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모네·마네만 아는가… 난, 조선의 빛 그린 '광주의 붓'
2021-05-28 05:30
[광주정신] ⑥ 그의 그림 '남향집'에 숨이 멎을 듯, 오지호
한국 서양화단의 거목이자 개척자인 오지호(吳之湖·1905~1982) 또한 광주(光州) 사람이다. 인근 화순(和順)에서 태어났으나 무등산 기슭, 지산동(芝山洞)에 초옥을 마련하고 활동했다. 끝까지 지방화단을 지킨 드문 경우 중 하나다. 한국 화단에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문을 열고, 미술 이론논쟁의 물꼬를 튼 오지호를 빼고서는 미술은 물론 광주의 정신가치에 대해 얘기하기 어렵다. 그것은 예향(藝鄕)의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 취재팀은 지난 3일, 평생 오지호를 존경하고 따랐던 원로 화백 최예태 선생(84·전 미협 서양화분과위원장)을 찾았다. 경기도 분당 불곡산 아래, 그의 3층 화실은 신록에 반사된 5월의 햇살로 밝고 따뜻했다. 오지호가 그리려 했던 인상주의의 빛과 색채도 저런 것이었으리. 신(新)구상주의자인 최 화백은 1987년 '오지호-예술의 발자취'란 평전을 썼다. 이 책은 지금도 대표적인 ‘오지호 입문서’다. 오지호의 장남인 오승우 화백의 권유로 쓰게 됐다고 한다. 우리는 최 화백의 도움을 받아 오지호의 깊고 넓은 회화(繪畵)의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는 오지호의 미술을 “순수회화에 대한 인상파적 탐닉과 민족주의적 집념”으로 요약했다.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1926~1931년) 때부터 일본의 어둡고 침울한 자연과 달리 조선의 자연은 맑고 밝다는 것을 느꼈고, 이를 표현하려면 인상주의 기법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인상파는 자연을 하나의 색채 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에서 순간적으로 느낀 인상을 포착해 그린다. 프랑스의 마네(1832~1883)와 모네(1840~1926)가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 꼽힌다. “오지호는 이런 인상파 회화를 회화의 본질로 삼고 그 주제나 소재를 조선의 풍광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인상주의의 門을 열다
우리는 ‘오지호 기념관’(전남 화순군 동북면 독상리)에서 본 그의 대표작 ‘남향집’(1939년 유화)을 떠올렸다. 그가 개성(開城) 송도고보 미술교사로 있던 1939년, 자신이 살던 집을 그렸던 이 그림은 인상파 기법이 잘 드러난 걸작이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남향집’을 보는 순간, 그게 같은 크기의 복사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숨이 멎는 듯했다(진본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도록으로 보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투명한 햇빛과 맑은 공기, 초가집 지붕과 돌담에 누인 보라색 나무 그림자, 졸고 있는 강아지···. 빛과 그늘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림에 딸린 설명은 이러했다. “인상주의 빛의 효과를 우리민족 고유한 감성으로 전이시켜 우리 자연에 맞는 방법으로 일관해온 작가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오지호가 1928년 친구 김주경(1902~1981)과 함께 조선 최초의 서양화 전공자들의 모임인 녹향회(綠鄕會)에서 활동한 것도 “조선의 그림을 찾자”는 민족의식의 발로였다. 녹향회는 “우리가 지향할 민족예술은 명랑·투명하고 오색이 찬연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한다”고 선언하고 이를 위해 “일본인으로부터 배운 일본적 암흑의 색조를 팔레트에서 구축(추방)한다”고 천명했다. 오지호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고, 태평양전쟁의 기록화를 그리라는 일제의 강요와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해 함경남도 단천으로 피신해 숨기도 했다.
오지호는 1939년 동아일보에 '피카소와 현대회화'라는 글을 기고하고 피카소(1881~1973)를 정면에서 비판한다. “회화의 역사가 자연을 떠나본 적이 없는 만큼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왜곡되고 자연에서 일탈한 추상미술은 회화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피카소가 회화예술에 끼친 해악은 심각하고 참혹한 것”이라고까지 했다. 식민지의 일개 젊은 미술학도(34세)가 세계미술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던 피카소를 들이받은 것이다.
