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이단이라 부르지 말라…다르면서도 같은 것 많다

2021-07-21 17:02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㉗ 김성언 총무<下·시리즈 끝>

성경에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많다. 하느님이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했다는 창세기라든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탈출할 때 바다가 갈라졌다든가, 예수가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했다든가···.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비교종교학과 명예교수는 이것을 신화적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던데요. 선악과도 신화적 상징으로 봐야지, 문자 그대로 푸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
“정확한 지적입니다. 신구약에 정통한 정양모 신부도 창세기는 신화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부가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말씀이죠. 신화적인 입장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신화로 인정을 한다면, 종교 간 혹은 교리 간 갈등이 없을 텐데요. 그것을 문자적으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다 보면 과학이 첨단으로 발달한 21세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잖아요. ”
-다석은 박영호 선생이 문화일보에 글을 쓰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장자의 성인무명(聖人無名)을 실천하려는 정신 때문이었나요?
“다석은 장자의 성인무명을 의도적으로 실천하진 않았어요. ‘이름’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었지요. ‘이름’이란 필요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 이름을 내려고 할 필요가 없지요. ‘이름’에 대한 다석의 말은 이렇습니다.
‘생명은 고정할 수가 없다. 고정하면 죽는다. 발전해가는 것에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은 고정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벌써 다른 것으로 바뀐다.’(다석어록)
이렇게 ‘나는 이름이 없다’고 선언했어요. 성인무명(聖人無名)이 저절로 된 것입니다. 또한 ‘이름’에는 이르름(至)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지요. 이름만 불러가지고는 쓸데없다는 겁니다. 하느님 앞에 가고, 가고, 가고 해서 거기 가서 이루는 거, 거기 도달하는 거, 그걸 말하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 하느님의 이름만 불러가지고 나는 참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실제로 거기에 다다라 이루어야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거라고 다석은 말했습니다.”

   다석 묘소를 찾은 김성언 총무.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적연이일망(的然而一亡) 암연이일장(暗然而日章)이라고 했는데요. 뚜렷하게 있는 것은 나날이 망해버리고, 캄캄하고 암담한 것은 나날이 빛난다는 뜻이죠. 김 총무는 지금 쓰고 있는 책에서 다석 사상이 바로 암연이일장이라고 했던데요. 이것은 “어둠이 분명히 빛보다 크다”는 다석의 말과도 통하는가요?
“다석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참을 찾아 그 참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말인데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중용에 있는 ‘적연이일망 암연이일장’ 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은 다 드러나 있어 바로바로 보고 알 수 있지만 그것은 겉모습만 볼 뿐 속은 모르지요. 겉은 분명히 좋아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해 나빠지게 됩니다.
붓다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모든 상대적 존재)에서 몽환포영(夢幻泡影: 꿈, 허깨비, 거품, 그림자)이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다석사상은 처음엔 어려워서 캄캄하게 생각되지만 공부해 갈수록 조금씩 혜안이 생기고, 삶에 힘이 되며 빛이 비취는 것 같은 희망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어둠이 분명히 빛보다 크다’는 다석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석은 “나는 공부를 안 해서 한글 맞춤법을 모른다”고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훈민정음에 관심이 많아 국어학자 이정호와 함께 연구를 했지요. 한글을 뜻글자처럼 활용하기도 하고요. 재야학자 서상덕의 저서 ‘국문철자법’ 출판비용을 대줬는데요. 서상덕이 책에서 ‘다석이 땅을 팔아 출판비를 만들어주셨다’고 칭송했더군요. 다석의 공익을 위한 기부 정신과 한글사랑이 드러나는 일화지요.
“다석의 훌륭한 점은 불교계가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마음과 ᄆᆞᆷ을 뚜렷이 구분해 준 것과 표음문자(表音文字)인 한글을 표의문자(表意文字)처럼 살려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과 ᄆᆞᆷ을 가려서 쓰고 싶습니다. 마음이란 상대적인 세상에 욕심을 붙여서 조금 약게 영생하는 데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ᄆᆞᆷ이란 모든 욕심 다 떼어 버리고 자신을 세워나가겠다는 것이죠.
지극한 한글 사랑으로 천부경, 노자, 중용, 반야심경등을 순 우리말로 풀어 놓으셨지요. 지식인들이 자기가 아는 외국어로 표현하면서 지식을 뽐내지만 다석은 하느님이 준 선물인 우리말을 살려나가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말 ‘오늘’은 오! 감탄사와 ‘늘’이라는 영원을 뜻하고, ‘아침’은 아! 처음이며, ‘기쁨’은 기가 하늘에서 뿜어져 나옴이고, ‘사람’은 (말씀을) 사뢰는 이, ‘사나이’는 산 아이, ‘고맙다’는 고만하다, ‘모름지기’는 모름을 지키는 이….
서상덕 선생의 책 서문에 다석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천우신조하시와 이번에 자하문 밖에 계신 류옹(柳翁)께서 땅을 팔아 출판비를 만들어 주셔서 다행히 이 <국문철자법>의 책자를 내놓게 되오니 여러 동포들과 함께 기뻐하며 열 번 절하고 지성으로 류옹께 감사합니다.’”

