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가 만든 하느님을 거부한 '비빔밥 영성'

2021-04-21 13:42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⑭ 이기상<下>

인터뷰어는 <내가 만난 다석> 시리즈 인터뷰의 대상자들에게 사전에 질문지를 보냈다. 종교와 사상에 관한 인터뷰라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듣자는 뜻이었다. 이 교수에게도 질문지를 보냈더니 A4로 21페이지나 되는 답변서를 미리 보냈다. 이 교수는 저서가 20여 권에 이르고 네이버 블로그에도 왕성하게 글을 올린다. 서면 답변만 정리해도 인터뷰에 충분한 분량이었지만 아주경제 스튜디오에서 유튜브 동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외출하기가 어려운 상황인데도 다석 사상을 알리는 인터뷰를 위해 이 교수는 어렵게 시간을 냈다. 서면 답변을 보충하는 질문도 던지고 유튜브용 질문도 몇 개 하다 보니 다른 인터뷰나 마찬가지로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서면 답변과 실물 인터뷰를 종합해 얼추 반반씩 섞인 인터뷰가 됐다.
-이 교수는 “위대한 철학자는 난세를 살며 난제를 풀려고 버둥거린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데요. 한국은 20세기로 넘어오며 국권의 상실, 해방과 독립, 동서 이념이 대결한 6.25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직도 남과 북은 대치 중입니다. 이러한 한국의 시대상이 다석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지요?
“‘철학은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뚜렷한 시대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대는 아테네의 위기였습니다. 위기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이죠. 내가 독일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세계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철학자는 여덟 사람입니다. 고대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 다음에 근대 칸트, 헤겔, 현대의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모두 위기의 시대를 맞아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현대 지구촌 시대에 온갖 어려움이 뭉친 곳이 한반도입니다. 동서남북의 이념이 충돌하면서 한반도는 아직도 지구촌의 화약고입니다. 그 시대에 다석이 태어났습니다. 다석과 함석헌 선생을 보세요. 함 선생은 ‘우리말로 철학하기’의 정신을 이어받아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내서 다석이 어렵게 말씀하신 것을 민중, 씨알이 알아듣는 말로 계몽했습니다. 다석은 단순히 시대정신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적 혜안을 갖추었습니다.
 

 2001년 우리말 철학사전을 펴내고. 맨 오른쪽이 편찬위원장인 이기상 교수.


