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35] 대마도는 1870년대까지 한국의 속령 스모킹건 12선
2021-06-30 06:00
1438년 일본에서 보내온 일본전도에 누락된 대마도
대마도는 조선에 귀부해 대대로 충심을 다해옴
예로부터 대마도에 감독관 보내…죄가 있으면 문책도
대마도는 조선에 귀부해 대대로 충심을 다해옴
예로부터 대마도에 감독관 보내…죄가 있으면 문책도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 1949년 1월 7일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어 있다(對馬島隷於慶尙道) 모든 보고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라. -『세종실록』 1420년(세종2년) 2월15일(양력)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대마도 반환 촉구를 천명하였다.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쳐온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이를 무력 강점하였으나 결사 항전한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들의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같은 달 18일, 31명의 제헌의원들은 연명으로 ‘대마도 반환촉구결의안’을 국회 본회의에 제출해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것을 요구했다.
1870년대까지 대마도가 한국령이라니.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이자 국제법과 외교전략의 대가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풀림이 아닐까?
필자는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대마도 관련 동서고금의 문헌을 살펴봤다. 우선 『조선왕조실록』(1392~1910년) 4965만자를 샅샅이 살펴본 결과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직·간접 증거 630여건을 확보했다. 지면 관계상 12건만 선정 소개하겠다.
[증거1] 1419년(세종1년) 6월9일 :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 대마도 정벌 직전 태종의 교시
상왕(태종)이 대마도를 정벌할 것에 대해 중외에 교시하기를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하략)”
[증거 2-1] 1420년(세종2년) 윤1월 10일 : 대마도 도주, 대마도를 조선에 귀속하게 해달라 요청
대마도의 도도웅와(都都熊瓦; 대마도 도주)의 부하 시응계도가 와서 웅와의 말을 전달하기를,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니, 바라옵건대, 대마도 섬 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 거제도) 등 섬에 보내어 바깥에서 살게 하도록 보호해주십시오 귀국은 사람들을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세금을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어 쓰게 하옵소서.
한편 만일 우리 섬(대마도)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관인)을 주신다면 반드시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1)*
[증거 2-2] 1420년(세종20년)윤 1월 23일 :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돼 있으니 대마도의 모든 사정은 경상도 관찰사에 보고할 것 -대마도 도주의 대마도를 조선에 귀부 청원에 대한 승락
예조 판서 허조에게 명하여 도도웅와의 서한에 답서하게 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너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깨달아서,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알았으며, 돌려보낸 인구(人口)와 바친 예물은 이미 자세히 위(세종대왕)에 아뢰어 모두 윤허하심을 받았으니, 실로 온 섬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對馬島隷於慶尙道),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상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예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다. 근래에 너희의 대관과 만호가 각기 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성의를 표시하니, 그 정성은 비록 지극하나, 체통에 어그러지는 일이다. 지금부터는 반드시 대마도주 네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받아 가지고 와야만 비로소 예의로 접견함을 허락하겠노라." 하였다.(2)*
[증거3] 1438년(세종20년)2월 19일: 일본에서 보내온 일본 전도에 대마도가 누락
상세하게 표기된 일본국 전국 지도에 오직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 두 섬이 빠져있었다.
[증거4] 1447년(세종 29년)5월 6일: 대마도 경차관(3)* 조휘가 대마도주에게 명령
대마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보냈던 전직 병조 좌랑 조휘(曺彙)가 와서 복명하기를, 임금이 하사하시는 물건과 예조의 서간을 가지고 대마도에 이른즉, 대마도주 종정성이 밖에 나와 마중하여 대청으로 들어가서 북향하여 꿇어앉아서 서간을 받아 탁자 위에 놓고, 향을 올리고 물러나서 세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마치고, 사례하기를, ‘전하께옵서 특별히 관원을 보내시어 물건을 후하게 하사하시니, 오직 저의 기쁜 경사가 될 뿐이 아니오라, 여러 사람의 보고 듣기에 또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오며, 감사하온 심정 비할 데가 없나이다.’ 하기에,
조휘가 명하기를, ‘고초도에서 고기를 낚는데 약속을 어긴 자는, 모름지기 치죄하고, 다른 섬들에는 왜인으로 고기잡이를 허가해 내보내지 말 것이며, 또 대마도에서 한 해에 왕래하는 배는 50척을 넘지 못하게 하라.’ 종정이 답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초도에서 고기 낚는 자는 이미 금하는 약속을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시 어기는 자가 있을 것이온즉, 내 장차 추궁하여 치죄하고 세금을 받아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증거5] 1474년(성종 5년)10월 6일: 대마도 도주, 모든 대마도는 조선의 신하
대마주 태수 종정국이 성종 황제 폐하에게 조공을 바치며 "공손히 생각건대 (성종)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거룩한 지위의 높음이 더욱 튼튼하시고, 거룩한 수명의 길기가 더욱 장구하시기를 극진히 축원하옵니다. 모든 대마도 한 주(州)가 귀국의 신하가 아닐 수 없습니다(大凡對馬之一州, 無非貴國之臣).
