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 칼럼] 숫자 놀음 ‘분기 자본주의’의 개혁

2021-11-15 09:48

[최남수 서정대 교수] 


맞는 말인데 실행이 어려운 과제가 적지 않다. ‘맞는 말’이라는 것은 적어도 ‘정답’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는 얘기다. ‘실행이 어렵다’는 것은 현실적인 동기부여가 쉽지 않거나 장애물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이슈는 기업이 장기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 단기 이익만을 늘리기 위해 매몰되다 보면 장기적 체력을 훼손하게 되니 멀리 보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실제로 요즘 많이 언급되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기업의 장기 가치 제고이다.

문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있다. 아무리 장기 가치를 키우라는 지적이 많아도 당장 눈앞만 보는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면 ‘말 따로, 현실 따로’의 왜곡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라는 시장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분기마다 시장은 수익 기대치를 제시하고 기업은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올인’하는 게 경영의 솔직한 현주소임은 부인할 수 없다. 분기 목표를 맞추지 못하면 시장은 주가 하락으로 채찍질을 해댄다. 앨 고어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013년 <우리의 미래>라는 저서에서 이 같은 현상을 ‘분기 자본주의’로 부르며 단기 이익에만 치중하는 경영이 경제 전체의 건강성을 해치고 장기 전략에 타격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럽연합(EU)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EU는 지난해 7월에 내놓은 한 보고서를 통해 기업이 단기적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장기 가치를 희생시키고 있다며 정책 당국의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순익 중 배당금의 비율이 1992년의 1%에서 2018년에는 4%로 올랐지만, 수익 대비 연구개발 투자의 비중이 계속 하락하는 추세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단견(短見) 경영’은 무엇보다 CEO가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짧은 탓이 크다. 당장 연말에 짐을 싸야 할지 모르는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 앞날을 내다보는 경영을 하라고 하는 요구는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라고 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모순일지도 모른다. CEO스코어가 지난 2010년 이후 국내 전·현직 대표이사 15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문경영인의 평균 재임 기간은 3.6년에 불과했다. 사주 일가가 대표이사를 맡은 경우(11.7년)에 비해 8년여가 짧았다. 불과 1, 2년 만에 자리를 비우는 CEO도 적지 않았다. 부진한 단기 실적에 대한 문책 인사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조급한 경영진 교체는 오히려 실적 개선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이 71개 증권회사 CEO의 재임 기간과 경영 성과를 분석한 결과 장기 재임에 성공한 CEO들은 1, 2년 차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3년 차 이후 우수한 성과를 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2~3년은 CEO가 자신의 비전과 철학을 구현하기에 짧은 기간이라는 게 이 연구원의 주장이다. LG경제연구원도 같은 맥락의 의견을 내놓았다. 상장기업 CEO들은 재임 기간이 길어질수록 경영실적이 개선되다가 4년에서 7년 사이에 경상이익률의 정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단기간에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경영의 강박관념은 시장, 즉 주주의 압박에서 오는 것이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다. 주주의 실체를 들춰보자. 유진투자증권의 분석을 보면 개인투자자들의 평균 주식보유 기간은 지난 2014년의 5.2개월에서 올해는 2.7개월로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기관과 외국인도 상황은 마찬가지. 올해 기관의 보유 기간은 4.1개월, 외국인은 9.9개월에 그치고 있다. 미국도 1970년대만 해도 주주들은 주식을 평균 7년 동안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간이 7개월로 단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주식을 단지 몇초간만 들고 있다가 바로 팔아치우는 ‘초스피드’ 트레이더의 비중도 상당히 높다. 결국 시장의 압박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식을 채 1년도 보유하고 있지 않는 이들 주주를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의 장기 가치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은 단기 주주들에게 경영이 휘둘리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일부 기업의 경우 시장에 저항하며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유니레버와 코카콜라는 아예 분기 실적 발표를 중단했다. 이 조치로 헤지펀드의 유니레버 지분율은 3년 사이에 15%에서 5%로 떨어졌다. 이게 주가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휴렛 패커드의 CEO를 맡았던 칼리 피오리나는 생생한 증언을 했다. 피오리나는 2000년 4분기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사임 압박을 받았다. 그녀는 ‘숫자 놀음’을 통해 실적을 미화(美化)할 수도 있었지만 그 유혹을 뿌리쳤다. “CEO의 의무는 분기별 수익을 지키는 게 아니라 회사를 지킴으로써 향후 10년간 지속가능한 가치를 제공하는 일이다” 당당한 소신이지 않은가.