“피카소는 순수 회화에 害惡”
그는 1959년 ‘구상회화선언’으로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선다. 구상(具象)은 대상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이고, 비구상(非具象)은 추상(抽象)미술인데, “양자가 별개이며, 비구상은 회화가 아니고 도안에 불과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파장은 컸다. 비구상계열의 화가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이런 논쟁들은 지금도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압과 유행(流行)이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옥죄려는 것들에 대한 오지호 특유의 ‘저항정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가 피카소를 비판한 것도 당시 피카소(입체파) 열풍 앞에서 한국의 젊은 화가들이 거의 광적으로 휩쓸리는 데 대한 개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지호의 이런 자존심과 용기는 우리 화단에서도 미술이론을 놓고 본격적으로 토론하고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지호 스스로도 '미와 회화의 과학'(1941년 탈고),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년) 등 미술에 관한 많은 이론서와 논문집을 냈다. '현대회화의 근본문제'에 대해 당시 소설가 박영준(朴榮濬 1911~1976)은 이렇게 평했다. “이것은 단순한 미술서가 아니라, 깊은 사색과 해박한 지식을 경(經)과 위(緯)로 하여 엮어진 하나의 사상의 서(書)라 할 것이다.”
언제 보아도 좋은 그림을
1956년 발표한 ‘데포르메론’에서는 현대 회화의 핵심인 데포르메(déformer, 그리려는 대상의 형태를 변형하는 것)의 개념과 한계를 밝혀 주목을 받았다. 그는 “데포르메는 자연의 기본적 형태를 떠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데포르메여야 한다”면서 “자연을 배제한 변조의 세계, 그것은 데포르메가 아니다”고 했다. 이는 “회화라면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 하는 가장 자연스런 모습, 언제 보아도 좋은 그림, 만인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림”이라는 그의 회화관(觀)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피카소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도 여기서 연유했음은 물론이다.
오지호는 1905년 12월 24일 화순군 동복면 복상리 모후산(母后山) 자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재영은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냈다. 사대부 가문인 집안은 효자가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그가 동복보통학교 2학년 때 일기장에 그린 나무, 꽃, 고양이, 조랑말 등을 보고 사람들은 일찍이 그의 재주를 알았다고 한다. 오지호는 14세 때인 1919년 아버지를 여읜다. 한일합방에 낙심한 아버지가 이해 3월 서울에서 고종의 인산(因山‧장례)과 파고다공원 기미독립선언을 보고 내려온 후 자결(순절)했기 때문이다. 오지호의 항일 민족정신의 뿌리를 짐작게 한다.
선친, 한일합방에 자결
오지호는 이듬해인 1920년 호남의 명문 전주고보에 진학하나 더 큰 세상을 배우기 위해 1921년 서울 휘문고보에 편입한다. 여기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高羲東·1886~1965)을 만난다. 3학년 때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1896~1948)이 그린 유화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21세가 되던 1926년, 일본인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재수 끝에 입학한다.
동경미술학교에서의 5년, 오지호는 회화에서 색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신만의 미술론을 갖게 된다. “물상(物象)이 시각을 통할 때는 형(形)도 색(色)으로서만 감각이 되는 까닭으로, 회화에서는 형은 동시에 색이요, 색은 동시에 형이다. ··· 회화는 광(光)의 예술이요, 색의 예술이다. ··· 회화는 절대로 암흑(暗黑)해서는 안 된다. 암흑은 광의 결여요, 그것은 회화의 부정이다.”(오지호, '미와 회화의 과학', 일지사, 1992년) 오지호를 왜 ‘빛을 그린 화가’라고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에게 “회화는 빛과 색채”였다.
