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승려도 제주도까지 귀양을 가야했다

2021-08-09 10:42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제주 문화사에 관한 한 전문가급 수준을 자랑하는 도반이 안내하는 곳을 따라 갔다. 외길이다. 큰길에서 핸들을 꺾고서 들어가는데 이내 안 쪽에서 차 두 대가 줄을 지어 나온다. 동네주민으로 보인다. 할 수 없이 우리일행이 탄 차가 뒷걸음질 쳤다. 일단 숫자에 밀렸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허’자 번호를 단 외지인이 아니던가. 뒷바퀴가 아스팔트 도로에 닿는 순간 우리를 밀어붙이던 두 대의 차는 각각 큰길 좌우로 방향을 달리하며 렌트카를 포위하듯 빠져 나간다. 혹여 또 다른 차가 나올세라 속도를 더했다. 목적지 외길 한 켠에 차를 세웠다.

절 입구의 검은 직사각형 표지석에 기계체 글씨로 ‘도림사’라고 새겼다. 이제부턴 겨우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산길이다. 네모형으로 깎은 세줄의 현무암 바닥돌을 따라 걸었다. 좌우에는 자연석 현무암을 생긴 그대로 줄지어 난간삼아 세워 놓았다. 민가같은 소박한 절은 이미 빈절이다. 1930년대 이 절을 창건한 오춘송(1907년생) 노장님이 돌아가신 뒤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 문을 닫은지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숲 그늘에 덮혀있는 계단에는 군데군데 이끼가 끼었고 여기저기 흩어진 채 서있는 자그마한 비석 몇 기가 지난 시절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길도 없다. 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손으로 제껴가며 한 발 한 발 큰걸음질을 했다. 얼마 후 묵정 밭이 나타난다. 밭 아래쪽에 푸른 빛깔의 좀개구리밥으로 완전히 뒤덮힌 열 평 남짓한 샘물못이 보인다. 목적지인 ‘절새미터’다. 절은 사찰을 의미하고 새미는 샘의 사투리이며 터는 허응보우(虛應普雨1515~1565)국사 유배와 관련있는 곳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애월읍 어도오름에서 섯오름이라 불리는 서쪽 봉우리 남서중턱 지점이다. 1924년 발행된 월간잡지「불교」제4호에 구산인(龜山人)이 쓴 ‘영주(瀛州제주)기행’에 보우대사의 열반지가 ‘어시오름’이라고 나온 것이 유일한 기록이다. 현재 어시오름이란 지명은 없다. 어도오름과 섯오름이 합해지는 이 곳을 말한 것일까? 어쨋거나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보건데 ‘열반지’란 다비장(화장장)일 것이다. 물론 화장장을 관리하던 초막같은 암자도 있었을 것이고.

“1565년(명종20년) 6월 25일 보우(普雨)를 제주에 귀양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공식기록이다. 거듭되는 유생들의 처형상소에도 불구하고 명종임금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특히 “보우를 극형에 처하면 문정황후의 혼령이 편치 않을 터인데 이는 아들 된 도리를 크게 잃는 일이다”라고 설명까지 했다. 사실 왕은 효자였다. 그래서 이율곡(1536~1584)이 유배를 보내자는 중재안을 내놓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실록 10월14일자 기록에는 ‘이후 다시 이 일을 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조정의 기록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형편은 달랐다. 사헌부 보고서에 따르면 ‘보우가 남쪽으로 귀양갈 때 그가 지나가는 길의 고을 수령들이 서로 뒤질세라 공경히 대접했고 그와 마주하여 식사까지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작 유배지를 관할하는 제주 목사 변협(邊協1528~1590)은 결코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였다. 그는 국사가 유배오기 일년 전에 제주 목사로 부임했다. 절집에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그가 경기도 과천현감 시절 인사청탁을 위해 강남 봉은사를 찾아 갔다. 그러나 당시 실세이던 국사가 만나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변소 앞에서 나타날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겨우 상면했으나 민망한 얼굴로 돌아서야 했다. 이런 악연 때문인지 결국 장살(杖殺 매를 쳐서 죽이는 형벌)했다. 중앙정부에서 내린 유배형을 지방관리가 임의대로 변경한 명백한 직권남용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국인(國人)이 죽인 것이지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그 말은 결국 여론에 따라 죽였다는 의미가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유배성지가 되었고 이제 우리처럼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더러 있겠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비공식적 구전 성지에는 아무른 기념물도 없는 헛헛한 상태 그대로다.

유배생활의 시작은 조천포(朝天浦)였다. 제주 땅에 첫발을 내딛는 항구이기 때문이다. 제주관아도 멀지않다. 현재 조천읍(邑)에 있는 고관사(古觀寺) 인근 '불사리탑사'에 1991년 순교비(법운 이종익 거사 지음)를 세웠고 2007년 동상을 건립했다. 또 2005년에는 시문집인 『허응당집』을 한글로 번역하여 전국에 두루 배포했다. 고관사 도림스님이 노력한 결과다. 부연하자면 이 문집은 국사 열반 후에 제자 태균(太均)이 엮은 것으로 사명(四溟1544~1610)대사가 발문(跋文 책 마지막에 붙인 글)을 썼다. 1959년 일본 나라현 천리(天理덴리)대학 아야사토(ぁやさと)연구소에서 발간한 영인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문정왕후(1501~1565) 윤씨는 불교가 조선왕실과 나라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여장부였다. 살얼음판 같은 궁중의 삶은 종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이기도 하다.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늘 기도했다. 두 사람은 조선불교를 회생시키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보우스님은 일머리를 제대로 알았다. 시스템을 갖추었다. 승과고시를 부활하여 15년동안 5회에 걸쳐 150명의 인재를 발탁했다. 그 속에는 뒷날 고승이 된 서산 · 사명 · 부휴대사도 포함되어 있다. 국가에서 승려자격을 인정하는 도첩제의 엄격한 운영을 통해 기존승려의 질도 함께 높였다. 이후 불교교단은 제자리를 찾았고 임진란 때 조직적인 승군의 활약으로 전란극복에 기여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혹독한 댓가를 치루었다. 유교국가의 성리학 이념에 반하기 때문이다. 갖가지 모함과 이단논쟁에 바탕을 둔 격렬한 상소가 빗발쳤다. 결국 문정왕후가 세연(世緣세상 인연)을 다한 뒤에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거기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임종게(臨終偈 유언)는 당신이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했던 시대적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홀가분한 심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환인내입환인향(幻人來入幻人鄕)하야
오십여년작희광(五十餘年作戱狂)이라
농진인간영욕사(弄盡人間榮辱事)하니
탈승괴뢰상창창(脫僧傀儡上蒼蒼)이로다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에 들어와
50년이 넘도록 미친듯이 장단을 쳤구나.
인간세상의 영화굴욕의 일 모두 치루고서
허깨비 승려의 몸 벗어나 푸른 하늘로 오르도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