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 칼럼] "脫산소' 절박한건 아는데 ...비용은 누가 책임지나요
2021-10-18 06:00
절반의 그린 혁신이 답이다
지난 2000년 8월 28일, 세계 종교지도자 2000여 명이 뉴욕의 유엔 건물에 모였다. 갈등이 얽히고설킨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른 주제의 연설에서였다. 주인공은 그린란드에서 온 에스키모인 앙강가크 리버스. “10년쯤 전에 마을 사람 한 명이 이상한 현상을 전해주었습니다. “빙하에서 물이 찔끔찔끔 흘러내려요” 지금은 빙하에서 시냇물이 흘러내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평화를 얘기하고 있지만, 얼음은 녹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의 얘기지만 기후변화가 가져온 위험 신호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빙하 시냇물’은 지금은 얼마나 거센 물줄기로 바뀌어있을까.
팬데믹을 겪으면서 세계 각국은 ‘환경의 복수’가 순식간에 전례 없는 재앙으로 번질 수 있음을 절감했다. 당장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가 ‘시한폭탄’이라는 데 공감이 모아졌다. 경고의 수위를 잔뜩 높인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난 8월 보고서를 통해 지구의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 높아지는 시기를 2021~2040년으로 내다봤다. 당초 전망보다 10년가량 앞당겨졌다. IPCC는 1750년 이래 온실가스 증가는 명백히 인류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며 ‘문명 책임론’을 분명히 했다. 특히 앞으로 극한 기후, 폭우, 기근 등이 더 자주 그리고 더 극심하게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큰일’ 나기 전에 잘 대응하라는 ‘레드카드’를 던진 셈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기후에 대한 마지막 최선의 기회’라는 보고서에서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팬데믹보다 훨씬 크고 더 오래가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IMF는 지구의 기온 상승폭이 2℃에 이르면 전 세계 인구의 37%가 극한적 더위에 노출되고, 환경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잿빛 전망을 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잘 대응하면 지속가능 발전의 시대로 들어서겠지만, 일을 그르치면 전 세계가 향후 수십 년 동안 대형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는 게 IMF의 ‘최후 통첩’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글로벌 위기 의식의 확산은 한국 경제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부담스럽지만 이젠 선진국이 된 국가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여건 탓에 탄소중립을 향한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탄소중립기본법에서 오는 2030년의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NDC)가 기존의 26.3%(2018년 대비)에서 35% 이상으로 상향 조정된 데 이어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위원회는 이를 40%로 더 높였다.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중간 디딤돌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 대응을 놓고 당위론과 현실론이 엇갈리고 있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온실가스 감축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만큼 주요 국가들이 실행하는 속도에 보조를 맞춰 탄소중립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게 당위론이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다소비국인데다 탄소감축 속도가 다른 나라보다 느리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 국제적 비난은 물론 경제적 압박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채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온실가스 배출이 정점을 찍은 시점부터 탄소중립에 도달하는 기간이 유럽연합(EU)이 60년, 미국이 45년으로 비교적 넉넉한 데 비해 우리나라는 32년에 불과하다. 그만큼 시간이 촉박한 것이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제조업 비중이 28.4%(2019년 기준)로 다른 나라보다 크게 높은 점도 부담이다. 재계는 이를 감안할 때 갑작스러운 탄소 감축의 가속화가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보고서를 통해 탄소 감축을 위해 탄소세가 실시되면 생산비용 상승으로 산업생산이 위축돼 수출에 부정적 여파가 우려된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우려와 현실론은 나름대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도 있다. 현실적 충격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대의(大義)가 분명한 탄소중립의 목표 시점인 2050년을 향해 이미 세계 각국이 움직이기 시작해 이에 동참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데 있다. 온난화에 대한 글로벌 분위기는 긴박함 그 자체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11일 기후변화 및 건강에 대한 특별보고서에서 “기후변화가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있다”며 온도상승 폭을 1.5℃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 △건강하고 공정한 녹색 경제회복의 실현 △재생에너지로의 포용적 전환 △자연의 보호와 회복 등 우선 추진해야 할 10가지 정책을 각국 정부에 권고했다. 