함 선생은 시대적 역할을 충분히 하신 분입니다. 대신 함 선생의 민중신학은 그 시대가 지나가면서 지금 우리 시대엔 안 먹혀 들어가요. 그래서 새로 등장한 게 생태신학입니다. 다석은 큰 그림을 그리고 이미 이것까지 제안했습니다. 다석은 우주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체계적이고 깊이가 있고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어요. 함석헌 선생은 시대정신을 붙잡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투쟁해서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셨어요. 다석은 지금 이 현실을 바꾸기보다는 현실의 문제점을 파고들어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죠. 서양 철학식으로 말한다면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죠. 이 시대로 끝나는 그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볼 적에 ‘인간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우리가 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이런 근본적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거기에 다석의 위대함이 있다고 봅니다.”
-다석은 스스로를 모름을 지키는 ‘모름지기’라고 했는데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 말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지기’는 무엇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는 모름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다석은 스스로를 모름지기라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과 비슷하지요. 델피의 신탁은 소크라테스가 그 시대 최고의 현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 말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의 내로라 하는 유명한 현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토론하며 논쟁을 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번번이 그 논쟁에서 이겼고 자칭 현자들이 자기의 무지를 모르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은 자기의 무지를 알고 있다는 점이 그 현자들과 자신의 차이점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다석도 자신은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하고 탐구하며 진리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은 그저 모름지기일 뿐이라 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지키려 애쓸 뿐’이라는 것이죠.
다석은 일종의 우주인입니다. 여태까지 서양은 서양 중심적으로 이론을 정립했고 동양은 동양 중심적으로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서양 철학의 모든 것은 이성 중심적이고 그것은 더 나아가 인간 중심적이 됩니다. 그런데 다석은 이런 모든 중심을 벗어난 '우주의 살림지기'였습니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역할을 하는 진정한 우주인으로서의 살림지기입니다. 영성가로서 다석은 하늘과 하나됨을 추구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말지기’ 또는 ‘우리얼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중에서 ‘우리말지기’로서의 다석을 뒤쫓아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우리의 얼이 들어있음을 보았고 그 얼을 표현하려고 무척 애썼습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발명된 15세기 이전에는 필경사들이 양피지에 손으로 일일이 기록해 성경을 만들었다. 성경 한 권을 제작하는 데 200~300마리 양이나 송아지를 잡은 가죽이 필요했다. 그리고 필경사 두 명이 꼬박 5년을 매달려 성경 한 권을 썼다. 이렇게 만들어 값이 비싼 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돼 신부들이나 볼 수 있었다. 라틴어 성경이 각국의 민족언어로 번역될 계기는 인쇄술의 발달이 가져온 것이다. 활판인쇄술의 발명으로 책을 대량으로 종이에 인쇄하여 싼값에 보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성경의 민족어 번역이 서구에서 종교개혁과 근대화를 가져온 배경이 궁금합니다. 
“1999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사에서, 세계 석학 천 명에게 설문을 돌려 지난 천년을 돌아보면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 위대했던 책, 발명품 등등을 물었습니다. 설문에서 가장 많이 나온 사건이 1517년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언어혁명입니다. 언어혁명으로 인해 중세시대를 벗어나 근대시대를 열게 된 것이죠. 마틴 루터가 라틴어로 쓰여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라틴어로만 학문을 하고 라틴어로만 모든 종교 예배를 지냈어요.
신부 지망생들이 다니는 성신고등학교에선 라틴어를 영어와 동급으로 쳐줬어요. 가톨릭신학대학에서도 웬만한 신학과 철학 텍스트는 유럽에서 직수입한 라틴어였어요. 가톨릭은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문구를 외울 수밖에 없었죠. 이것을 마틴 루터가 깼습니다. 라틴어로 예배를 지내면 일반 대중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시대에는 신자들이 성직자를 통해서만 하느님에게 갈 수 있다고 했죠.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이 라틴어만 알아듣는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독일어를 못 알아들으니 통역이 필요하고 그 통역은 신부만 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마틴 루터 이전에는 성경을 지방어로 번역하면 사탄, 마녀라고 화형에 처했어요. 마틴 루터는 화형을 각오하고 성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민중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근대가 가지고 있는 민중성과 평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2019년 씨알학당에서 함석헌과 한국사상에 대해 강연하는 이기상 교수.


-이 교수는 세종의 한글 창제를 루터의 종교개혁에 비교하던데요. 어떻게 보면 세종은 문자를 새로 만들어냈다는 측면에서 더 큰일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종교개혁 같은 근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한글 창제도 정신으로만 보면 종교개혁과 동일합니다. 세종대왕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 모든 언어학자들이 놀라는 언어를 만들었는데, 그 당시 양반들은 이게 불쾌했던 것입니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죠. 자고로 언어를 지배하는 사람이 정권을 잡는 것입니다. 그리스 시대도 마찬가지로 그리스어를 아는 사람만이 자유인이었고,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은 노예였어요.
그래서 양반들이 이 계급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세종대왕이 돌아가시자마자 한글 퇴치운동이 벌어지잖아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그래서 문제라는 거예요. 한글로 근대화가 되었어야 했는데, 민중성, 평이성을 앞세운 씨알 정신, 민중정신으로 계몽되고 민중이 주인이 되었어야 했는데,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바람에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그런 소리를 듣잖아요. 서양에서는 모든 계급을 타파해서 모든 사람들이 민중 또는 시민이 되었죠. 그러나 한국은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게 우리 한국의 잘못된 근대화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먹고살기 좋아지면서 제일 먼저 한 게 족보 찾기였어요. 1985년에 우리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보냈더니 과제가 자기 집안의 족보 찾아오기였어요. 아시겠지만 조선시대에 족보 가진 사람은 5% 정도 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근대화가 되어 해방된 뒤에 보니 다들 족보가 있어요.” 
 
