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노 칼럼] 시장을 이기는 정책은 없다
2021-04-20 20:02
학자마다 다르지만 인류는 수십만년 전 아프리카의 유인원이 진화하면서 오른쪽으로 아시아, 왼쪽으로 유럽으로 이동하여 확산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2021년 현재 세계 국가의 수는 200개 정도인데, 사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1인당 연간 소득이 10만 달러가 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나라들도 있다.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나라마다 커다란 수준 차이가 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199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더글러스 노쓰, 최근에는 재러드 다이아몬드(총균쇠), 유발 하라리(사피엔스), 프랜시스 후쿠야마(역사의 종말) 등 학자들은 제도(institutions)를 주된 요인으로 꼽고 있다.
제도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는 넓은 의미의 제도이고, 정부의 정책과 법령부터 지자체, 회사, 학교의 규정, 그리고 동창회의 회칙까지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관습이나 행동양식 같은 불문법적인 비공식 제도도 무수히 많다. 우리는 각종 제도의 그물 속에서 살고 있고 제도가 인간사회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경제학의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시장(market) 또한 인간 사회의 집단지성이 오랜 세월을 거쳐 발전시켜 온 제도이다. 동양의 고전에서 순리를 따르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다(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했다. 인간의 지성이 오랫동안 응집되어 형성된 시장을 순리라고 본다면, 시장을 존중하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말이 된다.
경제 성장과 부의 분배를 둘러싼 각종 정책과 부동산 제도 등은 역대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새롭게 선보이는 단골메뉴이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정부의 제도와 정책 바꿈은 성과가 좋을 때도 있지만 안 좋을 때도 있다. 제도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아니 좋은 제도의 판별기준은 무엇일까?
둘째, 경쟁을 조장하는 제도여야 한다. 경쟁력(competitiveness)은 경쟁(competition)에서 나온다. 어느 나라의 제도가 경쟁을 북돋지 못하고 약화시킨다면, 이웃 나라와의 경쟁은 물론 자신과의 시간 싸움에서 지게 된다.
셋째, 정치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 정치는 표를 지향한다. 정치인은 지지에 대한 보답과 정권 재창출을 위하여 정치적 노획물을 분배한다. 누구든 자신을 위한 재판관이 되지 말라(Nemo iudex in causa sua)는 법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과거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많은 나라들이 국가 발전의 틀을 만들기보다는 앞다투어 점령 세력이 남기고 간 자리를 차지하는 데 몰두하였다. 과거의 제도는 새로운 기득권을 위하여 유지된다. 진입 장벽은 남아 있고 국민들에게 경쟁의 기회는 오픈되지 않는다. 그 나라의 현재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다섯째,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국가가 일정 수준까지 지원하여야 한다. 공동체 일원에 대한 공동체의 당연한 책무일 뿐 아니라 그들이 경쟁력을 갖추어 시장에 참여한다면 그만큼 나라와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
여섯째, 제도의 현실 적합성이 중요하다. 다른 나라의 제도는 참고는 할 수 있지만 도입은 극히 신중하여야 한다. 간혹 국회 등을 보면 사안에 따라 OECD를 인용하고 스칸디나비아나 태평양의 어느 나라에서 하고 있으니 우리도 한번 도입해 보자고 하는 경우가 있다. 남의 옷이 좋아 보여도 내 몸에 안 맞듯이 남의 제도의 수입은 신중하여야 한다. 잘 자라던 귤도 물과 토질이 다른 북쪽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귤화위지·橘化爲枳).
우리나라는 어느 부문이든 제도가 너무 많아 탈이다. 중소기업 제도를 예를 들면 너무 가짓수가 많아 기업들이 제대로 알고 쓰기도 어렵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제도가 많고 복잡하여 제도 유지 비용은 물론 자원배분의 효율성은 낮아지고 규제 또한 많아진다. 이중, 삼중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를 쓰고 있는 기업들에 물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자기가 지원을 받고 있는 제도가 나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곱째, 어떤 제도가 상황에 따라 조령모개로 변하면 좋은 제도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제도의 시간불일치성(time inconsistency) 문제이다. 각종 지원으로 주택임대차 제도를 적극 장려하다가 어느 순간 규제로 돌아선다. 정부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떨어지고 임대차 시장이 필요한 때가 되어도 움직이지 않게 된다.
여덟째,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막상 많은 사람이 지지하여 경제정책을 바꾸었는데 그로 인하여 뿌리가 흔들리고 나라의 경쟁력을 잃어간다면 훗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좋은 뜻으로 만들었던 제도가 애물단지가 되고 자꾸만 고쳐 누더기가 되고 상황은 악화된다. 제도를 손대는 일은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산업통상자원부 부이사관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