황호택 논설고문(왼쪽)과 대담하는 김성언 총무.[사진=윤영은 기자]


-땅을 팔아 <국문철자법> 비용을 대준 일화에서도 드러나듯이 다석의 돈철학이 남다른 것 같아요. 다석은 종로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아버지의 권유로 장사도 했지만 재산이나 돈에 대한 애착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석 선생과 이현필 선생 사이에 있었던 미담(美談)을 동광원의 김준호 선생이 ‘이현필’이라는 책에서 써놓았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빛고을 광주에서부터 걸어서 서울 삼각산 밑에 있는 다석 집을 찾아갔다. 한 달 이상이 걸리는 길을 갈아입을 옷도 없이 흰 옷 한 벌로 다석 집에 도착했을 때는 흰 옷이 까맣게 때가 묻었고, 땀을 흘려 머리도 미친 사람 마냥 덥수룩한 모습이 거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다석은 이현필 선생을 보자마자 맨발로 뛰어나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 주듯이 꼭 안아 주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옷을 갈아 입히고 사모님 한 테 옷 빨라고 내놓고 길가에서 거지를 안아다가 목욕을 시키듯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는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또 옷을 빨고 말려서 다시 입을 때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일주일 후에 이현필 선생이 떠난다고 하니 다석은 신문지에 돈 뭉치를 싸서 내주시면서 이걸 가지고 가서 쓰세요라고 했다. 그 돈은 다석이 30년간 십일조를 모은 것이라고 사모님이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은 그 돈을 자신을 위해서나 동광원을 위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내려오는 길에 대전 목포 부산등지를 돌면서 어려운 가정에 한 뭉치씩 떼어주고 빈손으로 광주로 돌아왔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30년간 모은 십일조를 서슴없이 내놓는 다석의 모습 속에서 참사람(眞人)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다석은 돈이란 남이 빌리러 오면 빌려줄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하시면서 재물부자보다는 마음부자로 살고 싶어했지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마음부자로 사는 것인 줄은 한동안 몰랐어요. 그러다 무릎을 딱 치는 다석의 글을 만나게 되었지요.
‘마음 그릇을 가지려거든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가지세요. 우리 마음이란 지극히 큰 것으로 마음을 비우면 허공(하늘나라)이 그 안에 들어옵니다.’
마음속에 하늘나라가 들어오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부자로 살고 싶은 분들은 마음을 비우면 되지요. 마음이란 끊임없이 비워 나가야 조금씩 비워집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면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에 매여 살기 때문에 부자유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석은 매임과 모음을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사람에게 매이려 하고 재물을 모으려 하는 매임과 모음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 세상을 죄다 잔뜩 모아서 앉아 있으려 하여도 그렇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이 모은 것과 매이는 것을 전제로 공부를 한다면 아예 공부를 하지 말든지 해야지, 그래서 세상에 나와서 무슨 짓을 하겠는가? 매이기만 하고 모으기만 하려고 하면 영원과는 융합이 될 수 없다. 꿈 같은 이 세상에 꿈꾸듯 지나가는 것밖에 안 된다. 매이는 것과 모으는 것은 집어치워야 한다. 자꾸 매임과 모음만 찾다가는 마귀 생각에 빠지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다석어록)
-다석이 "나는 통일(統一)이 싫고 귀일(歸一)이 좋다"고 했는데요.
"단순히 이 글만을 본다면 다석은 남북통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가 오해하기 쉽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네, 그 말만 들었을 때는 다분히 그런 오해가 있을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은 죽으면 자연스럽게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귀일을 늘 강조하셨죠. 불교에서도 귀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듯이, 다석 선생님은 귀일을 가장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통일은 인위적인 힘에 의해 돌아가는데, 귀일은 자연스럽게 돌아가니까 아주 좋아하셨죠. 인위적인 통일 보다는 자연스러운 귀일(귀일(歸一))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이라고 하지요."
-다석어록에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 즉 같은 것이란 다른 것이다. 이단이라고 헤프게 부르지 말라. 자기하고 다른 것이 이단이면 자기 자체 속에 또 다른 것이 좀 많겠는가. 이 죄다가 이단일 것이다’라고 했는데요. 다석이 말한 '동야자이야'의 원전(原典)이 있습니까?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비슷한 표현이 있긴 합니다. 불능동자 즉동이이(不能同者 卽同而異·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불능이자 즉이이동야(不能異者 卽異而同也·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곧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다)란 구절이 그것입니다. 다석은 금강삼매경의 개념을 원용(援用)하고 확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함부로 이단(異端)이라고 헤프게 불러서는 안 된다. 자기하고 다른 것이 이단이라면 자기 자체 속에도 다른 것이 좀 많겠는가? 그렇다면 죄다가 이단일 것이다. 나 아니고서는 모두가 이단인 것이다. 한 가지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는 또 사뭇 다른 것은 같다는 뜻도 된다. 머리하고 발하고는 절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다르게 움직이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머리와 발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같다는 말 속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일치할 것이다. 같은 것이라도 따지면 다르고, 다른 것이라도 따지면 같은 것이 된다.'”(다석어록)
새로운 사상이란 바로 이런 이단적인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란 한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자들의 이단 사상이다.'"
‘같으면서 다르다’ ‘다르면서 같다’는 다석의 말은 이단을 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세계의 주류 종교들은 자기들의 교리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이단이라고 공격하지만 예수도 이단으로 몰려 십자가형으로 처형을 당했다. 거기서 나온 종교가 지금은 서양문명의 주류인 기독교가 되었다.

