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담양 관광 1번지 죽녹원
2022-01-10 09:49
대나무 살아나면 담양이 살아난다
담양은 지명부터 못 담(潭), 볕 양(陽)으로 환경친화적이다. 담양은 대나무숲과 함께 정철과 송순의 인문 정신이 깃든 슬로시티, 생태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담양은 현재 2565ha인 대나무밭을 1만ha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대나무가 지금의 4배로 늘어나면 담양군은 한국에서 산소 발생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 된다.
1970년대 이후 죽물(竹物)이 플라스틱에 밀리고 중국산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할 때만 해도 담양 사람들은 "대나무로 먹고살던 시대는 우리 대(代)에서 끝났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담양군은 2003년부터 대나무밭을 사들여 테마공원(죽녹원·竹綠苑)을 만들고 대나무로 가로수를 심기 시작했다. 당시 지역사회에는 "사양길로 들어선 대나무로 뭘 하자는 건가" 하는 싸늘한 분위기가 있었다.
담양군의회 의원들도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대나무 도시 안지현(安吉縣)을 돌아보고 와서는 인식이 달라졌다. 대나무 숲으로 관광객도 끌어오고 먹고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담양군 공무원들은 안지현에서 대나무를 관리하고 활용하는 법을 배워왔다.
담양의 관광 붐은 카페 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구 4만6000여명 시골 군(郡)에 카페가 213개. 최근에는 담양읍 백동사거리에 웅장한 투썸플레이스가 문을 열었다. 카페가 인구 216명 당 1 개꼴인데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로 성업 중이다.
담양에서 대나무가 잘나가던 시절에 ‘대밭은 생(生)금밭’이라는 말이 생겼다. 조선시대부터 담양 경제는 대나무가 움직였다. 대나무가 살아나면 담양이 살아나고 대나무가 약하면 담양이 약해졌다. 담양에서는 고려 초부터 음력 5월 13일을 죽취일(竹醉日·대나무를 심는 날)로 정해 마을 주변에 대나무를 심고 죽엽주를 마셨다. 지금은 이 행사가 대나무 축제로 발전했다.
15세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담양에서 올리는 공물이 가는 대, 왕대, 오죽, 화살대, 죽력(竹瀝·대나무를 구워서 나온 진액)으로 기록돼 있을 만큼 대나무 산업의 역사가 오랜 고장이다. 조선시대부터 대나무로 만든 물레 바늘상자 삿갓 방석 바구니 키가 생산되었다. 조선말기부터 담양의 죽물은 만주 몽골로까지 진출했다.
담양에서 1916년에는 참빗을 만드는 진소계(眞梳契)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1919년에는 참빗조합으로 발전하고 1926년 산업조합이 탄생했다. 193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죽제품의 상품화가 이뤄졌다.
죽녹원의 8개 길에는 모두 이름이 붙어 있다. 운수대통 길, 죽마고우 길, 사색의 길, 추억의 샛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성인산 오름길, 철학자의 길, 선비의 길.
대나무는 이름처럼 나무가 아니다. 벼과(科) 식물이다. 벼 보리 밀 갈대 옥수수처럼 다년생 풀이다. 대나무는 매년 죽순이 나와 하루 1m 이상 자란다. 대나무가 빨리 자라는 이유는 다른 벼과 식물처럼 줄기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속을 채우는 데 영양분을 쓰지 않으니 빨리 높이 자라서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각 마디마다 성장점이 있어 동시에 자라기 때문에 30~40일이면 다 자란다. 그래서 경제성이 높다. 대나무의 생명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 살포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았다.
다른 벼과 식물은 매년 씨앗을 인간의 먹이로 제공하는데 대나무는 평생 한 번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면 죽는다. 대나무는 인간에게 씨앗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에 그 몸통을 내주었다. 플라스틱이 나오지 않던 시절에 인간은 대나무의 단단하고 썩지 않는 줄기로 온갖 생활도구를 만들었다.