오지호는 휘문고보 3학년 겨울방학 때(1922년 11월)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가 점찍어둔 광주 뒷몰(현 금남로 1가 부근)의 규수 지양진(池良珍)과 혼인한다. 장인인 참봉 지응현(池應鉉)은 그 일대의 부호였다.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인 15세의 신부는 혼례 후 오지호가 “그림을 그릴까요, 의사가 될까요”라고 묻자 확고하게 “그림을 그리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림 팔아 한글전용 반대 운동
해방 후, 오지호는 1948년 광주에 정착해 ‘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광주·전남지역 초‧중‧고교의 미술교육에도 열정을 쏟아 1950년대 말엔 이 지역의 미술 수준이 전국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임직순(1921~1996), 진양욱(1932~1984), 최쌍중(1944~2005), 박남재(92), 조규일(87), 최예태, 황영성(80), 배동환(73)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다. 1960년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한다. 이해 차남 오승우(吳承雨)가 국전추천작가가 된다. 1965년 ‘전남도전(全南道展)'을 창설하는 한편 국전 심사위원(1968~1973)으로 활동한다.
1969년 한자(漢字) 부활운동을 위해 국어학자 이희승과 함께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창립한다.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고 한자의 필요성을 각계에 호소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한자교육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평소 그림 파는 걸 싫어했지만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서슴없이 그림을 팔았다.
1976년(71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고, 이듬해 예술원상을 수상한다. 그해 3남 오승윤(吳承潤‧2006년 작고)도 국전추천작가가 됨으로써 3부자(오지호·오승우·오승윤) 국전작가라는 신화를 남긴다. 오지호는 1982년 12월 25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다. 오승우 화백을 비롯해 유가족들은 소장하고 있던 그의 작품 150여점을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탁했다.
우리는 ‘오지호 기념관’(전남 화순군 동북면 독상리)에서 본 그의 대표작 ‘남향집’(1939년 유화)을 떠올렸다. 그가 개성(開城) 송도고보 미술교사로 있던 1939년, 자신이 살던 집을 그렸던 이 그림은 인상파 기법이 잘 드러난 걸작이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 ‘남향집’을 보는 순간, 그게 같은 크기의 복사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숨이 멎는 듯했다(진본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도록으로 보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투명한 햇빛과 맑은 공기, 초가집 지붕과 돌담에 누인 보라색 나무 그림자, 졸고 있는 강아지···. 빛과 그늘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림에 딸린 설명은 이러했다. “인상주의 빛의 효과를 우리민족 고유한 감성으로 전이시켜 우리 자연에 맞는 방법으로 일관해온 작가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오지호가 1928년 친구 김주경(1902~1981)과 함께 조선 최초의 서양화 전공자들의 모임인 녹향회(綠鄕會)에서 활동한 것도 “조선의 그림을 찾자”는 민족의식의 발로였다. 녹향회는 “우리가 지향할 민족예술은 명랑·투명하고 오색이 찬연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조로 한다”고 선언하고 이를 위해 “일본인으로부터 배운 일본적 암흑의 색조를 팔레트에서 구축(추방)한다”고 천명했다. 오지호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고, 태평양전쟁의 기록화를 그리라는 일제의 강요와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해 함경남도 단천으로 피신해 숨기도 했다.
“피카소는 순수 회화에 害惡”
그는 1959년 ‘구상회화선언’으로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선다. 구상(具象)은 대상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이고, 비구상(非具象)은 추상(抽象)미술인데, “양자가 별개이며, 비구상은 회화가 아니고 도안에 불과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파장은 컸다. 비구상계열의 화가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이런 논쟁들은 지금도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압과 유행(流行)이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옥죄려는 것들에 대한 오지호 특유의 ‘저항정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가 피카소를 비판한 것도 당시 피카소(입체파) 열풍 앞에서 한국의 젊은 화가들이 거의 광적으로 휩쓸리는 데 대한 개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지호의 이런 자존심과 용기는 우리 화단에서도 미술이론을 놓고 본격적으로 토론하고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지호 스스로도 '미와 회화의 과학'(1941년 탈고),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년) 등 미술에 관한 많은 이론서와 논문집을 냈다. '현대회화의 근본문제'에 대해 당시 소설가 박영준(朴榮濬 1911~1976)은 이렇게 평했다. “이것은 단순한 미술서가 아니라, 깊은 사색과 해박한 지식을 경(經)과 위(緯)로 하여 엮어진 하나의 사상의 서(書)라 할 것이다.”
