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은 자식에게라도 맡기지 말아야
2021-04-28 08:17
‘법은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는 옛 격언, 더이상 적용 어려워
대가족 해체된 가족 현실 반영 못해
대가족 해체된 가족 현실 반영 못해
86세 A씨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과 함께 살아왔지만 그 아들마저 2012년 사고로 잃었다. 이후 며느리도 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났다. 결국 A씨는 기댈 곳 없는 손자 B씨와 함께 살 수 밖에 없었다. A씨는 2010년경부터 매달 노인연금, 유족연금 등이 들어왔다. 큰돈은 아니지만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A씨에게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돈이었다.
하지만 A씨는 배운 것도 없고 나이가 많아 은행 업무를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A씨는 손자 B씨에게 도장, 통장 등을 주어 관리를 부탁했다. 그러던 어느날 B씨는 자기 명의로 돼 있던 문중 임야를 매각한 뒤 그 돈을 가지고 종적을 감췄다.
그제야 A씨는 은행에 가서 비밀변호를 변경하고 통장을 재발급 받았다. 잔액을 확인한 A씨는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남아 있는 돈이라고는 300만원 밖에 없었다. 10년간 들어온 노인연금과 유족연금 등을 합하면 5000만원도 넘는 금액이다.
고민 끝에 A씨는 주변 도움을 받아 손자를 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B씨는 ‘해볼 테면 해 봐라’는 식이었다.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면죄부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친족상도례 규정은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 또는 그 배우자간’의 재산범죄는 그 형을 면제하고, ‘그 외의 친족 간’ 재산범죄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친고죄로 규정하고 있다. 강도죄와 손괴죄를 제외하고 절도, 사기, 공갈, 횡령 등 재산범죄에 모두 적용된다.
사례에서 A씨와 B씨는 직계혈족이므로 조부모 손자 간 재산범죄는 형이 면제돼 처벌할 수 없다.
하지만 친족상도례 규정은 현대사회 대가족의 해체와 가족 내부의 재산 다툼이 빈번해진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게다가 사실상 친족 간 재산 범죄의 면책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친고죄의 경우 범인을 알게 된 날로부터 6월 내 고소를 해야만 처벌이 가능하다. 교섭을 핑계로 고소기간 도과를 노리거나 친족 일방이 작위적으로 동거관계를 만들어 이를 이용해 형 면제 판결을 노릴 수도 있다.
법무법인 정솔의 전인규 변호사는 “범행 동기, 죄질, 피해자 의사 등을 고려하지 않고 친족상도례 규정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당사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며 “친족상도례 규정에 대한 헌법소원까지 제기된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이제 더이상 '친족상도례'가 가족의 해체나 반목을 막지 못하는 것은 물론 도리어 사회적 약자인 가족구성원을 착취와 학대의 피해자로 내몰 수도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특히 장애인을 속여 금품을 갈취하거나 수급비를 횡령하더라도 가해자가 친족일 경우에는 실제 처벌까지 이어지기 매우 어렵다. 가족이라는 점을 악용해 사회적 약자의 기초적 생계를 위협하고 학대까지 했지만 법이 정의를 실현해 줄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19년까지 2년간 확인된 경제적 착취 학대사례는 총 630건으로 이 가운데 친족상도례가 적용되는 경우가 전체의 약 19%에 달했다.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는 친족에 의한 재산 범죄 피해를 예방하고, 장애인의 재산권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해 지난 3월 9일 장애인에게는 친족상도례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장애인복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