특히 기온 상승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하면 매년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제 유명 헬스 저널의 편집인들이 이례적으로 낸 공동 성명도 고조되는 위기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각국 정부에 기후변화 해결을 위해 긴급 행동에 나서라고 재촉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세계인들의 건강에 큰 재난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음 달에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는 각계의 이런 요구를 반영해 종전보다 더 진전된 온실가스 감축안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해외 상황을 보면 한국 경제에 주어진 선택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상태이다. 숨이 차오를 수 있지만, 에너지 다소비 국가의 오명에서 벗어나면서도 경쟁력을 지킬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하는 벅찬 과제가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 종래의 발상을 뛰어넘는 ‘그린 혁신’을 이뤄내는 정공법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그 해답은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그린 경제’로의 전환에 온 힘을 쏟아붓는 ‘절박한 집중력’이다. 팬데믹에 대응한 미국 등 국가의 백신 개발 과정이 이를 모범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팬데믹 초기만 해도 코로나 백신을 만들어 내는 데는 최소한 4년, 길면 10년 정도가 걸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동안 경험에 근거한 예측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백신이 나온 것은 불과 11개월 만이었다. 이처럼 놀라운 성과는 어떻게 실현 가능했을까? 핵심적인 요인은 정부와 기업, 그리고 연구기관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찰떡궁합’의 긴박한 공조 체제를 가동한 데 있다. 주요국 정부는 연구 개발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다. 통상 30일이 걸리는 백신 후보 접종을 채 일주일도 못 돼 허가하는 등 규제의 문턱을 크게 낮춰줬다. 미리 대량구매를 약속해 기업의 리스크도 줄여줬다. 한결 부담이 준 기업들은 연구 및 의료 인력들과 함께 개발 일정을 앞당기는 순발력을 보였다. 그 결과 백신 초고속 출시라는 역사적 기록이 세워졌다.
불리한 여건에서 시간에 쫓기고 있는 만큼 한국 경제의 그린 혁신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탄소감축은 현재 활용 가능한 기술로 실현되겠지만, 그 이후부터 2050년까지는 첨단 배터리 등 연구 개발 중인 기술이 상용화될 것이고 감축에 대한 신규 기술의 기여도는 5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그만큼 기술 개발이 탄소중립 달성 여부를 좌우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세계적으로 청정 기술 개발에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각국 정부의 투자 규모는 미국 1870조원, EU 1320조원, 일본 178조원에 이르고 있다. 이와 별도로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 8월 빌 게이츠가 만든 ‘에너지 혁신 벤처’와 15억 달러 규모의 투자 제휴를 발표했다. 목표는 녹색 수소와 지속 가능 항공연료 등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것이다. 탈탄소 에너지 전환에 투입된 글로벌 투자 자금도 지난해 한 해에만 50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 지난 2013년부터 2020년 사이에 기후 기술에 대한 전 세계 벤처투자금액은 스타트업 자금조달액보다 다섯 배나 빠르게 증가해왔다. 미국만 해도 올 들어 이 자금이 600억 달러로 이미 지난해 실적 360억 달러를 크게 넘어섰다.
결국은 돈이다. 선제적 역할은 정부의 몫. 탄소 저감과 대체에너지 등 미래 기술 개발에는 대규모 연구 개발 투자가 필요한 만큼 정부가 이를 앞장서 주도해야 한다. 민간을 선도하는 ‘기업가형 정부’의 지혜와 과감한 실행력이 긴요하다.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과 에너지 사용 절감에 대한 인센티브 지급 등을 통해 기업이 큰 부담 없이 총력전에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필요하다. 대한상의는 이와 관련해 2030년 NDC 달성을 위해 필요한 기술과 설비를 ‘신성장 원천기술’로 인정해 세액공제를 우대하고 금융지원을 해줄 것을 제안했다.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은 기후와 환경에 관련된 조급한 규제를 절제해야 한다는 것. 산업연구원은 “혁신 기술의 확보는 미래에 가능한 일이기에 당장 과도한 규제는 기업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업의 현실적인 여력을 고려해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규제 도입이나 강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혁신은 절박할 때 꽃을 피워왔다.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에 전화기에서부터 나일론, 비행기에 이르는 기술적 진보가 이뤄진 게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이런 성취는 자동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얼마만큼 절실하게 문제에 접근하고, 신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민관 합심(合心)의 토양과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해낼 수 있느냐가 열쇠를 쥐고 있다. 탄소중립. 피할 수 없는 길이다. 한국 경제가 그린 혁신의 퍼스트 무버로 앞장서 명실상부한 ‘청정(淸淨) 산업 선진국’으로 대변신하는 선도적 잠재력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 새롭게 도약하려면 기존의 한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말은 늘 진리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