언제 보아도 좋은 그림을
1956년 발표한 ‘데포르메론’에서는 현대 회화의 핵심인 데포르메(déformer, 그리려는 대상의 형태를 변형하는 것)의 개념과 한계를 밝혀 주목을 받았다. 그는 “데포르메는 자연의 기본적 형태를 떠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데포르메여야 한다”면서 “자연을 배제한 변조의 세계, 그것은 데포르메가 아니다”고 했다. 이는 “회화라면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 하는 가장 자연스런 모습, 언제 보아도 좋은 그림, 만인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림”이라는 그의 회화관(觀)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피카소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도 여기서 연유했음은 물론이다.
오지호는 1905년 12월 24일 화순군 동복면 복상리 모후산(母后山) 자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재영은 구한말 보성군수를 지냈다. 사대부 가문인 집안은 효자가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그가 동복보통학교 2학년 때 일기장에 그린 나무, 꽃, 고양이, 조랑말 등을 보고 사람들은 일찍이 그의 재주를 알았다고 한다. 오지호는 14세 때인 1919년 아버지를 여읜다. 한일합방에 낙심한 아버지가 이해 3월 서울에서 고종의 인산(因山‧장례)과 파고다공원 기미독립선언을 보고 내려온 후 자결(순절)했기 때문이다. 오지호의 항일 민족정신의 뿌리를 짐작게 한다.
선친, 한일합방에 자결
오지호는 이듬해인 1920년 호남의 명문 전주고보에 진학하나 더 큰 세상을 배우기 위해 1921년 서울 휘문고보에 편입한다. 여기서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高羲東·1886~1965)을 만난다. 3학년 때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1896~1948)이 그린 유화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21세가 되던 1926년, 일본인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재수 끝에 입학한다.
동경미술학교에서의 5년, 오지호는 회화에서 색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신만의 미술론을 갖게 된다. “물상(物象)이 시각을 통할 때는 형(形)도 색(色)으로서만 감각이 되는 까닭으로, 회화에서는 형은 동시에 색이요, 색은 동시에 형이다. ··· 회화는 광(光)의 예술이요, 색의 예술이다. ··· 회화는 절대로 암흑(暗黑)해서는 안 된다. 암흑은 광의 결여요, 그것은 회화의 부정이다.”(오지호, '미와 회화의 과학', 일지사, 1992년) 오지호를 왜 ‘빛을 그린 화가’라고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에게 “회화는 빛과 색채”였다.
오지호는 휘문고보 3학년 겨울방학 때(1922년 11월)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가 점찍어둔 광주 뒷몰(현 금남로 1가 부근)의 규수 지양진(池良珍)과 혼인한다. 장인인 참봉 지응현(池應鉉)은 그 일대의 부호였다.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인 15세의 신부는 혼례 후 오지호가 “그림을 그릴까요, 의사가 될까요”라고 묻자 확고하게 “그림을 그리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림 팔아 한글전용 반대 운동
해방 후, 오지호는 1948년 광주에 정착해 ‘광주미술연구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광주·전남지역 초‧중‧고교의 미술교육에도 열정을 쏟아 1950년대 말엔 이 지역의 미술 수준이 전국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임직순(1921~1996), 진양욱(1932~1984), 최쌍중(1944~2005), 박남재(92), 조규일(87), 최예태, 황영성(80), 배동환(73)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다. 1960년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한다. 이해 차남 오승우(吳承雨)가 국전추천작가가 된다. 1965년 ‘전남도전(全南道展)'을 창설하는 한편 국전 심사위원(1968~1973)으로 활동한다.
1969년 한자(漢字) 부활운동을 위해 국어학자 이희승과 함께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창립한다.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라는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고 한자의 필요성을 각계에 호소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한자교육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평소 그림 파는 걸 싫어했지만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서슴없이 그림을 팔았다.
1976년(71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고, 이듬해 예술원상을 수상한다. 그해 3남 오승윤(吳承潤‧2006년 작고)도 국전추천작가가 됨으로써 3부자(오지호·오승우·오승윤) 국전작가라는 신화를 남긴다. 오지호는 1982년 12월 25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다. 오승우 화백을 비롯해 유가족들은 소장하고 있던 그의 작품 150여점을 모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