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환자가 하루라도 더 살려는 건 다석 알리기 위해서죠
2021-04-07 17:03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⑫ 최성무 목사<下>
독립운동가, 농민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성천 유달영(1911~2004)은 함석헌과 함게 다석이 아끼던 제자다. 유달영은 농장이 경부고속도로에 편입되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성천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좌우명이 호학위공(好學爲公)이다. 열심히 배워서 공익을 위해 봉사하자는 것이다. 다석사상연구회는 매주 화요일 서울 여의도 성천문화재단 사무실에서 공부 모임을 갖고 있다.
“2015년 다석 공부를 하려고 한국에 왔거든요. 한국에 나온 동기가 다석 사상을 제대로 공부해 한국에 널리 보급해보겠다는 것이었어요. 20년 전에 처음 접했던 다석 사상의 고향을 찾아온 거죠. 호주에서 심장병으로 쓰러진 적은 있었지만 건강은 좋은 편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암이 발생했죠.
내가 참여한 것은 박영호 선생이 성천문화재단에서 다석 강의를 시작한 지 20년 됐을 때였어요. 그런데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서로 잘 모르고 지내더라고요. 강의를 듣고 각자 헤어지는 거예요. 서로가 인사는 하고 지내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내가 횡적인 조직을 만들었어요. 그게 다석사상연구회가 된 거죠. 박영호 선생의 승낙을 받아 내가 대표가 됐습니다. 지금은 20~30명 회원이 있습니다.”
성천문화재단은 ‘진리의 벗이 되어’라는 계간지(季刊誌)를 발행한다. 141호(2021년 봄호)까지 나왔다. 1년이 4계절이니까 지령(誌齡) 35년을 넘긴 잡지다. 유달영이 살아 있을 때는 매호 ‘성천 단상’이라는 글을 썼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아포리즘(잠언)이 많다. 이 중에는 ‘훌륭한 신앙은 종교 냄새가 안 난다. 애국심은 반드시 인류애로 연결돼야 한다. 재산 약간 부족한 상태가 최선이다’라는 글도 있다. 최 목사가 좋아하는 글이다.
“제자들 중에서도 유달영 선생이 다석 사상 전파를 위해 크게 공헌했습니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양쪽 다요. 다석사상연구회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천문화재단에 사용료를 내려고 했더니 유달영 선생이 일절 돈을 받지 말라는 유지(遺志)를 남겼다더군요.”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이 재건국민운동을 시작했다. 먼저 함석헌에게 본부장을 맡아달라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유진오를 세웠으나 만족스럽지 않자 유달영에게 요청했다. 유달영은 안 하려고 하다가 다석에게 자문하고 수락했다. 그리고 다석을 중앙위원으로 모셨다. 그러다 유달영이 본부장을 물러나자 다석도 곧바로 그만두었다(다석 전기). 다석은 그 정도로 유달영을 아끼고 신뢰했다.
유달영의 저서 <행복의 발견>에는 신문기자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을 인터뷰하면서 “왜 하늘나라에 목사들이 안보이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느님이 “그들은 세상에서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하늘나라에서 못 온 것”이라고 대답했다. 유달영은 ‘가장 비참한 것은 거짓된 교리에 묶여 정신적 노예가 된 것이다. 모든 성자들이 말하는 진리의 말씀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라고 이 글의 결론을 내린다.
-최 목사는 17년간 목회를 했는데요. 일부 목사들이 거짓 교리의 노예가 돼 있다고 할 수 있는지요?
“위선자가 많이 모인 집단이 목회 현장이라고 보면 돼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구약은 이스라엘 역사 책이죠. 신약은 바울의 기독교 서적입니다. 지금은 다 그렇게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합니다.”
한국에 나가 쓸 돈을 벌기 위해 3년 동안 목회를 하지 않고 열심히 노동을 했다. 그렇게 1억5000 만원가량 모았다. 인터뷰어가 “돈 버는 수완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최 목사는 “안 쓰고 모은 거죠”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1억5000 만원이면 전원주택을 살 수 있대요. 전원주택 살 돈을 모아 한국에 가자고 해서 왔는데 막상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인천에 거처를 정했지요. 목회에서 손 딱 떼고 일반인과 똑같이 땀 흘려 돈 벌어서 다석에 올인 하려고 나왔는데, 아시다시피 만만치 않네요. 복부암이 있어서 5일 간격으로 항암 치료를 받습니다. 인천에서 지하철 타고 여기까지 오는데 몇 번 쉬었다가 왔어요. 지하철 광화문역 계단 올라올 때 넘어질 뻔했습니다. 열정은 있는데 뜻대로 안 되네요.”
