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리 컬렉션]⑦ 명품 모으듯 한 컬렉션...한국판 메디치 가문은 없나

2021-05-28 00:00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 등 메디치 가문 후원으로 작품활동
수집은 돈만 있다고 안되는 것…철학·내용·의미 확고한 안목 있어야

19세기 후반 조선시대의 책거리. 당시 선비들의 수집 욕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진=박영택 교수 제공]

 
이전부터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들, 혹은 뛰어난 예술품으로 칭송받은 것들은 본래 왕실 소유이거나 지배 계급의 수집품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미술작품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들은 원래 전통사회에서는 특정 목적에 사용되었던 물건으로서의 이미지이자 장식이고 공예품들이었으며, 그것들 대부분은 종교적이고 제의적이며 정치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었던 것들이었다.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가시화하고 선전하는 차원에서 기능했던 물건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는 얘기다.

근대 이후 그러한 목적에서 풀려난 이미지는 이른바 순수미술이 되었고, 전시가치가 되면서 박물관과 미술관에 수용되거나 부자들의 수집품이 되었다.

이제 미술은 한 민족의 중요한 문화적인 자산, 정신적인 가치를 지닌 것, 전통이자 계승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소중한 것으로 각인되는 동시에, 개별 작품은 한 천재적인 작가의 상상력과 조형적 재능을 접하는 중요한 예술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상품과 대등한 차원에서 고가의 물건으로도 자리매김함으로써 매매되기도 한다.

따라서 미술품 수집에는 몇 가지 사항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전통문화의 보존으로서, 소멸될 위기에 처한 과거의 것들을 봉인하고 영속화하는 일이 미술품 수집이다. 동시에 예술작품의 향수, 뛰어난 예술작품에 대한 후원과 지원, 진정으로 가치 있는 미술품에 대한 동경과 이해를 동반하는 문화적 행위 등이 깃들어 있다.

한편으로는 투자와 재산증식의 효과적인 수단도 스며들어 있으며, 특히 기업의 경우 세금 혜택 등의 여러 차원이 또한 들어 있다. 물론 기업의 사회 환원과 문화에 대한 기여 역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 미술을 가능하게 한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존재가 바로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라는 도시국가의 부유한 상인 집안인 메디치 가문이다.

당시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기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의 부를 추구하는 상인들을 천한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엄청난 재산을 성당 건축과 복원, 그리고 그 안에 자신들이 가족묘를 만드는 데 기부했다. 또한 학자들을 통해 그리스·로마 시대의 학문을 복원하고 번역 사업을 일으키는 한편 막대한 서적들을 수집해 도서관을 만들고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을 고용해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내게 했다. 아마 메디치 가문의 이와 같은 후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구성원들을 위해 기꺼이 기부하고 뛰어난 예술품을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향유하고자 했으며, 학문을 장려하고 고전을 번역하고 도서관을 만들어 인류의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고자 노력했던 메디치 가문의 후원은 오늘날 유럽문화와 미술의 가장 화려하고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낸 힘찬 동력이었다.

한 가문의 힘으로 이룬 이 성과는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업적이었다. 그것은 단지 돈으로만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메디치 가문을 다시 살펴보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공동체 사회에서 그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정치가·자본가와 같은 이들이 과연 어떤 가치와 이상을 가져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알려주는 동시에 이들이 지녀야 할 도덕적이고 정신적·문화적인 기준을 날카롭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술에 대한 관심과 후원이 얼마나 그 사회구성원들이 지적·정신적 가치를 고양하고 새로운 창의성과 상상력을 통해 한 사회를 새로운 세계로 밀고 나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생생하게 알려준다. 우리에게 메디치 가문이 부러운 진정한 이유다.

19세기 유럽의 민족국가와 함께 태동한 미술관이 이른바 민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에서 유물 약탈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후 상품 대량생산이 본궤도에 오른 20세기는 미술품 수집 등이 너나 할 것 없이 즐기는 일반인의 취미가 됐다. 수집을 통해 개인의 역사나 상흔 혹은 취향을 표현하는, 이른바 수집의 개인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의 근대를 봤을 때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미술품 수집가로 꼽히는 이는 전형필이다. 이후 여러 개인 수집가들이 등장하는데, 실상 수집을 먼저 시작한 이들은 작가들인 경우가 많다.

한국 현대 미술가 중에도 손꼽히는 고미술 수집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본인들의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 경우다. 도상봉·김환기·김영학·권옥연·김종학·변종하·이우환 등은 알아주는 골동 수집가이자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작가들이다. 자연스레 이들은 자신의 수집품을 통해 미의식과 조형 감각을 배웠을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작품 안으로 자연스레 수렴되었을 것이다.

공들여 수집한 ‘옛 물건’들을 통해 미와 조형의 의미와 격을 깨달은 김환기와 김종학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심플’하기 그지없는 목가구와 백자 그리고 자연스러움과 해학미가 넘치는 다양한 공예품들에서 아름다움의 비밀을 알아차린 이들이다.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가공해 자신의 개성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조형을 다루는 이들이기에 미적인 안목이 빼어났다. 그 안목으로 좋은 고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집에는 안목이 절대적이다. 이는 돈이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엄청난 부자라면 문제는 다르다. 최고의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문제는 어떤 수집이어야 하는가 하는 수집의 철학 혹은 수집의 내용과 의미가 확고해야 하는데, 이는 결코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본인이 뛰어난 안목을 기르거나, 그것이 부재한다면 그런 안목이 있는 전문가를 고용해야 한다.

전형필에게는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오세창이 있었기에 간송미술관의 컬렉션이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외국의 수집가들 또한 대부분 전문 판매원(딜러)을 고용한다. 본인들이 스스로 자신이 취향과 안목에 의지하거나 소문에 의존해서 함부로 사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안목이 없다 보니 대부분 귀에 의존해서 구매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그저 유명하다는 작가들, 비싸다고 하는 작품들만 거의 동일하게 소장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는 기업 미술관의 경우도 유사한 상황이다. 각 기업 미술관마다 자신들의 성격과 철학 그리고 이에 따른 수집의 성격이 정해져야 한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고심하는 미술관을 보기가 어렵다. 수집은 결코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이며, 횡이 아니라 종적인 문제이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상속세와 연관되어 기증한 미술품이 화제다. 이번에 기증된 작품 약 2만3000점의 수준과 가격 그리고 그 작품들을 유치할 미술관 건립을 놓고 지자체 간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가 점입가경이다.

그가 생전에 기증했더라면 더 빛나지 않았을까? 혹은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의 컬렉션을 더 체계적이고 개성 있는 것으로 만들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유명작가나 고가의 미술품만을 마치 명품 수집하듯이 하는 컬렉션이 아니라, 진정으로 뛰어난 감식안이 작동되어 이루어진 놀라운 컬렉션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그런 진정한 기업이나 부자, 메디치 가문과 같은 곳은 없을까?

◆필자 주요 이력

경기대 파인아츠학부 교수·미술평론가
국립현대미술관자문운영위원
세화문화재단이사
<한국현대미술지형도>, <민화의 맛> 저자
 

[사진=박영택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