양반들의 천시로 한글로 근대화 안됐다
 
-이 교수가 ‘다석이 50년 후에 태어났다면 그가 옮긴 노자의 <도덕경>처럼 그렇게 어렵게 우리말로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제자 외에는 알아볼 수 없다’고 했는데요. 다석의 글이 왜 그렇게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지요?
“다석이 YMCA 연경반(성경을 연구하는 공부모임)을 할 때 하루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은 거예요.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함석헌 김흥호 선생이 깜짝 놀라 앞으로는 ‘우리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꼭 참석하자’고 했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다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남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하느님의 계시를 적어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다석일지>입니다. 다석 스스로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들은 것을 일단 기록에 남긴 거죠. 만약 그 당시에 이나마 기록을 안 남겨뒀다면 다석의 존재를 몰랐을 거예요. 다석의 심오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몇몇 제자들뿐이었어요. 김흥호 선생이 7권의 책을 냈습니다. 이후 박영호 선생이 일반인을 위해 쉽게 풀어써 문화일보에 80년대 후반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대중에게 다석의 위대함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다석의 글을 인용하려 해도 믿고 인용할 원전이 없었습니다. 다석일지는 대학노트를 찍어서 제본한 영인본이죠. 그래서 다석의 강의를 믿고 인용할 수 있는 학술본을 하나 만들자고 해서 다석 학회를 만들었습니다.”
 생전에 다석의 강의와 말씀을 많이 들었던 임락경 목사는 <우리 영성가 이야기>라는 책에서 '다석이 도덕경을 지금은 안쓰는 조선시대 말로 번역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석 글의 난해성(難解性)을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다석은 한글 맞춤법을 새로 만들다 시피하고, 뜻글자를 소리 글자처럼 쓰고, 이해가 어려운 조어(造語)를 남발하고, 심지어는 글자도 만들어썼다.  
-‘다석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를 들 수 있는가요?
“종교 다원주의가 1970년대에 들어서서 전 세계로 퍼집니다. 그러나 다석은 이미 1920~30년대에 그 사상을 가졌어요. 하느님을 제우스, 야훼가 아닌 그야말로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절대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존재에 대한 관계 맺음이 동양과 서양이 달랐습니다. 그 다름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다양한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종교 다원주의적 시각을 인정하게 된 것이거든요. 그것을 다석은 훨씬 먼저 알아본 거예요. 다석은 서구중심적인 하느님 신화를 거부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다석은 최소한 50~60년은 앞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기상 교수(왼쪽)와 대담하는 황호택 고믄.[사진=유수민 AD]


