㉚에필로그 – 천년 문장(紋章)과 담양학

2022-03-10 11:07

물이 깊고 양지 바른 고을 

2015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담양’ 특별전이 열렸다. 그때 담양 출신의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전시 도록 서문에 이렇게 썼다.
‘담양은 《호남가》에서 ‘백리 담양 흐르는 물’로 기억됩니다. 그만큼 담양은 물이 깊고 양지 바른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질펀한 물은 담양의 속살을 두텁게 만들어 넉넉하고 윤택한 삶을 지탱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나무는 또 하나의 담양입니다. 들녘과 강산은 물론이려니와 사람들의 마을에도 푸른 대숲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곧게 서 있으되 부러지지 않고, 사철 푸르되 속을 비운 대나무는 이 풍진 세상에서 직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대나무는 사철 푸르되 속을 비웠다. 담양 소쇄원의 대나무[사진=이광표]

비옥한 땅과 넉넉한 물, 아름다운 담양의 자연경관은 일찍이 사유와 풍류의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조선 중기 국문학사를 꽃피운 면앙정 송순을 비롯하여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정자를 짓고 자연을 노래했습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백일홍 붉게 물든 명옥헌, 광풍제월의 소쇄원은 담양 인문학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2010년부터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에서 문학 레지던시 공간 ‘글을낳는집’을 운영하는 김규성 시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서울 중심이었지요. 그런데 문학에서 볼 때, 지방이 서울을 리드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처음이 조선시대 담양의 가사(歌辭)문학이었습니다. 당시 담양의 문학이 이 땅의 문학과 사상을 주도했지요.”
가사문학은 담양의 역사에서 참으로 빛나는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중기, 담양의 문학은 우리 문학의 중심이었다. 문학만 놓고 보면 담양은 조선의 수도였다. 문학으로 한반도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이 같은 성취는 담양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전통은 담양의 곳곳에서 담양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지면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송강정에 오르는 길. [사진=이광표]

그런데 담양에는 가사와 누정(樓亭) 원림(園林)과 대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담양의 역사와 문화는 넓고 깊다. 은근하지만 집요하다. 담양 토박이들에게는 낯익은 것이겠지만, 담양을 찾아온 여행객들의 눈으로 보면 곳곳에 새로운 무언가가 숨어 있다. 담양은 정중동(靜中動)의 도시다. 조용한 것 같지만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은근히 생동감이 넘치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곳곳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말이다.
담양의 명물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이 이국적인 가로수길은 1972년 조성되었다. 당시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담양 사람들은 이국의 나무를 도로변에 심는 파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50년이 흐른 지금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담양은 늘 이렇게 변화를 추구한다. 옛것은 옛것대로 잘 지키고 존중하되 무언가 새로움을 덧대어 변화를 추구한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심었고, 양곡창고를 멋진 문화공간으로 바꾸었고, 도심 한복판에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있고, 전통 5일장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시장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 변화는 또 담양의 전통이 될 것이다.

담양군의 '천년 담양' 문장(심벌마크).[사진=이광표]

담양의 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담양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고풍스러운 문장(紋章·심벌마크)들이다. 해동문화예술촌(옛 해동주조장)에도 있고 담빛예술창고(옛 양곡창고) 전시실에도 있다. 한적한 시골길 버스정류장에도 있고 화장실 외벽에도 그려져 있다. 물론, 담양군 홈페이지에도 나온다. 대나무를 상징하는 초록색 톤의 문장은 마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명문가나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담양만의 특징이다. 이런 문장을 만난다는 것은 여행객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다.
담양군이 이러한 문장을 창안한 것은 2018년. 담양 명명(命名) 1000년을 기념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담양 땅은 백제 때는 추자혜(秋子兮)로 불렸고 통일신라 때에는 추성(秋成)으로 불렸다. 이어 고려 현종 때인 1018년에 담양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후 1000년이 지난 2018년, ‘천년 담양’을 선포하고 인문 역사 환경의 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슬로건은 ‘천년 담양, 생태와 인문학으로 디자인하다.’ 지난 1000년을 이어받아 새로운 1000년을 꿈꾸려는 것으로, 지금도 담양 곳곳에서 이 프로젝트가 이어지고 있다.
담양의 문장은 ‘천년 담양’ 문장과 12개 읍·면 문장 등 모두 13개다. 문장들의 디자인을 해독해보면 담양의 역사와 내력, 문화와 풍속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담양군 전체를 상징하는 천년담양 문장은 가사문학을 상징하는 지구와 우주, 담양의 못(潭)과 볕(陽)을 상징하는 태양, 죽녹원을 상징하는 대나무, 누정문화를 상징하는 정자와 연못과 초목과 건물의 창, 산수정원을 상징하는 구름과 초목과 폭포, 가사문학을 상징하는 책 등을 아이콘처럼 디자인해 넣었다. 그러곤 화룡점정으로 ‘SINCE 1018’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편안하고 재미있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저게 무얼까 하며 계속 들여다보게 만든다.‘SINCE 1018’에서는 담양의 자부심이 진하게 묻어난다.