[증거6] 1494년(성종 25년) 3월 26일: 대마도는 조선에 귀부하여 대대로 충심을 다해왔음
귀도(대마도)는 우리나라에 귀부(歸附)하여 대대로 충심을 다하는 것이 더함은 있고 쇠함이 없으므로 우리 전하께서도 한집안처럼 보고 어루만져 사랑하기를 더욱 도탑게 하였다. 지금 이 무뢰한 무리들이 도둑질을 자행하니, 우리나라에 죄를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족하(대마도주)가 깊이 부끄럽게 여기며 엄하게 바로잡아야 할 바이다. 이후로 만약 다시 이와 같이 교화에 막힌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먼저 잡아다 죄를 다스린 뒤에 귀도에 유시할 것이다.
[증거7] 1544년(중종39년)3월 21일: 대마도주는 조선에 귀순한 사람
상(중종)이 이르기를, "이번에 사량진에서 변방을 침범한 왜인들을 대마도주를 시켜서 잡아보내도록 한다면 거짓 꾸미는 짓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한 혹은 공로를 내세울 수도 있다. 다만 대마도주는 우리나라에 귀순한 사람이니 이번에 마땅히 서계를 만들어 깨우치기를 ‘이번에 왜인들이 크게 군사를 출동시켜서 성을 함락하려는 술책을 부렸는데 네가 도주(島主)이면서 어찌 알지 못했겠는가.’고 하여, 엄중한 말로 책한다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크게 2백여 인이나 출동시켜 바다를 뒤엎어 입구(入寇)했으니 도주가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도주는 귀순한 지 이미 오래이고 국가의 은덕이 매우 중했으므로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증거8] 1577년(명종12년)2월 9일: 예로부터 대마도에 감독관을 보냈고 대마도에 죄가 있으면 군사를 일으켜 문책
대마도는 옛날 계림(鷄林, 신라)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 섬의 무리들은 대대로 우리나라의 길러주는 은혜를 받아왔기 때문에 일본에는 통신사를 보냈었고 대마도에는 경차관(감독관)을 보냈다. 대마도에 죄가 있으면 군사를 일으켜 문책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신을 보내왔을 적에는 한편으로는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굳히고 한편으로는 정성을 바치는 마음을 허락했다.
[증거9] 1705년(숙종31년)12월 5일: 대마도 도민은 조선의 변방의 백성
대신 윤지완은 보고하기를, "신(臣)이 왕년에 일본으로 사명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이르러 통사왜(通事倭)에게 묻기를, ‘이 섬의 형세로 보아 곡식을 생산할 땅이 없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사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선의 쌀을 얻기 전에는 자식을 낳은 자가 그 자식이 자라가고 굶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곧 죄다 물에다 던졌는데, 지금은 자식을 낳으면 다 키우므로 섬 안이 이 때문에 번성한 겉 모습이 왜인이기는 하나 실은 조선의 변방의 백성(邊民)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증거10] 1809년(순조 9년)12월 2일: 대마도민의 세금을 조선에서 징수, 대마도의 모든 의식주 조선에서 지급.
대마도의 민호는 1만 5천여 호이고 전세(田稅)는 가죽과 잡곡으로 받는데 모두 3만여 표가 되고, 우리나라에서 하사하는 공작미(工作米)(4)*와 콩까지 아울러 2만여 석이 된다. 모든 대마도가 먹고 사는 것을 오로지 우리나라에 의존하고 있는데, 해촌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호에 따라 배를 지급하여 주고, 산촌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구마다 총을 지급하여 생활하게 한다.
[증거11] 1849년(철종 원년)11월 2일: 19세기 중엽 여전히 대마도는 조선에 조공을 바쳤음.