 김성언 총무는 다석의 해혼(解婚) 정신을 실천해 아내를 '안해'라고 부른다. 


-다석어록에 ‘예수는 가정에 갇혀 살지 않았다. 유교는 가족주의로 망했다. 자신과 자기 식구들만을 위해 잘사는 것은 짐승의 종족 보존과 다를 바 없다’고 했는데요. 다석의 표현 중에서는 강도가 센 것 같습니다.
“석가 예수는 가정을 초월했지만 유교는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가족주의로 망했다고 다석은 말했지요. 짐승이 종족 보존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사람은 종족 보존을 뛰어넘어 진리 보존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만 사람들이 짐승 같이 식색(食色)으로 살다보니 진리 보존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고 바쁘다는 핑계로 ‘진리’라는 단어는 잊어버린 지 오래된 낯선 단어가 되어버렸지요. 소수의 사람만 그 뜻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수천 만명의 신앙인과 교인들이 있지만 ‘진리 보존’에 사명감을 갖고 사는 신앙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가족을 초월한 석가 예수의 진리정신을 이어받을 것인가,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가족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중요한 갈림길에 있어요. 짐승의 목적이 종족 보존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사람의 삶의 목적이 진리 보존이란 말은 학교나 교회 성당 사찰 등 사회 어디에서도 들어 본적이 없어요. ‘짐승은 종족 보존, 사람은 진리 보존’이라는 다석의 말은 짐승과 사람의 역할을 가장 뚜렷하게 구분 짓는 말이 아닐 수 없지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겨우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만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단지 종족 보존에 불과하지요. 물론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사람들이 식색(食色)의 맛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아요. 식색(食色)이란 짐승이나 사람이나 공히 갖고 있는 본능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삶의 본능에만 충실하다면 ‘참사람’이라 할 수 없어요. 사람에게는 본능을 넘어설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식색(食色), 즉 종족 보존을 넘어 진리 보존을 목적으로 삼아야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석의 말이 이 사회에 두루두루 퍼져 각성(覺醒)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진리 보존’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해서 각자의 영성(靈性)이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다석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91살 장수를 했는데요.
“다석처럼 철저하게 몸을 살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에 몸성히에 열심이셨지요. 의사가 30살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무려 91살을 사셨으니 몸이란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요. 다석은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이중으로 갇힌다고 했어요. 그래서 삶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요. 다석의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를 다석의 삼보(三寶)라고 부르고 싶어요. 다석이 우리 겨레에게 물려준 정신적인 유산인 삼보(三寶)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건강하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걷기, 요가체조, 냉수욕을 통하여 몸성히를 이루고, 맘놓이를 통해 마음을 비우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나’란 무아(無我)로 빔을 느끼게 되지요. 그리고 몸성히 맘놓이를 이룬 다음에는 생각을 토대로 자신의 밑둥을 깊이 파고 들어 하느님이 주신 바탈(性)을 타고 하늘나라로 들어가 ‘얼생명’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김 총무에게 다석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는, 종교의 교리로부터 해방감과 자유함을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대(代)를 이어 찾을 것은 ‘참’ 하나뿐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그 말에 가장 깊이 감동을 받아서 제 인생관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참을 찾아서, 그 참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저의 모토가 되었습니다.”<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 이주영 인턴기자>
 ※ '내가 본 다석, 내가 들은 유영모'는 모두 12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해 27회에 걸쳐 연재를 했습니다. 이 릴레이 인터뷰는 오늘로 마치고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