죽녹원에는 왕대 맹종죽 분죽(솜대)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죽녹원을 걸으며 대나무 이름 맞히기를 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관광객이 이 세 종류의 대나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줄기 마디 잎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왕대는 줄기가 굵고 섬유가 질기며 결이 곱고 탄력성이 좋아 죽세공과 죽재(竹材)로서 용도가 다양하다. 왕대는 강해서 곧게 자란다. 옛날 죽창을 만들 때도 이 나무를 썼다. 솜대(분죽)는 줄기에 흰 무늬가 있어 이것이 솜처럼 보인다고 해서 솜대라고 부른다. 죽순도 맛이 좋아 식도락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죽녹원 안의 한옥체험관에서 숙박을 하면 며칠 동안 양반 사대부가 된 기분이 들 것이다. 침대방에서 의자 생활을 하다 온돌방을 쓰면 처음에는 누웠다 일어나고 앉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런데 인간은 환경적응의 동물임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둘째 날부터는 앉았다 일어서며 요가를 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대숲에 둘러싸인 한옥체험관 중에서는 등황각(登皇閣)이 가장 딜럭스하다. 한달 내내 땀 흘려 일하고 하루 이틀 황제 기분을 내보는 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천연기념물 지정된 영산강 둔치 대나무숲
대전면(大田面) 태목리(台木里) 대밭은 하천 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퇴적층에 형성된 대나무 군락지다. 대나무 숲이 울창해지려면 수량이 풍부해야 한다. 태목리 대밭은 영산강의 지류인 대전천 하천습지에 있다.
태목리 대밭은 영산강 8경(八景)에 들어간다. 대나무 숲에 안개가 짙어지면 마실 나갔던 바람이 돌아와 운무(雲霧)를 거둬가는 죽림연우(竹林煙雨)의 풍경이 연출된다. 대나무밭과 습지에 멸종위기종인 수달 삵 매 큰기러기 흰목물떼새 구렁이 황조롱이 등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필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물억새 숲을 헤치고 나가자 대전천의 철새 수십 마리가 이방인의 침입에 놀라 날개를 치며 비상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하천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에서 다양한 목본(木本) 식물이 밀생한다.
태목리에는 권율 장군 후손들이 가꾸는 대밭이 오랜 세월 잘 보존돼 있다. 옛날 태목리 대밭 옆 대전천 하천 부지에서는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큰물이 질 때마다 농민들이 땀흘려 가꾼 논밭의 작물이 쓸려 나갔다. 태목리에서 가장 먼저 김병관 씨(95)가 하천부지에 대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은 물이 들어차더라도 채소처럼 쓸려 나가지 않았다. 김 씨가 대를 심어 돈벌이를 하자 다른 농민들도 논밭과 하천 습지에 대밭을 조성했다.
태목리 사람들은 대나무로 바구니를 만들고 죽순 껍질로는 방석을 짜서 담양 죽물시장에 내다팔았다. 대밭 한 마지기에서 나오는 소득이 논 10마지기보다 나았다. 대밭은 홍수 피해도 없었다. 대밭이 없는 사람들은 죽물을 열차에 싣고 서울 부산 경기 강원 등지로 나가 장사를 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하늘이 시샘했는지 1970년대부터 대값이 폭락하고 대밭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주민들은 대를 베어내고 논밭을 복원했으나 둔치에 있던 대나무들은 방치됐다. 강변의 대나무들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뻗어 나가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태목리 사람들은 지금은 대나무 대신 딸기 농사를 짓는다. 돈벌이가 되는 딸기 농사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태목리 대나무밭의 이름이 높아지면서 태목리의 환경친화적 이미지가 딸기 판매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마크테토의 이이남 인터뷰> 《Living Sense》(https://smlounge.co.kr/living/article/38423)
2.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담양군의 민속문화》 담양군, 2013
3.《천년의 역사와 함께 한 국가중요농업유산 담양 대나무밭》 담양군, 2017
4 최낙언 <대나무는 사실은 나무가 아니다> 《한국일보》202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