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칼럼] 기시다 외교의 공백, 한일관계 재정립이 긴요
2022-06-28 14:18
지난 6월 10일 일본 총리로서는 8년 만에 참석한 싱가포르 아시아 안보 회의(샹그릴라 대화) 기조 강연에서 기시다 총리는 ‘평화를 위한 기시다 비전’을 발표했다. 규범에 기반한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질서의 유지·강화, 안보 강화, 핵무기 없는 세계, 유엔의 기능 강화 및 경제 안보 등 새로운 분야에서의 국제적인 연계 강화 등을 핵심축으로 하여 외교·안보 면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제시했는데, 중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중국, 러시아, 북한을 국제관계에서 보편적인 규범을 무시하고 타국의 평화와 안전을 무력이나 위협으로 짓밟으려는 국가로 인식하려는 적대감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특히, 기시다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국제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태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동아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표명했다. 또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국제법이 지켜지지 않고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며,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안보리 결의에 반하는 핵과 미사일 활동 강화가 국제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심각한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위협 인식에 따라 기시다 총리는 일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지역의 평화 질서에 공헌할 책무가 자신에 있다면서 일본의 방위력을 5년 이내에 발본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방위비의 상당한 증액을 확보하겠다는 결의도 표명했다.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자 2023년부터 2년 동안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할 일본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응분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기시다 비전을 통해 일본이 지향하는 국가상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며, 일본을 둘러싼 안보 환경의 엄중함을 강조하면서 방위력 강화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기회로 활용하려고 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2012년 12월 제2차 아베 정권 등장 이후 악화된 한· 일관계 때문인지, 한일 간의 경제적 격차가 대등할 정도로 급속하게 줄어든 것에 대한 초조감이나 경계심 때문인지, 아쉽게도 기시다 외교에서도 대한민국의 외교 공간이 축소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약 36분에 걸친 연설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실현이란 문맥에서만 한미일의 긴밀한 연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한국이 일본의 다층적인 안보협력을 추진하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동지국가 범주에 포함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샹그릴라 대화 참석을 계기로 6월 11일 열린 한미일 국방장관회담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추진을 위한 정보공유, 고위급 정책협의, 공동 훈련을 포함한 3국 협력의 심화에 합의하면서도 한·일 국방장관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이날 한일 국방장관회담이 열리지 못한 이유에 대해 기시 노부오 방위상은 “일·한 간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회담에 대해서는 적시 적절하게 판단”할 것이라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6월 29일 스페인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정상회의에는 한국과 일본 정상이 처음으로 나란히 초대받아 참석한다. 그러나 4년 9개월 만에 한미일 정상회담은 열리지만, 일본 측은 한일 정상 간의 약식회담 개최에 대해 부정적이다.
‘한일관계 정상화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는 한일관계사의 이정표(里程標)라 할 수 있는 1998년 10월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정신에 입각한 역사, 무역, 안보 문제의 포괄적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윤석열 대통령의 2022년 2월 8일 포린어페어스 기고문). 윤석열 정부는 한일 정상 간의 셔틀 외교 복원을 통한 신뢰 회복도 중시하지만, 일본 측은 강제 동원 피해 관련 대법원판결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역사문제의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구체적인 해결방안 제시를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전제조건화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해결”이 필요하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아베 총리를 만나지 않겠다고 사실상의 전제조건화한 때와는 정반대 상황이다. 박 전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일본 내에서는 정상이 만나서 여러 현안에 대해 흉금을 터놓고 솔직하게 얘기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역사문제를 둘러싸고는 한일 양측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감정도 예민해 어느 한쪽이 양보하는 형태로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 만큼 대화를 거듭해 신뢰를 쌓고 벌어진 틈새를 좁혀가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와의 대화를 거부했던 일본 기업이 일본 정부 방침을 거스르고 대화에 응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대위변제’다. 이것은 우리 정부가 일본 기업을 대신해 피해자에게 배상하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이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 기업의 자산 현금화는 불가피하지만, 이것은 일본 기업에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매각되는 일본 기업의 자산을 한국 정부가 사들였다가 돌려줘야 하지만, 이것을 우리 국민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것인가.
가령 양국 정부가 어떤 형태의 합의를 하든 역사문제에 관한 한 일본 측에 귀책 사유가 있는 만큼 일본 정부나 기업도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의 행동을 구속하는 어떤 조치도 해서는 안 되며, 일본 정부도 무라야마 담화나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있는 형태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할 필요도 있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넘친다.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며, 양국 정부 간의 긴밀한 협의와 협력이 불가결하다.
미·중의 전략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발생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의 국제정세는 유럽과 아시아의 안보 문제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한·미·일 국방장관회담에서는 처음으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도 확인했다. 경제와 군사 면에서 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 없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은 생각할 수 없다. 오는 7월 10일 예정된 참의원 선거 이후 외교통 기시다 총리가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과의 관계 재정립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해주길 바란다.
조진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도쿄대 법학박사(국제정치전공)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센터장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도쿄대 법학박사(국제정치전공)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