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33] 조선의 서북국경선은 압록강 이북 60km 훈강
2021-06-11 05:00
세종이후, 만주 서남부는 직접지배, 만주 동북부는 간접통치
랴오닝 훈강이 조선 서북 국경선 증거 10선 – 조선왕조실록
랴오닝 훈강이 조선 서북 국경선 증거 10선 – 조선왕조실록
우리 태조께서 천품이 성무하시므로 대동(大東)을 모두 차지하시어 남으로는 바다까지 닿고 서북으로는 압록강에 닿고 북으로는 두만강까지 닿았다. 그래도 이적(夷狄)이 경계에 근접하여 있는 것을 염려하여 강을 건너 고난을 무릅쓰고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 친히 서방의 오랑케를 정벌하시매,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에서 위풍을 바라보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는 자가 없으므로 북으로 동녕(東寧; 헤이룽장성 남부에 있는 현)까지 동으로 황성(皇城; 쌍성자 러시아의 우스리크스)까지, 남으로 바다까지의 오랑캐의 땅을 모두 비었습니다. 태종께서 계승하여 점점 더 힘쓰신 지 이미 오래서는 아무도 감히 대들지 못하였으나, 태평한 세월이 오래 이어져 수신이 방어를 잘못해서 경성 이북이 함몰하여 적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으므로, 태종께서 회복하려고 생각하셨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세종조에 이르러 강계 이서도 침략당하므로 군신이 땅을 줄일 것을 제안했으나, 조종께 받은 것은 작은 땅이라도 버릴 수 없으므로 뭇 의논을 따르지 않고 결단하시어 잇달아 큰 군사를 일으켜 서쪽·북쪽으로 정벌하여 옛땅을 회복하고 진(鎭)을 두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세조·성종께서 잇달아 정벌을 일으키셨으므로 되가 멀리 달아나서 파저강(婆猪江; 랴오닝 훈강) 훈강은 압록강 북쪽 약 60㎞ 떨어져 압록강과 나란히 흐르는 강(445㎞)이다. 조선전기엔 파저강 (婆猪江)(1)* 이동에는 오랑캐가 사는 곳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중종실록』 49년 1523년 (중종 18년) 12월 11일
태조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정벌 북으로는 헤이룽장 남부에 있는 동닝현, 북으로는 러시아의 우스리크스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태종때는 수성 정책을 펼쳐 압록강–두만강 경성 이북이 함몰됐으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북쪽을 정벌하여 압록강 건너 훈강 이남을 회복하였다. 그후 세조 성종때부터는 이땅을 직접 통치했다는 정사 '조선왕조실록-중중실록' 기록이다.
◆세종이후, 만주 서남부는 직접지배, 만주 동북부는 간접통치
“고려의 사방 경계는, 서북은 당 이래로 압록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 『고려사』 지(志) 39권 지리1(地理一)(2)*
'조선의 광개토대왕' 세종대왕은 고려의 서북 한계 압록강을 넘어 평균 약 60㎞ 북진 훈(渾)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건너 훈강 이남의 서북 국경지역에 여연군, 자상군, 무창군 우예군등에 성을 쌓고 북방 회복을 위한 전진기지 4군을 설치했다.
이후 조선은 19세기까지 만주 서남부는 직접통치하고 만주 동북부는 우두머리에게 관직을 주거나 조공을 바치게 하는 간접통치 즉 기미정책을 썼다.(3)*
'조선왕조실록'에는 파저강(훈강)지역을 조선이 지배하였다는 직간접 증거나 245회나 적혀 있다. 그중 훈강이 조선의 서북 국경선이라는 직접 증거 10건만 골라 소개한다.
◆랴오닝 훈강이 조선 서북 국경선 증거 10선 – 조선왕조실록
1. 1436년 (세종 18년) 윤6월 19일
-훈강 동쪽은 조선 영토
파저강(婆猪江)은 그 근원이 장백산에서 흘러나와 우리나라의 터전이 되어, 강 동쪽은 우리 지경이 되고, 강 서쪽은 저들의 거주지가 되고 있사온데, 의주로부터 여연까지의 상거(相距)가 1백여 리로서 야인들이 우리 지경을 출입하며 도적질을 감행하는 자가 모두 이 강을 경유하고 있다.
2.1440년 (세종22년) 7월 29일
-휴전선의 철책처럼 훈강 강둑에 목책을 설치
평안·함길도의 도체찰사 병조 판서 황보인이 연변의 비어책을 올리기를, 이산(理山)의 파저강(婆猪江)이 합류하는 양쪽 언덕에 가지가 많은 큰 나무를 베어 목책을 강변에 설치하고 강물이 얼기 시작하거든 물위에서 칡덩굴로 비껴 얽고, 가지가 많은 큰 나무에 돌을 매어 달아 물속에 넣어 함께 얼어붙도록 하소서.