조선에 조공물을 바치려온 대마도 사신(差倭)에게 공작미(대마도주가 바친 조공물에 대해 하사하던 쌀)를 5년내에 갚으라고 명하였다. (命差倭公作米, 更許五年退限)
[증거12] 1876년(고종13년) 1월 20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 조약-강화도조약 체결 이전1875년 이전까지 대마도는 경상도 동래부의 관할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무진년(1868 명치유신) 이후 우리나라(일본) 제도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이웃 나라에 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신을 시켜 공문을 가지고 동래부에 가서 만나줄 것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요시오카 히로타케·히로쓰 히로노부와 함께 신미년(1871)에 동래부를 거쳐 서계를 바치려고 하다가 또 바치지 못하고 그때 부득이 구두로 진술한 문건은 두고 돌아왔습니다. 귀국(조선)에서는 단지 종전의 규례(경상도 동래부사를 통하여 보고)를 따르려고 하지만, 우리일본에서는 종전의 제도를 크게 고치고 대마도주도 혁파하여 이때부터는 더 근거하여 탐문할 길이 없는 까닭에 외무대승 하나부사와 함께 왔다가 또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1392년 조선 개국부터 1875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전까지 대마도가 한국의 속령이었다는 강철증거다. 따라서 1948년 1월 7일, 한국 최초의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성명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에 근거한 정당한 주장이다.
“대마도는 1870년대까지 한국의 속령” 적어도 이것 만은 이승만 대통령이 100% 옳았다.
◆◇◆◇◆◇◆◇각주
(1)*對馬島 都都熊瓦使人時應界都來傳熊瓦言曰: ‘對馬島土地瘠薄, 生理實難。 乞遣島人, 戍于加羅山等島, 以爲外護。 貴國使人民入島, 安心耕墾, 收其田稅, 分給於我以爲用。 予畏族人窺奪守護之位, 未得出去, 若將我島依貴國境內州郡之例, 定爲州名, 賜以印信, 則當効臣節, 惟命是從。
(2)*그 인장의 글자는 "종씨 도도웅와(宗氏都都熊瓦)."라 하였다. 命禮曹判書許稠, 答都都熊瓦書曰: 人至得書, 備審足下誠心悔悟, 願爲臣僕, 刷送人口, 進獻禮物, 詳已敷啓, 皆蒙兪允, 實爲一島之福。 所請諸州分置之人, 已曾優給衣糧, 使之各安生業, 島中乏食, 回還必飢。 且對馬島隷於慶尙道, 凡有啓稟之事, 必須呈報本道觀察使, 傳報施行, 毋得直呈本曹。 兼請印篆竝賜物, 就付回价。 近來, 足下所管代官、萬戶各自遣人, 奉書來款, 其誠雖至, 甚乖體統。 自今須得足下所親署書契以來, 方許禮接。其印文曰, 宗氏都都熊瓦。
(3)*조선시대 중앙 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직
(4)*대마도주가 바친 조공물에 대해 조선이 하사하던 쌀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되어 있다(對馬島隷於慶尙道) 모든 보고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하라. -『세종실록』 1420년(세종2년) 2월15일(양력)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이 열렸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대마도 반환 촉구를 천명하였다.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쳐온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이를 무력 강점하였으나 결사 항전한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들의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같은 달 18일, 31명의 제헌의원들은 연명으로 ‘대마도 반환촉구결의안’을 국회 본회의에 제출해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것을 요구했다.
1870년대까지 대마도가 한국령이라니.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이자 국제법과 외교전략의 대가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풀림이 아닐까?
필자는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대마도 관련 동서고금의 문헌을 살펴봤다. 우선 『조선왕조실록』(1392~1910년) 4965만자를 샅샅이 살펴본 결과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직·간접 증거 630여건을 확보했다. 지면 관계상 12건만 선정 소개하겠다.
[증거1] 1419년(세종1년) 6월9일 :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 대마도 정벌 직전 태종의 교시
상왕(태종)이 대마도를 정벌할 것에 대해 중외에 교시하기를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하략)”
[증거 2-1] 1420년(세종2년) 윤1월 10일 : 대마도 도주, 대마도를 조선에 귀속하게 해달라 요청
대마도의 도도웅와(都都熊瓦; 대마도 도주)의 부하 시응계도가 와서 웅와의 말을 전달하기를,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니, 바라옵건대, 대마도 섬 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 거제도) 등 섬에 보내어 바깥에서 살게 하도록 보호해주십시오 귀국은 사람들을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세금을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어 쓰게 하옵소서.