“내가 목회하던 교회도 교인의 95%가 불법 체류자였어요. 적발되면 바로 잡혀가는 거예요. 관광비자는 6개월 후에 비자가 소멸돼요. 비자가 없는 삶은 범죄자 아닌 범죄자입니다. 무비자로 불안에 떨다가 교회에 나오면 일자리도 생기고 비자 없는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죠. 40~50명 식구들이 거의 한 가족처럼 지냈지요. 아이들은 일정한 연령이 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죠. 그럼 영주권을 가진 아들의 부모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죠. 그렇게 정착한 교민들 중에서 변호사 회계사도 나왔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들렀을 때 나를 찾아오면 인생의 보람을 느끼죠.”
'이단목사' '해결사 목사' 소리 들으며 다석사상 전파
-호주하면 백호주의가 연상되고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도 있다고 하는데요?
“인종차별 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인종차별을 받는 것입니다. 호주 사람들은 청소할 때 장갑을 안 껴요. 그런데 한국 청소부들은 장갑을 끼죠. 저도 장갑을 안 끼고 청소했어요. 변기를 맨손으로 닦았죠. 오물이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면 청소하지 말아야죠. 자기들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맨손으로 거리낌 없이 닦아내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죠.”
-호주에서 17년간 목회하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았을 텐 데요?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면 부모가 일터에 간 사이에 방치되잖아요. 그래서 학교 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비자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 38명을 내가 학교에 넣어줘 소문이 났어요. 그 아이들이 내 손자, 자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 못 들어갈 때 학교에 가서 교장을 면담하는 거예요. 처음에 ‘노’ 했던 교장이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교감을 불러서 비자가 없는 아이를 ‘오늘부터 수업 받게 하라’고 해요. 이런 경험을 하면 신앙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체감하겠더라고요.”
-호주에서 ‘해결사 목사’ ‘이단 목사’라는 별명이 붙었다면서요?
“학교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내다 보니까 해결사 목사가 됐죠. 내가 교단에 목사 라이선스만 반납 안 했지 완전히 쫓겨났잖아요. 나를 보는 사람마다 피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단 목사로 소문 난 거죠. 무슨 일이든지 예수를 품고, 진짜 하나님의 전능함을 믿고 목회를 한다면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의로운 목사는 자기 일에 무능합니다. 자신의 일에는 무능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는 전능해야 해요.”
-목사들도 제 머리를 못 깎는 군요.
“헌신적으로 목회하는 분들 보세요. 자신의 일은 아무 것도 못해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잠자리 하나 정할 데가 없다고 그랬잖아요. 자기가 무능할 적에 능력이 나오는 것이거든요. 나는 지금도 암세포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서 남들이 보면 기적 같겠지만 항암치료를 5년째 받고 있어요.”
-다석은 성경에도 해박했지만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 동양철학에도 밝았는데요. 다석이 동서양의 종교를 회통(會通)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불경이나 성경이나 맥이 같아요. 쭉 연구하다 보면 극락이나 천국이나 같은 것이고. 다석은 궁극적으로 한 점에서 만난다고 했죠. 유교도 공자가 천생덕어여(天生德於予) 라고 해서 ’하늘의 덕이 나를 낳았다‘고 했죠. 하늘의 덕이 뭐냐, 성령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성령과 공자의 덕(德)과 석가의 불성(佛性)이나 이름만 다르지 다 똑같습니다. 서로를 보완해야지 싸울 것이 아닙니다. 다석은 동서양의 종교를 회통했습니다. 최제우의 동학사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석 사상과 일맥상통하죠.”
-최 목사가 웹진 <새길 이야기>에 다석이 ‘51세에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 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고 썼던데요. 깨달음과 거듭남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다석의 삼각산 체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나는 목회하기 전에 방탕 생활을 많이 했어요. 술도 많이 먹고…. 그 대가를 지금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활했지만,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서는 어느 순간부터 맥주 한잔도 안 넘어가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건 내 힘, 내 의지대로 안 되는 거예요.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식색(食色)은 내 의지로 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끊어준 것이라 생각해요. 암 수술을 해서 먹는 밥통을 완전히 없애버렸잖아요. 식에서 완전히 해방됐죠. 내가 방광을 두 차례 수술받아 떼어 냈잖아요. 이후 식색을 내가 인위적으로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통째로 없애버리지 않았나 스스로 생각하는데요. 하여간 느낀 사람만이 알 수 있지, 설명을 할 수 없어요. 다석의 삼각산 체험도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어요."
-다석의 ‘하루살이’를 풀이하면….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잖아요. 오지 않은 내일이 오늘에 와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미래와 과거와 오늘이 같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영원이라는 것은 현재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직선 상에 같이 있는 것이에요.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작을 발견한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설이지, 실제로는 영원 속에 살다 영원 속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원의 하루가 오늘입니다. 하루를 열심히 잘사는 것이 영원을 잘사는 것이죠.”
