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칼럼]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2022-08-29 14:30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2010년 이래 ‘지정학의 귀환’이란 말이 대중에 회자되고 있다. 지정학이란 한 국가의 지리적 조건이 그 나라의 국가전략, 외교,안보 및 경제 정책 등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거시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말은 이제 각국이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자국이 속한 지리적 여건을 되돌아봐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지난 70년간 미국이 세계 패권국이었고 세계화가 잘 진전될 당시에는 지정학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지리적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가 한 촌락처럼 균질화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세계가 평평하지도 그리고 각국이 균질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신냉전의 구도가 더 강고해지면서 자유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간 장벽은 높아지고 다른 진영 국가들과는 교역과 투자가 위축될 전망이다. 이것은 평평해졌던 지형에 장벽이 다시 세워진다는 말이고 이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는 지정학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때가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정학과 관련하여 나폴레옹은 ‘한 국가의 전략은 그 지리에 내재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미국 지정학의 대가 니콜라스 존 스파이크만은 ‘국가 지도자들이 유능해도 국가는 지리적 여건을 피할 수 없다. 국가는 지리를 유능하게 또는 무능하게 다룰 수는 있지만 지리를 변경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라고 설파했다. 국가전략을 수립할 때 가장 기본적인 지정학적 요인을 우리가 잘 따져보지 않는 경향을 고려하면 우리 정책결정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새겨들어야 한다. 특히 미국의 패권적 지위가 예전 같지 않게 약화되면서 각국이 각자도생의 길로 나서는 경향이 뚜렷한 지금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은 이전보다 더 크게 국제정치에서 작용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세계는 이런 지정학적 요인이 미치는 리스크를 더욱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러시아는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진출하는 출구를 확보한다는 지정학적 필요로 인해 크림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남부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번 전쟁으로 오데사항이 봉쇄되자 세계 곡물가격이 급등하고 러시아가 독일 등 서방국으로 향하는 파이프라인을 잠그자 가스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 각처에서 고물가를 유발하는 것도 지정학적 요인이 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상은 독일정부가 지정학적 리스크를 감안하지 않고 국가전략을 수립하였기에 자초한 측면도 있다.
 
미국의 지도력이 쇠퇴하고 중국·러시아 같은 현상변경 세력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앞으로 우리 한반도 지정학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자유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간의 신냉전 대결구도가 공고화되면 한반도가 고유한 반도적 지위를 회복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반도로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매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70년간 한반도에서 구냉전의 잔재가 해소되지 못하여 남·북한이 분단되어 살아왔기에 한국은 섬나라와 같은 지정학적 여건 속에서 살아왔다. 만약 세계화가 더 진전되고 진영 간 대립 없이 남·북한간 화해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한반도는 반도로서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매개하는 거점이 되어 많은 경제적 기회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한반도의 철도가 시베리아와 중국횡단 철도망과 연계된다면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는 일본과 동남아지역 물류가 서유럽으로까지 육로를 통해 운송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은 물론 러시아 극동지역과 중국 동북부 지역이 연계되어 새로운 경제권을 형성할 것이고 이는 우리 경제에 큰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어 대륙과 연계된 우리 경제의 도약 가능성은 급격히 불투명해지고 있다. 한반도의 반도적 입지가 회복된다면 대양세력과 해양세력 간 대립 속에도 우리의 선택지는 넓어질 수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작아져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하여 북한이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러시아에 북한이 용병과 노동자를 파견한다는 설도 들리고 있다. 이러면 그렇지 않아도 공고해지는 북방 3각, 즉 북한, 중국, 러시아 3국 연대를 더욱 결속시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방 3각, 즉 한, 미, 일 3국 연대와 대결구도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생존을 위하여 더 이상 반도국가 지위회복이라는 지정학적 꿈을 접고 해양국가들과 결속을 더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 구도가 현실화 되면 미·중간 갈등 속에서 우리의 갈 길은 자명해지면서 별로 좌고우면할 여유가 없게 될 것이다. 위기상황에서는 국익의 요소 중 생존이 우선시되어야 하고 번영이나 가치, 화해·협력 등은 부차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8월 초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말레이시아에서 대만을 방문할 때 남중국해를 지나는 항로를 택하지 않고 필리핀을 우회하는 먼 항로를 택한 것도 우리 안보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발적인 충돌을 회피하기 위한 미국의 고육지책일 수도 있지만 남중국해를 통과하는 직항항로를 우회한 것은 이미 중국의 영유권을 심리적으로 인정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이러면 중국의 남중국해에 대한 배타적 영유권 주장은 더욱 강해질 것이고 남중국해를 주요물자 수송로로 사용하는 우리로서는 수송로 안전에 더 각별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러시아 가스관 공급중단 사태에서 보듯이 에너지나 수송로를 한 채널에만 의존하다가 그곳이 막혀버리면 낭패를 당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대책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아니 그보다 남중국해가 막힌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사활적인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역내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여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반도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접하는 곳으로, 스파이크만에 따르면 ‘테두리 지역(rimland)’이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전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에 의하면 단층선(fault-line) 상에 위치해 있다. 이 점에서 우크라이나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유사하며 이런 곳에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접점지역에 위치한 국가의 국력이 강하고 국제정세가 평안할 때는 이런 지정학적 위치가 발판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덫이 된다. 즉 반도국은 양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도 있고 양 방향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지만 난세에는 분쟁의 덫에 빠져들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우리는 지정학적 안목을 더 키우고 지정학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면밀한 전략을 수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특임대사 △주호주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