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이야기] 태광산업 '엘라핏', 이임용 회장의 도전정신이 만든 국내 최초 스판덱스

2021-09-12 06:00

1979년 국내에서 스판덱스를 생산하는 곳은 태광이 유일했다.

전량 비싼 수입산에 의존했던 스판덱스를 저렴한 가격에 내놨음에도 당시 국내 최대 란제리 기업인 신영나일론과 남영나일론은 태광의 스판덱스를 외면했다. “다른 업체가 태광 제품을 쓰면 우리도 쓰겠습니다.” 매번 같은 대답뿐이었다.

“제일 규모가 큰 신영부터 공략하게. 그러면 다른 회사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걸세. 영업부는 이것 외에 다른 보고는 하지 말게.”

태광그룹 창업주인 고(故) 일주 이임용 회장의 지시였다. 영업부는 제품에 하자가 있다면 몇 배로 보상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신영은 이를 수락했다. 해당 계약은 지금의 스판덱스 브랜드 ‘엘라핏’을 있게 했다.

10일 태광그룹에 따르면 섬유·화학 계열사 태광산업은 지난 2일 42년간 이름이 없었던 스판덱스 제품에 '엘라핏'이라는 브랜드를 부여했다.

엘라핏은 탄력을 의미하는 ‘엘라스티시티(ELASTICITY)’와 수축성을 의미하는 ‘핏(FIT)’의 합성어로 태광산업과 대한화섬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실시해 선정됐다. ‘필 유어 무브먼트(Feel your movement, 너의 움직임을 느껴봐)’라는 스판덱스의 가장 큰 특성인 탄성, 탄력을 담은 슬로건을 갖고 있다.
 

9월 1일부터 3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프리뷰 인 서울 2021(PSI 2021)'에 자리한 태광산업 '엘라핏' 전시관. [사진=태광산업 제공]


1978년 초 기술제휴선인 일본 도요보사의 공장을 돌아본 이기화 태광 부사장은 이 회장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스판덱스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회장은 “스판덱스? 좋지!”라며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사업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광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모든 임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스판덱스는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당시 우리 기업들의 수준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용 브래지어와 거들, 수영복 등에 섞어 짜는 용도로 들어가는 스판덱스는 당시 아크릴 원사가 1kg에 2~3달러인 데 비해 30달러 이상을 호가했다. 국내 기업은 전량 수입에 의존했는데 이마저도 관계부처는 물론 수입기업마저 정리한 자료가 없어 수요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스판덱스를 만들기 위한 기술이전 과정도 난해하기만 했다. 든든한 동반자인 줄 알았던 도요보사는 태광이 여러 차례 기술이전을 요구했는데도 단칼에 거부했다.

이 부사장은 묘수를 썼는데, 이탈리아에 들른 후 오사카의 도요보사 본사로 가 경영진에게 “듀폰사와 기술이전 합의를 하고 오는 길이다. 도요보사의 입장을 들어보려고 왔다”는 거짓말을 한다. 거액의 기술이전 비용이 아쉬웠던 도요보사는 기술이전을 하기로 했다.

도요보사와 스판덱스 기술계약을 체결한 이 회장은 곧장 울산공장 내에 일산 1톤(t) 규모의 스판덱스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다음 해인 1979년 2월에 바로 나왔다. 시제품 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기술도입부터 생산까지 걸린 기간은 1년이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신영나일론에 스판덱스를 공급하기 시작한 태광은 곧바로 증설에 나섰다. 세계적 오일쇼크의 여파로 기업들이 생산량을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증설에 대한 경영진의 반대가 거셌다. 하지만 이 회장은 증설을 강행했다. 이미 일본 설비 기업에 기계 주문을 마친 만큼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사실상 억지로 추진한 증설이었지만 태광은 해법을 찾았다. 해외시장 모색에 나선 것이다. 가장 먼저 주목한 회사는 대만의 수영복 등 레저용품 전문업체인 유타이(瑞泰)였다.

태광은 신영에 스판덱스를 공급했던 때와 같이 샘플과 함께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유타이도 태광의 제품을 쓰기로 한다.

유타이는 기존에 도요보사의 스판덱스를 사용했는데 해당 계약을 계기로 태광이 기술이전사를 추월하게 됐다. 태광은 유타이사를 발판으로 유럽 시장에도 진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광은 듀폰사에 이어 세계시장 점유율 17%를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2위로 우뚝 섰다.

스판덱스는 2000년대까지 태광에 달러 뭉치를 안겨주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한 스판덱스 사업은 1984년 이후로 태광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스판덱스의 성공은 외적으로 태광의 도전정신을 떨치고, 내적으로 기술발전의 큰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 회장은 스판덱스를 성공시킨 경험을 토대로 탄소섬유, 나일론 시장에 차례로 진출해 태광을 종합섬유메이커이자 섬유산업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만들었다.

특히 뒤늦은 나일론 사업 진출은 스판덱스와의 동반상승 효과가 컸다. 나일론 덕분에 스판덱스의 품질도 향상되고, 매출도 많이 늘어났다.

탄탄한 재무구조는 물론 외형적으로도 성장을 거듭한 태광은 1990년대 들어 매출액 기준 재계 서열 15위까지 올라갔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부재로 인해 지난해 기준 49위까지 재계 순위가 하락했지만 스판덱스는 여전히 태광그룹의 주력 사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태광산업은 현재 중국 상숙에 위치한 태광화섬유한공사에서 스판덱스 연간 3만2000t을 생산하고 있다.

이 회장은 “의식주의 하나인 의류 산업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네. 한국 사람은 섬세하므로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지. 남들보다 우위의 설비를 유지하면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걸세”라며 스판덱스를 포함한 섬유사업에 대한 자신의 경영 철학을 임직원들에게 꾸준히 강조해왔다.

이제는 엘라핏으로 불리는 태광산업의 스판덱스는 타사 제품보다 신축성과 탄력성이 뛰어나 다양한 용도의 원단에 적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온 염색과 열처리가 가능하고, 가공 후에도 높은 탄성을 유지해야 하는 수영복과 스키복, 등산복, 요가복 등 운동복 원단으로 주로 사용된다.

태광그룹은 자사 의류용 섬유(아크릴, 나일론, 방적사, 스판덱스, 폴리에스터) 중에서 스판덱스에 대해서만 개별 브랜딩 전략을 시작했는데 이는 지금의 태광을 만든 스판덱스의 위상을 회복하고 나아가 초심으로 돌아가 태광을 재건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태광그룹 관계자는 “스판덱스에 대한 브랜딩 전략을 취한 것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도 있지만 태광 섬유사업의 시작과 같은 스판덱스의 상징성에도 집중했다”며 “엘라핏은 대외적으로는 품질 향상을 위한 태광산업의 의지를 보여주고 내부에서는 이임용 회장의 도전정신을 기리는 상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광그룹 창업주 일주 이임용 회장. [사진=태광그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