한편 만일 우리 섬(대마도)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관인)을 주신다면 반드시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1)*
[증거 2-2] 1420년(세종20년)윤 1월 23일 :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돼 있으니 대마도의 모든 사정은 경상도 관찰사에 보고할 것 -대마도 도주의 대마도를 조선에 귀부 청원에 대한 승락
예조 판서 허조에게 명하여 도도웅와의 서한에 답서하게 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너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깨달아서,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알았으며, 돌려보낸 인구(人口)와 바친 예물은 이미 자세히 위(세종대왕)에 아뢰어 모두 윤허하심을 받았으니, 실로 온 섬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對馬島隷於慶尙道),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상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예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다. 근래에 너희의 대관과 만호가 각기 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성의를 표시하니, 그 정성은 비록 지극하나, 체통에 어그러지는 일이다. 지금부터는 반드시 대마도주 네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받아 가지고 와야만 비로소 예의로 접견함을 허락하겠노라." 하였다.(2)*
[증거3] 1438년(세종20년)2월 19일: 일본에서 보내온 일본 전도에 대마도가 누락
상세하게 표기된 일본국 전국 지도에 오직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 두 섬이 빠져있었다.
[증거4] 1447년(세종 29년)5월 6일: 대마도 경차관(3)* 조휘가 대마도주에게 명령
대마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보냈던 전직 병조 좌랑 조휘(曺彙)가 와서 복명하기를, 임금이 하사하시는 물건과 예조의 서간을 가지고 대마도에 이른즉, 대마도주 종정성이 밖에 나와 마중하여 대청으로 들어가서 북향하여 꿇어앉아서 서간을 받아 탁자 위에 놓고, 향을 올리고 물러나서 세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마치고, 사례하기를, ‘전하께옵서 특별히 관원을 보내시어 물건을 후하게 하사하시니, 오직 저의 기쁜 경사가 될 뿐이 아니오라, 여러 사람의 보고 듣기에 또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오며, 감사하온 심정 비할 데가 없나이다.’ 하기에,
조휘가 명하기를, ‘고초도에서 고기를 낚는데 약속을 어긴 자는, 모름지기 치죄하고, 다른 섬들에는 왜인으로 고기잡이를 허가해 내보내지 말 것이며, 또 대마도에서 한 해에 왕래하는 배는 50척을 넘지 못하게 하라.’ 종정이 답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초도에서 고기 낚는 자는 이미 금하는 약속을 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시 어기는 자가 있을 것이온즉, 내 장차 추궁하여 치죄하고 세금을 받아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증거5] 1474년(성종 5년)10월 6일: 대마도 도주, 모든 대마도는 조선의 신하
대마주 태수 종정국이 성종 황제 폐하에게 조공을 바치며 "공손히 생각건대 (성종)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거룩한 지위의 높음이 더욱 튼튼하시고, 거룩한 수명의 길기가 더욱 장구하시기를 극진히 축원하옵니다. 모든 대마도 한 주(州)가 귀국의 신하가 아닐 수 없습니다(大凡對馬之一州, 無非貴國之臣).
[증거6] 1494년(성종 25년) 3월 26일: 대마도는 조선에 귀부하여 대대로 충심을 다해왔음
귀도(대마도)는 우리나라에 귀부(歸附)하여 대대로 충심을 다하는 것이 더함은 있고 쇠함이 없으므로 우리 전하께서도 한집안처럼 보고 어루만져 사랑하기를 더욱 도탑게 하였다. 지금 이 무뢰한 무리들이 도둑질을 자행하니, 우리나라에 죄를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족하(대마도주)가 깊이 부끄럽게 여기며 엄하게 바로잡아야 할 바이다. 이후로 만약 다시 이와 같이 교화에 막힌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먼저 잡아다 죄를 다스린 뒤에 귀도에 유시할 것이다.
[증거7] 1544년(중종39년)3월 21일: 대마도주는 조선에 귀순한 사람
상(중종)이 이르기를, "이번에 사량진에서 변방을 침범한 왜인들을 대마도주를 시켜서 잡아보내도록 한다면 거짓 꾸미는 짓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한 혹은 공로를 내세울 수도 있다. 다만 대마도주는 우리나라에 귀순한 사람이니 이번에 마땅히 서계를 만들어 깨우치기를 ‘이번에 왜인들이 크게 군사를 출동시켜서 성을 함락하려는 술책을 부렸는데 네가 도주(島主)이면서 어찌 알지 못했겠는가.’고 하여, 엄중한 말로 책한다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크게 2백여 인이나 출동시켜 바다를 뒤엎어 입구(入寇)했으니 도주가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도주는 귀순한 지 이미 오래이고 국가의 은덕이 매우 중했으므로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사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증거8] 1577년(명종12년)2월 9일: 예로부터 대마도에 감독관을 보냈고 대마도에 죄가 있으면 군사를 일으켜 문책
대마도는 옛날 계림(鷄林, 신라)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 섬의 무리들은 대대로 우리나라의 길러주는 은혜를 받아왔기 때문에 일본에는 통신사를 보냈었고 대마도에는 경차관(감독관)을 보냈다. 대마도에 죄가 있으면 군사를 일으켜 문책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신을 보내왔을 적에는 한편으로는 의를 사모하는 마음을 굳히고 한편으로는 정성을 바치는 마음을 허락했다.