-다석은 어려서 서당에 다니면서 유교의 중요한 경전을 배웠고요, 불경도 공부했는데요. 이러한 동양적 사상의 기초 위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서 동서양의 종교를 회통(會通)했다는 표현을 하는데요. 이 교수가 쓴 글 중에 ‘이런 통합적 사고방식이 한국 사상의 독특함이며 현대사상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했던데요.
“서구 사람들이 발달시킨 부분은 지성과 이성입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이 인간을 너무 축소 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인 인간은 못 보고 이성, 지성으로만 보는 것이 서양 철학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특히 한국 사람은 감성, 영성을 발달시켰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이성 중심에서 벗어나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이 광기, 폭력, 섹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성적이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 특히 미셸 푸코 같은 사람은 광기의 역사, 폭력의 역사, 섹스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이성적인 것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됩니다. 이성의 반대급부(反對給付) 쪽으로만 가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의 짐승화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영성인 거예요.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이 한쪽으로 치우쳐진다고 해서 21세기가 새로운 영성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아놀드 토인비,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이 주장합니다.
이성이 아닌 감성, 영성의 통합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21세기의 추세입니다. 한국은 지성적, 이성적인 것은 조금 뒤처질지 몰라도, 감성적 영성적인 것은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뛰어납니다. BTS를 비롯해 한국의 문화인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요, 그 전에는 영어 아니면 팝송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영어 아닌 팝이 가능하다고 알려준 것이 J팝이었죠. J팝을 싹 누르고 들어온 것이 K팝이죠. 이제 K팝이 서양의 팝송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고 가고 있어요.
한국적인 영성은 바로 감성과 영성이 어우러지는 한국적인 독특함입니다. 감성과 영성을 아우르는 예술성을 서양 사람들이 알아보고 있습니다. 한국적인 영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이 숭산 스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숭산 스님은 생전에 4대 생불(生佛)로 통했어요. 그 다음에 음악가로 윤이상 선생을 꼽을 수 있죠. 한국에서는 버림받고 독일에서 살았지만 살아 있을 때 10대 작곡가로 꼽혔습니다. ‘음악은 우주의 소리’이고 작곡가는 우주의 소리를 받아 적는 사람이라고 했죠. 그 다음에 이응노 백남준 등등 20세기 후반을 밝힌 예술가들이 많은데, 그 예술가들이 하나같이 영성과 감성을 아우른 거예요. 나는 백남준 선생의 말 중 ‘비빔밥 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비빔밥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가서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비빔밥 정신에 통합 정신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어떤 이는 한국사람의 강점이 무어냐고 하면 ‘글로벌 마인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강대국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글로벌 마인드가 뛰어났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글로벌 믹스’, 이것이 한국적 정신입니다. 이것을 ‘비빔밥 정신’이라고 했던 게 백남준 선생님이고, 그 제자가 강익중 선생입니다. 그 두 분이 세계적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 사상 예술 모든 면에서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를 함께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웠어요. 절에 가면 맨 위에 산신각이 있잖아요. 일반 서민을 위해 무속적인 전통을 인정한 것입니다. 유교가 판을 치던 시대에도 불교적 제례를 인정하고 허용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종교뿐 아니라 사상도 통합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지구촌 시대에 감성, 지성, 이성, 영성을 아우르는 ‘통합적 인간’의 자질을 잘 갖추고 있는 사람이 한국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감성, 영성을 아우르는 ‘한국적 인문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나는 말합니다.”

다석 연구 김흥호 박영호 업적 크다

-오늘날 다석에 관한 자료가 이 정도나마 체계화한 데는 직제자인 김흥호 박영호 두 분의 업적인 크다고 들었는데요.
“김흥호 선생은 엄청난 저서들을 펴냈습니다. 선생의 사상적 깊이와 지평에 그저 감탄만 할 뿐입니다. 선생을 따르는 제자들도 많아 선생의 모든 강의를 녹화 녹음하여 저서로 출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을 통해 접근하기 어려운 다석의 저술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박영호 선생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석 사상 안내서를 끊임없이 집필해서 출간했습니다. 나도 박영호 선생의 다석 시리즈는 나오는 대로 구입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지금 후속 작업으로 박 선생이 준비하시는 <다석 용어사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 사전이 나온다면 <다석 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 선생은 어려운 다석 원문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쉬운 우리말로 풀어내는 탁월한 재주를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터뷰를 끝내고 인근에 있는 한일관 경복궁점으로 가서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이 교수의 인터뷰에 백남준의 비빔밥 문화론이 나와서인지 세 사람의 메뉴가 통일됐다. 1939년에 문을 연 한일관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식당이다. 놋쇠그릇에 담긴 비빔밥이 재료도 정갈하고 독특하고 맛이 있었다. 다석의 종교철학도 동서양의 재료를 놋쇠그릇에 넣어 섞고 통합하는 사상이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