이렇듯 기업의 시선이 단기에서 적어도 5~7년의 중장기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먼저 기업 바깥에서는 연기금 등 장기투자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형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이 최근 투자기업에 기후 변화 대응 등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듯이 기업이 장기 가치를 지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이들 투자자의 몫이다. 제도적으로는 주식을 더 오래 보유할수록 더 많은 의결권을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돼야 한다. 일부 프랑스 기업들이 주식을 1년 이상 보유한 주주들에게 복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은 좋은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또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단기 경영을 부채질하는 분기 실적 발표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 사안은 투자자 보호 문제와 맞물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세제 대응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지난 2015년 힐러리 클린턴은 주식 장기 보유를 유도하기 위해 매입 후 2년 이내 매각 차익에 대해서 과세하는 안을 제안한 바 있다. 더 큰 틀에서 EU는 기업이 장기적 목표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도록 회사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해 귀추가 주목된다.

기업 내부의 본질적 변화도 긴요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재계 단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2019년 8월에 발표한 ‘기업의 목적에 대한 성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성명에서 BRT는 주주를 위한 장기적 가치 창출을 강조함으로써 ‘단기주의’ 탈피를 공식화했다. 이게 실제 경영에서 가시화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변화는 선언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뚜렷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CEO와 이사회가 앞장서야 한다. 먼저 CEO는 유니레버 등의 사례처럼 장기 가치의 희생을 초래하는 단기경영 요구에 대항하는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 이와 관련해 지난 8월 영국의 석유회사인 BP가 내린 의사결정은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BP는 160억 달러의 분기 손실을 기록해 배당도 절반으로 줄이는 등 경영이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BP는 태양열, 풍력, 수소 등 재생에너지에 연간 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발표로 주가는 오히려 7% 이상이 올랐다. 대표적 화석연료 기업인 BP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담대하게 행동하려는 점을 시장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공시를 통해 장기 경영계획을 투자자들에게 꾸준히 설명하는 노력도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기업의 목적에 대한 자문기관인 CECP는 장기 계획 공표가 지나치게 단기 중심으로 운영돼온 기존 공시를 장기적 관점으로 전환시키면서 투자자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사회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많다. 전 매킨지 파트너인 도미닉 바튼은 경영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상임 이사의 비율이 불과 43%에 그치고 있다며 이사들이 보다 많은 시간을 경영 현황을 파악하는 데 투입하라고 촉구했다. 이사회가 경영진에 대한 보상을 설계할 때 장기적 성과에 연계하라는 것도 자주 나오고 있는 주문이다.

중요한 점은 중장기 경영을 중시하는 기업이 실제로 더 나은 성과를 보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수의 연구가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분석 결과대로 재직 기간이 긴 CEO일수록 더 나은 경영 성과를 내고 있다. 또 로버트 애클리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등 연구진은 미래를 내다보는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기업이 주가수익률과 재무적 실적 면에서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보였다고 밝혔다. 예컨대 1993년에 ‘고(高) 지속가능’ 기업에 1달러를 투자하면 이 돈이 2010년에 22.6달러로 불어난 반면 ‘저(低) 지속가능’ 기업은 15.4달러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장기 경영은 단지 기업 경영의 시야를 넓히고 더 건강한 구조의 실적을 내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이래 극심해진 단기 위주 경영이 양극화 심화 등 큰 부작용을 가져온 만큼 단기를 지양하고 장기를 지향하는 경영의 변화는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차원의 이슈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기는 ‘현찰’이고 장기는 ‘약속어음’이다. 만만치 않은 ‘현찰’의 힘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아하게 ‘장기’를 얘기하면서도 계속 ‘단기의 중력’에 발목이 묶여있게 될 수도 있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