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30주년 신봉길 스페셜 칼럼) 美·中 사이 고심하는 한국 …국익이 유일한 잣대
2022-08-22 06:00
10여년 전 외교부장관 특사로 솔로몬제도 등 남태평양의 몇 개 섬나라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먼저 호주의 멜버른에 도착해서 항공편으로 이 나라들을 들락날락했다. 솔로몬제도는 ‘남태평양의 진주’로 불리던,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그런데 섬 곳곳에 2차대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일본군이 쓰던 대포, 항공기 등 무기가 녹슨 채 열대 밀림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전후 일본인들이 세운 위령탑도 있었다. 2차대전 중 미국, 호주 연합군과 일본이 사활을 건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솔로몬제도 방문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 5월말 6월초에 걸쳐 남태평양의 섬나라 8개국을 방문했다. 그중 방문의 핵심은 솔로몬 제도였다. 중국은 5억 달러의 재정지원을 약속했고 군대파견과 해안기지 사용을 가능케하는 안보협정까지 체결했다. 이 나라는 몇 년 전까지 타이완과 수교했던 나라다. 그런데 2019년 타이완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데 이어 이번에 안보협정까지 체결했다. 솔로몬제도는 미국이 주도한 대중국 포위망 쿼드(Quad)의 핵심 멤버인 호주의 코앞이다. 중국이 쿼드 포위망을 뚫고 미국과 일본의 배후지이자 호주의 앞마당인 남태평양을 공략한 형국이다. 호주의 한 정치인은 이 섬나라가 냉전시대 미국에게 목의 가시 같았던 쿠바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미·중 갈등의 전개 양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9일 ‘반도체, 과학 법’에 서명했다. 28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투자를 통해 반도체 제조 최강국 지위에 올라서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법안의 혜택을 받는 기업의 경우 10년간 중국에 새로운 하이테크 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건이 딸려 있다. 전통적으로 시장 경제, 자유무역을 존중해온 미국이 막대한 정부 보조금 형태의 지원을 약속한 것은 모순이다. 미국과 중국이 시장경제를 허무는 사활의 ‘기술냉전(Tech Cold War)’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올해는 한국과 중국이 1992년 공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양국은 사드 사태 등으로 불편한 상황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경제를 중심으로 놀랄 만한 윈윈(win win) 관계를 만들어 왔다. 이러한 기조를 깨뜨려서는 안된다. 혈맹인 미국과 중국이 인도태평양을 중심으로 사활의 쟁투를 벌인다고 해서 어느 한쪽에 줄을 서는 것은 현명한 외교 방책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 나름의 ‘한국형 인도-태평양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첫째 ‘한국형 인태전략’은 냉정한 국익 판단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국익(national interest)’이 무엇이며 누가 국익을 판단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당시 정부가 국익을 규정하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방한 시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면담이 아닌 전화대화를 택한 것은 나름 국익 판단에 의한 대응으로 생각된다. 중국 네티즌들은 환호했고 미국 조야에서는 다른 평가들이 나왔다. 윤석열 정부 나름의 ‘색깔 있는 외교’를 보여준 첫 사례다. 국익에 따른 사안별 대응이다. 타이완 해협에 긴장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나름 한반도에 불씨가 날아오는 것을 막았다.
둘째 ‘한국형 인태전략’은 우리 외교의 외연확대에 있다. 4강 외교에 갇힌 우리 외교의 외연을 적극적으로 넓혀야 한다. 그 대상은 아세안과 인도다. 전임 정부의 신남방외교를 적극 계승해야 한다. 그중 G3로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 인도와의 관계 강화는 특히 중요하다. 인도는 중국의 배후에 위치한 쿼드의 핵심국가다. 경제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2014년 모디 정부 출범 이래 인도는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우리측 관심이 인도에 못 미친다. 다행히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직후 4강국가에 준해 모디 총리와 우선적으로 전화통화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차기 정상방문 행사의 최우선순위도 인도에 두어야 한다.
셋째 ‘한국형 인태전략’은 민간기업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중시해야 한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AI, 5G 등 미래 첨단 산업의 경우 기업의 판단이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이 파격적인 반도체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앞으로 한국이 반도체 동맹의 파트너가 아닌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보도에 의하면 우리 정부는 규칙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룰메이커(rule maker)로 참여해 우리 입장을 반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칩4에 대해서도 ‘반도체 공급망 협력대화’라는 용어를 사용, 특정 국가(중국)를 배제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회장도 반도체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업만큼 미래를 생각하는 단위가 없다. 인태전략 수립에 기업을 깊이 참여시켜야 한다.
주변상황 격변, 당분간 신중한 행보 필요
동북아 지역이 극히 민감한 때다. 시진핑 주석이 올가을 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총서기 3회 연임이 예정되어 있다. 중국 내 고위 리더십의 대폭적인 교체도 예상된다. 중국 당대회 후 북한이 7차 핵실험을 감행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7월 28일 소위 전승절 연설에서 우리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강한 수위로 비난한 바 있다. 한반도 문제 분석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내년초 한반도 위기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럴 때의 우리 외교는 당분간 신중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사드 3불1한 (3不1限)문제도 마찬가지다. 성주 주한미군 사드기지를 8월말 정상화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미동맹 강화를 외교 안보의 핵심공약으로 내건 새 정부가 기왕에 배치된 사드를 정상화시키는 것은 이해가 간다. 사안별로 국익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는 현상유지가 필요하다. ‘약속’이냐 ‘설명’이냐 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국익을 위해 당분간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군사 전문가들 중에는 앞으로 인태지역 중 미국과 중국이 물리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4지점(타이완, 동중국해, 남중국해, 한반도)의 하나로 한반도를 꼽는 사람들이 있다. 충돌을 사전에 막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충돌이 일어나면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다. 엄청난 비극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미·중간 경쟁 상황 속에서 극히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필자 주요 이력
△ 경기고. 서울대 외교학과. 외시 12회 △ 주중(駐中)한국대사관 총영사, 경제공사 △ 한중일 협력사무국 초대 사무총장 △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장 △ 주(駐)인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