[증거9] 1705년(숙종31년)12월 5일: 대마도 도민은 조선의 변방의 백성
대신 윤지완은 보고하기를, "신(臣)이 왕년에 일본으로 사명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이르러 통사왜(通事倭)에게 묻기를, ‘이 섬의 형세로 보아 곡식을 생산할 땅이 없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사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선의 쌀을 얻기 전에는 자식을 낳은 자가 그 자식이 자라가고 굶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곧 죄다 물에다 던졌는데, 지금은 자식을 낳으면 다 키우므로 섬 안이 이 때문에 번성한 겉 모습이 왜인이기는 하나 실은 조선의 변방의 백성(邊民)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증거10] 1809년(순조 9년)12월 2일: 대마도민의 세금을 조선에서 징수, 대마도의 모든 의식주 조선에서 지급.
대마도의 민호는 1만 5천여 호이고 전세(田稅)는 가죽과 잡곡으로 받는데 모두 3만여 표가 되고, 우리나라에서 하사하는 공작미(工作米)(4)*와 콩까지 아울러 2만여 석이 된다. 모든 대마도가 먹고 사는 것을 오로지 우리나라에 의존하고 있는데, 해촌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호에 따라 배를 지급하여 주고, 산촌에 사는 백성에게는 가구마다 총을 지급하여 생활하게 한다.
[증거11] 1849년(철종 원년)11월 2일: 19세기 중엽 여전히 대마도는 조선에 조공을 바쳤음.
조선에 조공물을 바치려온 대마도 사신(差倭)에게 공작미(대마도주가 바친 조공물에 대해 하사하던 쌀)를 5년내에 갚으라고 명하였다. (命差倭公作米, 更許五年退限)
[증거12] 1876년(고종13년) 1월 20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 조약-강화도조약 체결 이전1875년 이전까지 대마도는 경상도 동래부의 관할
"일본 전권 대신이 말하기를 “무진년(1868 명치유신) 이후 우리나라(일본) 제도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이웃 나라에 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신을 시켜 공문을 가지고 동래부에 가서 만나줄 것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요시오카 히로타케·히로쓰 히로노부와 함께 신미년(1871)에 동래부를 거쳐 서계를 바치려고 하다가 또 바치지 못하고 그때 부득이 구두로 진술한 문건은 두고 돌아왔습니다. 귀국(조선)에서는 단지 종전의 규례(경상도 동래부사를 통하여 보고)를 따르려고 하지만, 우리일본에서는 종전의 제도를 크게 고치고 대마도주도 혁파하여 이때부터는 더 근거하여 탐문할 길이 없는 까닭에 외무대승 하나부사와 함께 왔다가 또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1392년 조선 개국부터 1875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전까지 대마도가 한국의 속령이었다는 강철증거다. 따라서 1948년 1월 7일, 한국 최초의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성명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에 근거한 정당한 주장이다.
“대마도는 1870년대까지 한국의 속령” 적어도 이것 만은 이승만 대통령이 100% 옳았다.
◆◇◆◇◆◇◆◇각주
(1)*對馬島 都都熊瓦使人時應界都來傳熊瓦言曰: ‘對馬島土地瘠薄, 生理實難。 乞遣島人, 戍于加羅山等島, 以爲外護。 貴國使人民入島, 安心耕墾, 收其田稅, 分給於我以爲用。 予畏族人窺奪守護之位, 未得出去, 若將我島依貴國境內州郡之例, 定爲州名, 賜以印信, 則當効臣節, 惟命是從。
(2)*그 인장의 글자는 "종씨 도도웅와(宗氏都都熊瓦)."라 하였다. 命禮曹判書許稠, 答都都熊瓦書曰: 人至得書, 備審足下誠心悔悟, 願爲臣僕, 刷送人口, 進獻禮物, 詳已敷啓, 皆蒙兪允, 實爲一島之福。 所請諸州分置之人, 已曾優給衣糧, 使之各安生業, 島中乏食, 回還必飢。 且對馬島隷於慶尙道, 凡有啓稟之事, 必須呈報本道觀察使, 傳報施行, 毋得直呈本曹。 兼請印篆竝賜物, 就付回价。 近來, 足下所管代官、萬戶各自遣人, 奉書來款, 其誠雖至, 甚乖體統。 自今須得足下所親署書契以來, 方許禮接。其印文曰, 宗氏都都熊瓦。
(3)*조선시대 중앙 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직
(4)*대마도주가 바친 조공물에 대해 조선이 하사하던 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