3. 1465년 (세조 11년) 8월 6일
-목숨을 걸고 훈강을 건너 조선으로 귀순하려는 여진족, 훈강 이남은 조선 땅이라는 극명한 증거. 마치 철책선 부근 임진강 하류를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이 연상됨
평안도 도관찰사 오백창 ·도절제사 양정이 보고하기를 "7월에 야인 남녀 2인이 파저강을 건너 배를 타고 오는 것을 위원군(조선) 군사 장서가 군병을 거느리고 응하니, 2인이 모두 칼로 스스로 찔러 여자는 이미 죽고 그 남자는 생존하여 사람을 보내어 불러 와서 그 근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매토이며, 요동사람인데 귀국에 투화(投化귀순)하려고 아내를 데리고 도망하여 파저강에 이르렀더니, 아내가 군사를 바라보고는 두려워서 해(害)를 받을까 하여 죽었습니다.
4. 1484년 (성종 15년) 7월 9일
-훈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려는 북서쪽 여진족을 북동쪽 여진족이 만류
평안도 절도사 정난종의 보고하기를,건주좌위 사람 고도을치가 말하기를, 「조선이 기해년(1479년)에 내 처자와 부모를 모두 죽이고 집을 불살랐으므로 이제까지도 생업을 회복하지 못하였는데, 같은 때에 환난을 당한 조이시가는 후하게 대접하고, 나는 박하게 대하니,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고 2백 50여 명을 모아 배 1백여 척으로 파저강(婆猪江) 동구의 여울에 이르렀다 하므로, 건주우위의 추장 나하 및 달한 등이 달려가서 말리니, 군사를 파하고, 돌아갔습니다.."
5.1501년(연산 7년) 9월 1일
-훈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큰 진을 설치하자고 건의
평안도 경차관 유헌이 북방 지방의 폐단을 아뢰다 오직 아이(阿耳)와 산양회(山羊會) 두 진(鎭)만은 두 곳의 거리가 거의 60리가 되고 그 사이에 마시리 들판과 나하동이 있는데, 이 곳은 평탄하고 넓어서 살 만한 땅인데도 버려두고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적이 비록 와서 둔취하더라도 사람들이 알 수 없습니다. 또 이 곳은 저들의 땅인 파저강 (婆猪江)과 서로 마주 보므로, 저 적들이 자피선을 만들어 반드시 파저강으로 건너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시리 들판에 큰 진(鎭)을 설치하면, 적의 배가 내려올 수가 없으므로 아이와 산양회도 모두 서로 구원할 수 있는 형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6. 1595년 (선조 28년) 8월 5일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파저강 이남은 여전히 조선 땅
남방과 북방의 위급한 형세에 대한 비변사의 대책 논의
서방의 일도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조정에서 천 가지 방법 만 가지 계책으로 지시한다 하더라도 전혀 성사되지 않을 것이고, 다만 절도사가 어떻게 처치하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 중에 이산 산양회(山羊會)로 말하면, 바로 파저강(婆猪江)과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7. 1618년(광해 10년) 6월 10일
-파저강과 마주보는 지역으로 굳게 지켜야 함.
평안 병사 김경서가 장계하여 방비 대책에 대해 아뢰다
이산(理山)이야말로 파저강(婆猪江)과 마주보는 지역인만큼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는데, 형세가 쇠잔하고 성첩(城堞)도 지극히 보잘것없어 결코 지켜내기가 어려우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조정에서 미리 지휘하여 그때를 당해서 궁색해 지는 폐단이 없게끔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8. 1773년 (영조 49년) 12월 15일
-이산부의 건너편은 파저강 적진
이산 부사 윤광소가 상소하였는데, 이산본부(本府)의 건너편은 바로 파저강(婆猪江)의 적진이니 곧 옛날에 이만주(李滿住; 남이 장군 정벌에 의해 참수됨)가 변란을 일으킨 땅으로 최고의 요해지가 됩니다.
9. 1781년(정조 5년) 12월 17일
-초산부 산향회진 북쪽 경계가 파저강
의주 무신 최혁의 상소문 초산부(楚山府)의 서쪽에 산양회진이 있는데 이 진의 북쪽이 곧 저들 지역의 파저강(波豬江)입니다.