하루 하루 열심히 살면 영원을 잘 사는 것
-다석은 평생 무명 베옷 입고 고무신을 신었죠. 그 시대 서민의 전형적인 모습인데요. 그리고 어디든 걸어 다니고… 잣나무 널판에서 자고... 해혼했지요. 기독교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고행(苦行)을 하는 불교의 구도자 같습니다.
”잘 지적했는데요. 그런 면을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렵겠지요. 다석의 신앙과 행동은 우리가 따라하기에는 거리가 있다는 시각이 있어요. 노동자가 일일일식하면 일을 못 하잖아요. 자기 형편에 따라 하는 것이죠. 저도 호주에서 1식을 해봤어요. 청소를 하면서 1식을 했더니 영양실조로 쓰러졌어요. 그래서 멈췄죠. 미련하게 해봤더니, 2년 정도는 그렇게 하겠는데 나중에는 그냥 쓰러지더라고요. 그러나 그분 나름대로의 상황에서 신앙의 형태를 가졌는데, 거기에서 본받을 것은 본받고, 따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석이 늘 무릎 꿇고 경건한 자세로 산 것에 대해서는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 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라고 했는데요. 다석이 말한 얼나를 찾기 위해서는 넓은 문 놓아두고 굳이 좁고 험한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요?
“자기 얼나를 찾으려면 탐진치(貪瞋痴)로부터 벗어나야 하거든요. 예수도 석가도, 노자장자도 모두 탐진치에서 벗어나라고 말했는데, 세상 살면서 벗어나기 쉽지 않잖아요. 이런 것을 초월해서 우리가 얼나를 찾는다는 것은 나에게서 탐진치가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좁은 문이죠. 물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해요. 성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물질보다 어려워요. 명예욕, 과시욕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탐진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는 건 다석이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영적 교만이라고 하셨던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요?
“내 신앙이 존중 받으려면 우선 타인의 신앙도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 홀로 충만한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같은 교인 중에도 믿음이 있다, 없다 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영적 교만이 지금 교회의 코로나 대응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믿음은 서로가 다른 대로 나름대로 같다고 봐주고 인정해줘야지, 내 믿음만 옳다 하면 안 됩니다.”
-다석은 공자 석가 노자 다 위대한 스승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스승은 예수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다석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석 사상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에 바탕을 두었어요. 누구든 제일 먼저 들어온 신앙이 자리매김하게 되어있습니다. 나도 신앙생활 할 적에 통일교에 상당히 매료된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 2,3학년 쯤이었죠. 거기서 탈출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현재는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거기에 대한 미련이 조금 있어요. 자리매김한 신앙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다석도 16세 때 입문한 기독교의 정신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신채호 선생 여러 사람이 그에게 불경을 읽어보라고 권유했지요. 다석은 불경과 노장사상의 진리를 공부했지만 기독교 범주 안에 흡수하고 받아들여서 회통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석사상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기독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라는 분과 석가나 노자나 장자를 견줄 수 없는 것은 영적인 문제에 들어가서 해결해야 해요. 예컨대 석가나 노자나 장자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리매김하기에는 왠지 뭔가 그렇잖아요? 다석은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심중에 두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암 투병 중인데…죽음의 그림자가 겁나지 않나요?
“처음에 위암이 생겼을 때 병원에서 말기(末期)래요. 다른 곳으로 전이 된 것을 말기라고 해요. 췌장으로 전이되어서 췌장까지 잘랐어요. 췌장을 자르면 물 한잔도 못 먹어요. 췌장액이 나와서 다른 장기를 녹이기 때문에. 그래서 41일간 금식했죠. 항암제를 1년 반 동안 안 맞고 멋대로 있다 보니 간으로 전이됐어요. 그런데 항암치료를 하고 3개월 만에 사라졌어요. 그렇지만 끝나지 않고 방광으로 암이 넘어갔어요. 지금 방광을 두 번 수술했어요. 그러다 보니 장기를 둘러싼 복막에까지 암이 번졌어요. 처음에는 진짜 다석처럼 초월한 마음으로 견뎠는데, 이제 그게 안 되더라고요. 항암주사를 일주일에 두 번 맞은 적도 있지요. 몸이 못 견뎌요. 5일 만에 맞았는데 완전히 내가 아니에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죽는 것 외엔 방법이 없어요. 신앙인이 아니라면 자살한 사람들이 이해가 되겠더라고요. 오늘 일주일 만에 외출한 거예요. 이를 악물고 나왔습니다. 다석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더 살아야 할 텐데요.”
그는 “다석사상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다석사상연구회 회원들에게 우리가 불쏘시개가 되고 거름이 되자고 말하고 있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