해동문화예술촌(옛 해동주조장)의 벽에 그려진 '천년 담양' 문장.[사진=이광표]

읍·면의 문장 또한 그 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소재를 활용해 디자인했다. 담양읍 문장은 죽녹원과 관방제림, 고려 석당간(石幢竿), 담빛예술창고 등의 이미지를 녹여 디자인했다. 봉산면 문장엔 봉황을 넣어 디자인했고 월산면 문장엔 용흥사 동종(銅鐘)이 들어갔다. 금성면 문장엔 금성산성이 들어갔고 용면 문장에는 용의 머리를 상징물로 넣어 디자인했다. 슬로시티 창평면의 문장에는 느림을 상징하는 달팽이가 들어갔다. 여기에도 ‘SINCE 1914’ ‘SINCE 1918’과 같은 문구가 당당하게 들어가 있다.
담양의 문장들은 고풍스럽고 품격이 있다. 담양 사람이건 여행객이건, 이 문장을 보면 담양이라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담양군은 이 문장을 만들면서 ‘천년 단양’ ‘인문 담양’을 선포했다. 도심에 있는 담양군청 직원 관사를 주민들이 함께하는 문화와 인문학의 공간으로 꾸미기도 했다. 이곳을 ‘인문학 가옥’이라 부른다. 이러한 움직임 모두 의미 있는 도전이고 그것들은 자연스레 담양의 역사와 문화가 된다.
 

인문학 가옥의 안내표지.[사진=담양군문화재단 제공]

담양의 문장들은 내용도 형식도 다른 지역과 뚜렷이 차별화된다. 특히 읍·면까지 아우르는 문장은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이 문장들은 전문 디자이너들이 담양군과 읍·면의 관계자, 주민들을 만나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은 뒤 디자인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역사적 사건과 문화재, 생태와 특산품 등을 통해 해당 읍·면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담양의 문장은 지극히 ‘담양스럽다.’ 담양학(潭陽學)의 상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담양학은 이제 앞으로의 1000년을 꿈꾸어야 한다. 그 자원은 풍부하다. 그리고 담양학은 현재도 곳곳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1000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좀 더 디테일한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예를 들어 도시재생 프로젝트도 더 치밀하고 더 진정성 있게 꾸며나가야 한다. 해동문화예술촌의 경우, 해동주조장의 유·무형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회복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가사문학관과 한국대나무박물관은 전시공간의 구성이나 디자인, 전시 콘텐츠 등을 과감하게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두 박물관은 담양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박물관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세련되고 품격이 높아야 한다.

담빛예술창고에 마련된 담양 역사 전시공간.[사진=이광표]

아울러 담양의 역사와 문화예술, 음식과 환경, 영광과 수난의 스토리 등을 한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물론, 담빛예술창고에 담양에 관한 작은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은 비좁고 전시 콘텐츠도 부족해 보인다. ‘천년 담양’의 역사적 문화적 위상에 비하면 다소 옹색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천년 담양, 인문 담양이라면 지금의 공간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 이러한 공간이 마련된다면 당연히 담양학의 거점이 될 것이다. 담양의 새로운  1000년, 더 큰 기대를 가져본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국립광주박물관 《담양》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