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중사제의 다석 유명모를 통한 동양적 궁극적 관심의 추구
2022-04-07 10:46
윤정현 신부의 <없이 계시는 하느님> 서평
사랑하는 후배 사제인 윤정현 신부는 원래 영국의 버밍험대학 신학부에 제출한 다석 유영모에 관한 박사논문을 오랜 세월이 지나 최근에 동연출판사에서 우리말로 상재하였다.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함석헌이 존경하던 스승 유영모
다석 유영모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함석헌의 스승이다. 함석헌이 뿌리 깊은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예언자적 역사의식으로 일제 하에서 투옥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거침없이 담대한 진리의 선언과 외침, 그의 저술을 통하여 1950년대와 60년대를 점철하여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를 바탕으로, 1970년대와 80년대에 그가 펼친 <씨알의 소리>라는 개인잡지를 통하여 한국의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훌륭히 감당하였다. 의롭고 대담한 정치적 정론은 물론이었지만 그와 더불어 그 수많은 저술과 정론 속에 깃든 함석헌의 기독교신앙과 역사신앙 나아가 동양적 노자 장자의 심오한 사상과 철학을 함석헌은 한국의 민중을 향하여 펼쳤다. 그리하여 함석헌은 가히 한국사회의 의로운 사상가와 스승의 한 사람으로 그의 고난의 삶과 실천 속에서 추앙받고 주목을 받았다.
이 같은 함석헌이 스승으로 받든 이가 다석 유영모다. 사실상 유영모는 함석헌과 많은 점에서 대조적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라는 엄혹한 민족의 비극과 노예민중의 삶의 현실에서 함석헌이 항상 예리하게 이 같은 모순과 비극에 맞서며 고난의 삶을 살아갔다면 유영모는 그의 제자 함석헌과는 대조적으로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역사적 상황에 다석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실천적인 삶으로 조응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다석의 분명한 한계로 지적될 수도 있다. 나 자신도 대단히 비판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석은 엄혹한 시대에서 치열한 역사의식의 부재(不在)로 재단되거나 비난받을 수 있는 그의 한계가 너무도 분명하였지만 대단히 독특한 자신의 사유의 세계에서 깊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천착한 학자와 이론가 내지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석 유영모는 어쩌면 한국의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적인 면모가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원래는 신부가 되려고 했던 신학생이었다가 철학으로 학문의 길을 작정하면서 서구사상계에 대단히 심오한 사유체계를 이룩하고 특히 독특한 그의 실존적이면서도 해석학적인 언어철학의 경지를 열었다. 그에게도 정확하지 못한 역사적 인식으로 인하여 저명한 철학자가 나치 체제에서 프라이부르그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바람에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한나 아렌트가 결별을 하는 등 파문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지도적 사상가와 철학자와 지성인으로서의 오점으로 인하여 그는 전후에 한동안 칩거하고 반성하는 시기를 거치기도 했다. 이같은 사상가로서의 공적 삶의 한계와 오류가 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룩한 사유세계의 심오함과 독창성으로 인하여 하이데거는 그의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석 유영모는 구조적으로는 몰역사적인 그의 한계가 분명하기는 해도 마치 조선의 하이데거처럼 그의 전통적인 한학의 기초 위에서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 및 그의 노자 장자철학의 폭넒고 다채로운 동양적 사유세계 속에서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자신의 독특한 사유세계와 특별히 한글의 독특한 언어철학의 경지를 개척하고 개화시켰다.
윤 신부는 다석 유영모의 수많은 강의의 내용을 제자들이 수집한 그의 어록과 사유체계를 나름대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안에서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성리학의 태극, 불교의 공-무의 개념과 노장의 도의 개념들을 통하여 다석사상의 총체적 의미와 동양적 궁극적 개념의 경계를 초월하는 교차와 해석학적 추구를 시도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신학적이며 종교학적 시도로 파악된다.
오랫동안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은 서구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참된 삶의 의미와 중심인 인간의 진리와 도의 탐구와 추구는 서구 기독교신학의 독점과 전유물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런 차원과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과 땅과 인간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진리와 궁극적 인간의 존재의미의 탐구는 서구 기독교신학 보다도 동양의 노자, 장자를 위시하여 유교의 성리학과 불교에서도 심오하게 추구되었다. 다석은 기독교 크리스챤의 자유로운 관점에서 풍부하게 동양의 선비로서 이를 연결시켰고 윤 신부는 다석의 이 사유세계를 더욱 체계적이고 세련되게 신학적인 재구성과 해석학적 의미를 시도한 것이다. 이제 탈(脫) 후기기독교와 신학의 시대를 맞아 보편적인 우주적 하느님의 진리개념과 참 종교간의 진리의 교류와 대화가 인류의 평화와 일치를 위하여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에 윤 신부의 저술이 갖는 의미가 크다.
윤 신부는 고교를 마치고 대입재수생 시절에 시대적인 불우한 상황에서 일찍이 21세의 나이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고초를 겪은 바 있다. 이러한 극적인 체험이 그의 신학지망과 이 땅에서 사제가 되는 삶에서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고 믿어진다. 고향 고창에서 근근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하고 성직자가 되는 과정에서도 그는 결코 순탄하지 않은 고난의 세월을 거쳐서 성직 서품을 받고 만학에 가까운 자신의 신학을 꾸준히 탁마하였다. 그는 교단적인 갱신작업을 위하여 젊은 신학생 전도사 그룹들이 선교사 시대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강력히 요청한 파동에 휩쓸리기도 하면서 어렵게 서품을 받았고 서울교구에서는 가장 오지에 속하는 춘천성당에서 신입사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춘천성당은 강원도의 도청이 자리하고 있는 수부(首府)이지만 성공회적인 현실로서는 사실상 사제의 급여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사목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임 신부로 부임한 윤 신부는 원래 매우 보수적인 강원도와 춘천의 분위기 속에서 춘천성당을 춘천지역의 대표적인 민주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로 그가 춘천에서 서울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선교간사로 사역처를 옮길 수 있었다. 그는 KNCC에서 선교교육부장으로 근무를 마치고 대전교구로 사역지를 옮겨갔으며 먹뱅이성당을 비롯한 대전교구의 사목생활과 함께 서강대 대학원의 수학과정을 거쳐서 영국의 버밍함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다석 안에 깃들면서 다석을 초월하는 신학으로
이제 평생의 사제생활을 은퇴로 마감하면서 윤신부는 고향 고창에 낙향했다. 수려한 반암마을에서 네팔 출신의 양아들과 어린 우주 등을 기르고 키우면서 새로운 자연 속에서 공동체를 일구며 트리하우스도 만들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번에 박사논문의 출판을 통하여 기왕에 그가 학문적 업적으로 이룩한 다석에 대한 심오한 추구와 더불어서 다석의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도 기울여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스승의 한계에 안주하는 제자는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친애하는 윤 신부가 그의 고향 고창의 붉은 황토와 바람 속에 풍성하고 끈질기게 깃든 동학농민혁명의 이념과 인내천(人乃天), 개벽,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종교성을 신학자이자 민중사제로서 더욱 천착하여 발전시켜 나아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다석 안에 깃들면서 다석을 초월하는 것이 아마도 윤 신부의 사명이며 이땅에서의 새로운 신학적 종교적 뉴 프런티어가 될 것임을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