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뜨거운 피' 천명관 그리고 정우의 힘
2022-03-23 08:37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이나 몸 상태에 따라 영화가 재밌기도 하고, 형편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최씨네 리뷰'는 이러한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꼭지(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논평(리뷰)을 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설 원작을 영상화할 때는 우려가 뒤따른다. 그중 하나가 문장을 영상으로 옮길 때 벌어지는 오류들이다. 대개 독자가 상상한 세계관을 훼손하거나, 문장의 의미나 시적 허용을 정의하며 작위적인 꼴들을 보곤 한다. 소설 속 문장들은 그 문장만의 생명력이 있어 영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마구 널 뛸 때가 있다. '숨'이 너무 강하거나, '숨'이 죽어버리기 일쑤라 자칫했다가는 이도 저도 못한 결과물만이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이 원작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타인의 '문장'을 어떻게 자신만의 '언어'로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장편 소설 '고래' '고령화 가족' 등으로 문단을 뒤흔들었던 천명관 작가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평소 영화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건너 듣기는 하였으나 '소설 작가'가 '영화'를 만든다고 하니 불신이 컸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영화 '뜨거운 피' 시사회 날, 남모르게 속앓이를 했다. 영화가 그의 소설만큼 근사하지 못하다면 꽤 속이 상할 거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영화에 몰입 중인 나를 보니 걱정하던 게 다 우스워졌다. 역시 천명관이었다. 파격적인 문법, 굵직한 골자로 문단을 흔들고 독자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그다웠다. 천명관 감독은 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를 정독하고 해체해 자신만의 언어로 완성했다. '걱정은 아무 힘이 없구나.' 머쓱하기까지 했다.
1993년 부산의 변두리 포구 '구암'에서 호텔 '만리장'을 운영하는 '손 영감'(김갑수 분)은 동네의 생계와 치안을 돌보는 절대자다. '희수'(정우 분)는 그의 곁에서 오랜 시간 수족으로 일해왔으나 나이 마흔이 되도록 무엇 하나 이룬 바 없이 도박판을 전전하는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연인 '인숙'(윤지혜 분)과 그의 아들 '아미'(이홍내 분)와 함께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하는 '희수' 앞으로 '구암'을 장악하려는 '영도파'의 일원이자 오랜 친구 '철진'(지승현 분)이 찾아온다. '희수'가 갈등하는 사이 평화롭던 '구암'은 혼란을 맞고, 그 역시 소용돌이로 휘말리고 만다.
영화는 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선포 후 먹고 살기 팍팍해진 건달들의 삶을 조금도 멋스럽지 않게 보여준다. 여느 누아르 영화처럼 거대한 조직, 정경 유착, 공권력 등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부산 안에서도 변두리 도시 그리고 그 안에서도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인물들을 포착하고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날 것의 이미지로 담아낸다. "사실적이고 진짜 건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는 천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인물들의 생존 방식, 이해관계, 직업적인 해결 방식 등은 멋스럽지 않아도 투박하고 꽤 힘이 세다.
영화 속 공간도 인상 깊다. 가상 도시 '구암'을 만들어 낸 제작진의 고민과 노고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화려한 부산의 면면보다 작은 항구와 낙후된 공간을 찾아내 영화의 분위기를 구성하고, 인물의 내면을 엿 볼 수 있도록 했다. 천 감독은 "아기자기하기보다는 누추한 곳, 거칠고 큰, 그런 바다의 이미지들을 생각했다. 변두리 항구지만 부두, 큰 다리가 있는 공간, 비린내가 날 것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천 감독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현한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전하고 싶다. 특히 정우는 원톱 주인공으로 제 할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는 관객이 완벽하게 인물에게 동화하고 그의 심정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든다. 배우 정우의 무기이자 강점이다. 그의 오랜 팬이라면 영화 '바람'의 지승현, 이유준과 한 프레임에서 연기하는 정우의 모습도 반가울 터. 이전보다 더욱 성숙하고 단단해진 이들의 연기 내공을 보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용강'을 연기한 최무성은 그야말로 '폭풍' 같았다. 그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래 여운만 남았다. 이 외에도 김갑수는 베테랑 배우 다운 노련함과 묵직함으로 극의 중심을 잡고 익숙한 얼굴의 조연 배우들도 '연기 구멍'이 없다. 신예 이홍내는 연기파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패기를 보여준다. 그의 반짝임이 예사롭지 않다. 3월 23일 개봉하고 상영 시간은 120분, 관람 등급은 15세 이상이다.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이나 몸 상태에 따라 영화가 재밌기도 하고, 형편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최씨네 리뷰'는 이러한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꼭지(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논평(리뷰)을 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설 원작을 영상화할 때는 우려가 뒤따른다. 그중 하나가 문장을 영상으로 옮길 때 벌어지는 오류들이다. 대개 독자가 상상한 세계관을 훼손하거나, 문장의 의미나 시적 허용을 정의하며 작위적인 꼴들을 보곤 한다. 소설 속 문장들은 그 문장만의 생명력이 있어 영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마구 널 뛸 때가 있다. '숨'이 너무 강하거나, '숨'이 죽어버리기 일쑤라 자칫했다가는 이도 저도 못한 결과물만이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이 원작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타인의 '문장'을 어떻게 자신만의 '언어'로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장편 소설 '고래' '고령화 가족' 등으로 문단을 뒤흔들었던 천명관 작가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평소 영화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건너 듣기는 하였으나 '소설 작가'가 '영화'를 만든다고 하니 불신이 컸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영화 '뜨거운 피' 시사회 날, 남모르게 속앓이를 했다. 영화가 그의 소설만큼 근사하지 못하다면 꽤 속이 상할 거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영화에 몰입 중인 나를 보니 걱정하던 게 다 우스워졌다. 역시 천명관이었다. 파격적인 문법, 굵직한 골자로 문단을 흔들고 독자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그다웠다. 천명관 감독은 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를 정독하고 해체해 자신만의 언어로 완성했다. '걱정은 아무 힘이 없구나.' 머쓱하기까지 했다.
영화는 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 선포 후 먹고 살기 팍팍해진 건달들의 삶을 조금도 멋스럽지 않게 보여준다. 여느 누아르 영화처럼 거대한 조직, 정경 유착, 공권력 등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부산 안에서도 변두리 도시 그리고 그 안에서도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인물들을 포착하고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날 것의 이미지로 담아낸다. "사실적이고 진짜 건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는 천 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인물들의 생존 방식, 이해관계, 직업적인 해결 방식 등은 멋스럽지 않아도 투박하고 꽤 힘이 세다.
영화 속 공간도 인상 깊다. 가상 도시 '구암'을 만들어 낸 제작진의 고민과 노고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화려한 부산의 면면보다 작은 항구와 낙후된 공간을 찾아내 영화의 분위기를 구성하고, 인물의 내면을 엿 볼 수 있도록 했다. 천 감독은 "아기자기하기보다는 누추한 곳, 거칠고 큰, 그런 바다의 이미지들을 생각했다. 변두리 항구지만 부두, 큰 다리가 있는 공간, 비린내가 날 것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용강'을 연기한 최무성은 그야말로 '폭풍' 같았다. 그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래 여운만 남았다. 이 외에도 김갑수는 베테랑 배우 다운 노련함과 묵직함으로 극의 중심을 잡고 익숙한 얼굴의 조연 배우들도 '연기 구멍'이 없다. 신예 이홍내는 연기파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도 밀리지 않는 패기를 보여준다. 그의 반짝임이 예사롭지 않다. 3월 23일 개봉하고 상영 시간은 120분, 관람 등급은 15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