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진정한 한국右派의 뿌리는 호남이었다
2021-06-17 19:00
[광주정신] ⑨ 호남인재의 산실 창흥의숙
창평의 선각자 춘강 고정주(春崗 高鼎柱 1862~1933년)는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 낙향해 영학숙을 세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바깥 정세에 대비하려면 적어도 외국어의 기초는 익혀야 했다. 춘강은 집안의 정자(상월정)를 학당으로 개조하고, 서울에서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선생을 모셔온다. 학숙의 이름도 아예 영어(英語)의 ‘영’자를 따와 영학숙으로 했다.
1908년 영학숙은 과학, 수학, 국사, 한문, 체육 등 신학문을 가르치는 창흥의숙으로 확대 개편된다. 건평 180평, 교실 6칸의 창흥의숙은 1909년 지역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창흥학교가 되고, 춘강은 계속 교장을 맡게 된다.(창흥학교는 일제 보통학교와 대한민국의 국민학교 시절을 거쳐 1996년 지금의 창평초등학교가 된다.)
창흥의숙 출신들의 면면을 보면 놀랍다. 춘강의 사위 김성수(金性洙‧동아일보 창간, 제2대 부통령) 송진우(宋鎭禹‧중앙학교 교장, 한민당 수석총무), 현준호(玄俊鎬‧호남은행 설립자), 김시중(金時中‧한민당 중앙위원), 백관수(白寬洙‧한민당 총무), 김병로(金炳魯‧초대 대법원장), 양태승(梁泰承‧고창고보 창설자) 등 우파 민족진영의 지도자들이 다수다. 이 중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 등은 뒷날 일본 유학과 김성수의 이른바 계동 사랑방 모임, 서울 중앙학교 숙직실 회동 등으로 인연이 이어지면서 1919년 2‧8독립선언과 3‧1운동 성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면 소재지의 한 작은 학숙에 어떻게 이런 인재들이 모여서, 이처럼 큰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까.
조용헌 교수(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는 춘강의 영향력을 맨 먼저 꼽고, 그 다음으로 혼맥(예컨대 김성수의 울산 김씨와 춘강의 창평 고씨 간 사돈관계 등),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창평의 분위기를 든 적이 있다. 역시 춘강이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춘강은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우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강론(自强論)을 견지했다. 항일 무장투쟁론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것. 춘강의 사상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바탕을 뒀다. 전통적 제도와 사상(道)은 지키되 근대 서구의 기술(器)은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자는 것. 그것은 한마디로 현실에 기초한 실용주의 시국관이었다.
물론 창흥의숙 출신 중에서도 만주에서 활동하다 국내로 잠입해 친일파 암살 기도로 체포된 이병욱(李丙旭 1897~1978), 병묵(丙黙 1900~1931년) 형제 등도 있었다.(동생은 감옥에서 순국, 형은 10년 복역). 그럼에도 제자들은 대체로 춘강 노선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 참고로 세계 두 번째 합성섬유(비날론)를 발명하고, 6‧25 전쟁 때 납북된 이승기(李升基 1905~1996년) 전 서울공대학장도 창흥의숙 출신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우파 민족진영 세력은 해방 후 대한민국 탄생에 참여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한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세력’으로 불리게 되는데 자유주의 우파의 한 축을 이루게 된다. 김영삼( 金泳三) 김대중(金大中)도 이들의 후예다. 그러나 지금은 그동안의 급격한 이념적 분화와 빈번한 이합집산으로 인해 좌우 스펙트럼 상에 혼재돼 있어서 이 세력을 몇 가지 정체성으로 범주화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도 고초를 겪었다. 일부는 친일파로 낙인찍히기도 했고, 6‧25 전쟁 때 납북, 피살되기도 했다. 지금도 당시 이들의 처신과 행적을 놓고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창흥의숙과 창평은 이에 대해 무슨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춘강과 의병장 녹천 고광순(鹿川 高光洵 1848~1907)의 관계가 많은 걸 시사한다. 창평초교 개교 1백주년이던 2006년, ‘창평향토사자료연구팀’은 ‘창흥의숙’이란 자료집을 냈다. 다음은 이를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춘강이 창흥의숙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녹천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두 사람이 다 임란 때 의병으로 순절한 고인후(高因厚)의 후손. 가까운 친척이고 같은 마을에서 살기도 했다. 나이는 녹천이 14세 위. 그러나 노선은 달랐다. 춘강은 실력배양론, 녹천은 무장투쟁론 쪽이었다. 녹천은 이미 1895년 을미국변(乙未國變‧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인근 장성(長城)의 기우만(奇宇萬 1846~1916), 기삼연(奇參衍 1851~1908)과 함께 거병했다.