10. 1846년 (헌종 12년) 8월 19일
-청나라 군대의 파저강 동구 이동 동태 감시
평안 감사 홍재철이 장계하기를,"대국인(청나라 사람)이 군마를 많이 거느리고 이달 5일 술시에 초산 경계 건너편 한적천에서 나와 파저강(波猪江) 동구에 머물렀는데, 건너편의 밭을 일구고 집을 지은 곳을 살피고 잡으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각주
(1)*조선 후기엔 동가강(佟佳江),20세기에 이르러 강물이 혼탁하다하여 혼강(渾江)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훈강은 길림성 백산시 북부 장백산맥에서 발원하여 통화현으로 스핑 환런 야허, 사천즈 덴즈 관덴현에서 압록강에 합류한다
(2)*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3)*“고삐를 느슨하게 잡되 끈은 끊지 않는다” 뜻의 '기미정책(羈縻政策)'은 중국의 역대 왕조가 다른 민족에게 취한 간접 통치책이다. 이민족에게 무력을 쓰지 않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에게 조선의 관직과 물품을 주는 대신 조선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내정에는 관여하지 않고, 명목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 역시 이러한 기미정책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형적인 형태는 당 나라로 명목상으로는 군현제를 채택하여 부주현(府州縣)을 두고, 외족의 추장을 도독 ·자사 ·현령· 대장군 장군 등에 임명하여 자치에 맡기고, 보호령으로서 도호부와 도독부등을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각각 함주대도독부등과 경원대호부를 두어 동만주를 간접 통치했다.
태조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정벌 북으로는 헤이룽장 남부에 있는 동닝현, 북으로는 러시아의 우스리크스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태종때는 수성 정책을 펼쳐 압록강–두만강 경성 이북이 함몰됐으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북쪽을 정벌하여 압록강 건너 훈강 이남을 회복하였다. 그후 세조 성종때부터는 이땅을 직접 통치했다는 정사 '조선왕조실록-중중실록' 기록이다.
◆세종이후, 만주 서남부는 직접지배, 만주 동북부는 간접통치
'조선의 광개토대왕' 세종대왕은 고려의 서북 한계 압록강을 넘어 평균 약 60㎞ 북진 훈(渾)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건너 훈강 이남의 서북 국경지역에 여연군, 자상군, 무창군 우예군등에 성을 쌓고 북방 회복을 위한 전진기지 4군을 설치했다.
이후 조선은 19세기까지 만주 서남부는 직접통치하고 만주 동북부는 우두머리에게 관직을 주거나 조공을 바치게 하는 간접통치 즉 기미정책을 썼다.(3)*
'조선왕조실록'에는 파저강(훈강)지역을 조선이 지배하였다는 직간접 증거나 245회나 적혀 있다. 그중 훈강이 조선의 서북 국경선이라는 직접 증거 10건만 골라 소개한다.
◆랴오닝 훈강이 조선 서북 국경선 증거 10선 – 조선왕조실록
1. 1436년 (세종 18년) 윤6월 19일
-훈강 동쪽은 조선 영토
파저강(婆猪江)은 그 근원이 장백산에서 흘러나와 우리나라의 터전이 되어, 강 동쪽은 우리 지경이 되고, 강 서쪽은 저들의 거주지가 되고 있사온데, 의주로부터 여연까지의 상거(相距)가 1백여 리로서 야인들이 우리 지경을 출입하며 도적질을 감행하는 자가 모두 이 강을 경유하고 있다.
2.1440년 (세종22년) 7월 29일
-휴전선의 철책처럼 훈강 강둑에 목책을 설치
평안·함길도의 도체찰사 병조 판서 황보인이 연변의 비어책을 올리기를, 이산(理山)의 파저강(婆猪江)이 합류하는 양쪽 언덕에 가지가 많은 큰 나무를 베어 목책을 강변에 설치하고 강물이 얼기 시작하거든 물위에서 칡덩굴로 비껴 얽고, 가지가 많은 큰 나무에 돌을 매어 달아 물속에 넣어 함께 얼어붙도록 하소서.
3. 1465년 (세조 11년) 8월 6일
-목숨을 걸고 훈강을 건너 조선으로 귀순하려는 여진족, 훈강 이남은 조선 땅이라는 극명한 증거. 마치 철책선 부근 임진강 하류를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이 연상됨
평안도 도관찰사 오백창 ·도절제사 양정이 보고하기를 "7월에 야인 남녀 2인이 파저강을 건너 배를 타고 오는 것을 위원군(조선) 군사 장서가 군병을 거느리고 응하니, 2인이 모두 칼로 스스로 찔러 여자는 이미 죽고 그 남자는 생존하여 사람을 보내어 불러 와서 그 근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매토이며, 요동사람인데 귀국에 투화(投化귀순)하려고 아내를 데리고 도망하여 파저강에 이르렀더니, 아내가 군사를 바라보고는 두려워서 해(害)를 받을까 하여 죽었습니다.
