라며 “정부는 한‧미 FTA 위반과 WTO 제소보다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를 부각시키고 관련 산업의 실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당근책 제시가 최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단기적 관점의 접근보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 주력 산업의 추가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민관 컨트롤타워를 지금이라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인플레감축법 대응을 위해 정부 합동대표단의 안성일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이 29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출국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