남원성(南原城) 출정을 앞두고 녹천이 은밀히 춘강을 찾는다. “이 난세에 자손 하나는 선대의 유업을 이어야하지 않겠는가.…” 이에 춘강이 “광(곳간) 고리를 끌러두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춘강은 녹천의 의병투쟁에 직접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 취지를 이해하고 협조했다. 이들(창평 고씨)처럼 한 집안의 두 노선이 동학과 일제 치하,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도 특별히 충돌하지 않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자료집 ‘창흥의숙’에 언급된 박석윤(朴錫胤 1898~1950), 석기(錫驥 1900~1953) 형제와 김홍용(金洪鏞 1902~1950)의 스토리도 흥미롭다. 세 사람 모두 창흥의숙(창평보통학교) 출신이다. 박석윤은 일제 총독부의 도움으로 동경(東京)제국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까지 다녀온 당대의 엘리트였다. 야구선수(투수)로도 활약했고,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폴란드 대사까지 지냈다. 그러나 일제의 밀정조직인 민생단을 만들어 항일투쟁세력의 분쇄를 도모한 대표적인 친일파이기도 했다.(1950년 친일반동분자로 북에서 체포돼 처형됐다. -나무위키)
동생 석기도 동경제대 불문과를 졸업한 수재였으나 전혀 다른 길을 간다. 그는 집안의 모든 재산을 털어 국악진흥에 나선다. 자신도 직접 거문고를 배워 거문고 산조의 대가란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향에 ‘지실초당’을 짓고 박동실을 비롯한 유명 국악인들을 불러 함께 공부하며 후학을 가르친다. 나중에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명창 김소희(1917~1995)도 그곳 출신이다. 박석기가 없었다면 우리 국악의 맥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는 주위에서 정치나 관계(官界)로 나가라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창흥의숙’ 자료집에 따르면 “일본에 빚을 졌다면 형 한 사람이면 된다. 나는 일본이 주는 녹봉은 먹지 않으련다”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1940년에는 조선창극단을 창단해 순회공연을 했는데 창극 ‘심청가’로 일본 황후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붙잡혀가 구류처분을 받고 고문까지 당한다. 국립국악원은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박석기를 생각하다’라는 음악극을 만들어 올림으로써 그를 추모했다.
김홍용도 와세다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으나 자청해서 창평 면장(面長)을 맡아 6년 동안 저수지 다섯 곳을 만들 만큼 많은 일을 했다(외가가 담양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외숙으로 홍용, 문용, 성용 3형제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냈다). ‘창흥의숙’의 사료연구팀은 “일제 치하에서 창평의 숙원사업을 추진할 때 박석기는 중앙에서 돕고, 김홍용은 지역에서 끌고 가는 ‘역할분담‘이 이뤄졌다”고 했다.
창흥의숙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명암(明暗)을 함께 끌어안고 있다. 섣부른 재단이나 평가가 조심스러운 이유다. 담양문화연구소 심진숙 소장은 “춘강 선생은 나라를 잃었으니 나라를 되찾을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그 대의명분에 따라 인재들이 길러졌고, 그들은 우파 민족진영의 중추가 된다. 좌파적 관점에선 부정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유의 평가가 늘 그렇듯이 도식적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파의 열망과 의지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담양군 윤재득 문화재 담당은 춘강의 고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지금은 빈집인데 최근 문화재청 산하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매입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그는 ‘ㄷ’ 자 모양의 독특한 이 고택은 “곳간이 유난히 크다”고 귀띔했다. 춘강이 의병장 녹천을 위해 곳간 문의 고리를 끌러놓았다는 그 곳간 말이다. 창평초교 김선치 교장은 “아이들에게 창평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도록 함으로써 창평에 대한 긍지와 애향심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형태로든 창흥의숙의 맥이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