4. 1484년 (성종 15년) 7월 9일
-훈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려는 북서쪽 여진족을 북동쪽 여진족이 만류
평안도 절도사 정난종의 보고하기를,건주좌위 사람 고도을치가 말하기를, 「조선이 기해년(1479년)에 내 처자와 부모를 모두 죽이고 집을 불살랐으므로 이제까지도 생업을 회복하지 못하였는데, 같은 때에 환난을 당한 조이시가는 후하게 대접하고, 나는 박하게 대하니,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고 2백 50여 명을 모아 배 1백여 척으로 파저강(婆猪江) 동구의 여울에 이르렀다 하므로, 건주우위의 추장 나하 및 달한 등이 달려가서 말리니, 군사를 파하고, 돌아갔습니다.."
5.1501년(연산 7년) 9월 1일
-훈강을 건너오지 못하도록 큰 진을 설치하자고 건의
평안도 경차관 유헌이 북방 지방의 폐단을 아뢰다 오직 아이(阿耳)와 산양회(山羊會) 두 진(鎭)만은 두 곳의 거리가 거의 60리가 되고 그 사이에 마시리 들판과 나하동이 있는데, 이 곳은 평탄하고 넓어서 살 만한 땅인데도 버려두고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적이 비록 와서 둔취하더라도 사람들이 알 수 없습니다. 또 이 곳은 저들의 땅인 파저강 (婆猪江)과 서로 마주 보므로, 저 적들이 자피선을 만들어 반드시 파저강으로 건너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시리 들판에 큰 진(鎭)을 설치하면, 적의 배가 내려올 수가 없으므로 아이와 산양회도 모두 서로 구원할 수 있는 형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6. 1595년 (선조 28년) 8월 5일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파저강 이남은 여전히 조선 땅
남방과 북방의 위급한 형세에 대한 비변사의 대책 논의
서방의 일도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조정에서 천 가지 방법 만 가지 계책으로 지시한다 하더라도 전혀 성사되지 않을 것이고, 다만 절도사가 어떻게 처치하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 중에 이산 산양회(山羊會)로 말하면, 바로 파저강(婆猪江)과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7. 1618년(광해 10년) 6월 10일
-파저강과 마주보는 지역으로 굳게 지켜야 함.
평안 병사 김경서가 장계하여 방비 대책에 대해 아뢰다
이산(理山)이야말로 파저강(婆猪江)과 마주보는 지역인만큼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는데, 형세가 쇠잔하고 성첩(城堞)도 지극히 보잘것없어 결코 지켜내기가 어려우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조정에서 미리 지휘하여 그때를 당해서 궁색해 지는 폐단이 없게끔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8. 1773년 (영조 49년) 12월 15일
-이산부의 건너편은 파저강 적진
이산 부사 윤광소가 상소하였는데, 이산본부(本府)의 건너편은 바로 파저강(婆猪江)의 적진이니 곧 옛날에 이만주(李滿住; 남이 장군 정벌에 의해 참수됨)가 변란을 일으킨 땅으로 최고의 요해지가 됩니다.
9. 1781년(정조 5년) 12월 17일
-초산부 산향회진 북쪽 경계가 파저강
의주 무신 최혁의 상소문 초산부(楚山府)의 서쪽에 산양회진이 있는데 이 진의 북쪽이 곧 저들 지역의 파저강(波豬江)입니다.
10. 1846년 (헌종 12년) 8월 19일
-청나라 군대의 파저강 동구 이동 동태 감시
평안 감사 홍재철이 장계하기를,"대국인(청나라 사람)이 군마를 많이 거느리고 이달 5일 술시에 초산 경계 건너편 한적천에서 나와 파저강(波猪江) 동구에 머물렀는데, 건너편의 밭을 일구고 집을 지은 곳을 살피고 잡으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각주
(1)*조선 후기엔 동가강(佟佳江),20세기에 이르러 강물이 혼탁하다하여 혼강(渾江)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훈강은 길림성 백산시 북부 장백산맥에서 발원하여 통화현으로 스핑 환런 야허, 사천즈 덴즈 관덴현에서 압록강에 합류한다
(2)*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3)*“고삐를 느슨하게 잡되 끈은 끊지 않는다” 뜻의 '기미정책(羈縻政策)'은 중국의 역대 왕조가 다른 민족에게 취한 간접 통치책이다. 이민족에게 무력을 쓰지 않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에게 조선의 관직과 물품을 주는 대신 조선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내정에는 관여하지 않고, 명목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소수 민족정책 역시 이러한 기미정책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형적인 형태는 당 나라로 명목상으로는 군현제를 채택하여 부주현(府州縣)을 두고, 외족의 추장을 도독 ·자사 ·현령· 대장군 장군 등에 임명하여 자치에 맡기고, 보호령으로서 도호부와 도독부등을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고려와 조선은 각각 함주대도독부등과 경원대호부를 두어 동만주를 간접 통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