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투기의 역사] 1970 강남, 2021 광명시흥
2021-03-17 08:00
"강남 땅 사면 떼돈 번다" 소문에 투기 열풍
반포주공 입주 위해 이름 빌려 응모하기도
'강남 복부인'이 1·2기 신도시 몰려 땅 투기
반포주공 입주 위해 이름 빌려 응모하기도
'강남 복부인'이 1·2기 신도시 몰려 땅 투기
우스갯소리로 "부동산 가격은 조선 중종 이후 500년간 폭등해 왔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종 30년과 37년 두 차례에 걸쳐 집값 급등에 대한 걱정을 토로한 기록이 있다.
성종 12년에는 "죽은 지중추부사 정효상이 소격서 앞에 집이 두 채나 있고 재상들이 비슷한 짓을 하니 서민이 어렵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다주택자들을 주택 부족의 주범으로 보고 이를 비난한 셈이다.
500년 전 역사가 50년 전, 그리고 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부동산 성장과정이 곧 '투기의 역사'인 셈이다.
'말죽거리 신화'의 시작
그러나 1960년대 서울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든 시민들로 주택난 등 도시문제를 겪었다.
강북 지역에 집중돼 있는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시작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강 남쪽의 서울은 영등포까지였다. 한강 건너 강남은 전화나 전기조차 들어와 있지 않은 말 그대로 시골이었다.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 건설공사 전 3.3㎡당 200~400원 하던 압구정·신사·잠원동은 공사 착공과 함께 오르기 시작해 1년 만에 3.3㎡당 3000원을 넘게 됐다. "말죽거리(양재동)에 땅을 사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1970년 3.3㎡당 4500~6000원이던 강남 땅값은 남서울 계획 발표를 계기로 급등해 1971년에는 1만4000~1만6000원까지 올랐다. 1년 사이 2~3배 급등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정부가 부동산 투기 붐을 조성한 셈이 됐다. 이 같은 강남 땅값 폭등 현상을 '말죽거리 신화'라고 불렀다. 그렇게 강남 부동산 불패의 서막이 열렸다.
강남 졸부와 복부인의 등장
'졸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강남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도시 개발로 '졸지에 부자'가 됐다.
그러나 막대한 차익을 거둔 대부분은 강남 개발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강남땅을 매입했던 고위 공직자, 정치인, 개발업자였다.
1970년대 강남 개발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이전되면서 '복부인'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고위층과 전문직 종사자들은 체면을 중시하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전면에 직접 나설 수 없어 부인과 딸들을 대신 내세운 것이다. 이들은 핸드백 속에 고액수표를 가득 넣고 신흥개발지와 아파트 지대를 누볐다.
활동범위는 주로 강남·잠실 지역이었지만 여의도 아파트를 사서 일주일 만에 200만원의 차익을 남기거나, 강북에서 허름한 900만원짜리 주택을 산 뒤 이틀 만에 100만원을 얹어 되파는 일도 횡행했다.
1980년대에는 '떴다방'이나 '파라솔 부대' 같은 이동식 부동산 중개업까지 성행하며 아파트 분양 당첨 현장에서 분양권을 사고 파는 행위도 흔했다.
너도나도 강남 투기··· 분양권 웃돈 거래 등장
1970년대 초반 부동산 투기가 기업가·고위관료 등 특수계층에 의해 주도됐다면,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1970년대 중반부터는 투기 열풍이 중산층으로 번지게 된다.
1974년 완공된 반포주공 1단지는 강남 개발의 실질적인 시발점이 된 아파트이자 핵심 단지 중 하나다. 반포주공은 높은 인기를 끌었는데, 단지의 일부인 반포차관아파트의 경우, 1490가구 모집에 수천명이 몰려 경쟁률이 5.6대1을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경쟁률이었다.
무주택자를 대상으로 분양된 전용면적 72㎡는 집을 가진 사람들이 친인척의 이름을 빌려 응모할 정도로 편법과 불법이 성행했다.
집이 있는데도 동사무소 직원에게 300~5000원의 뒷돈을 주고 전·월세를 사는 것으로 서류를 꾸며 당첨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웃돈을 받고 입주권을 팔아버린 사람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반포차관아파트는 임대아파트라 팔거나 임대할 수 없었는데도 웃돈이 아파트 가격(360만원)의 25%까지 붙어 최고 450만원을 호가했다.
반포주공이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대단지 아파트라면, 1976년 완공된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조성 당시부터 상류층 거주지로 각광받은 단지였다. 그때는 보기 드문 전용 131~198㎡의 중산층을 위한 대형 주택형으로 지어졌다. 부동산 투기 열풍 속에서 현대아파트는 명품 아파트로 이름이 자자했다.
그러나 곧바로 특혜 분양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한국도시개발은 1512가구의 아파트를 건설, 952가구는 무주택 사원에게 분양하고 나머지 560가구는 시민들에게 분양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아파트 분양권에 높은 프리미엄이 붙으며 인기를 끌자, 한국도시개발은 무주택 사원에게 분양해야 할 952가구 중 291가구만 분양하고 나머지 661가구를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기업인 등에게 불법적으로 분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은 강남의 고급아파트 이미지를 견고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높으신 분들이 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 1977년 착공한 5차분은 준공도 되기 전에 3.3㎡당 30만원이었던 분양가가 3배 이상 뛰어올라 100만원 시대를 열기도 했다. 12년 뒤인 1989년에는 3.3㎡당 1000만원을 돌파했다.
아파트에 웃돈을 얹어 거래를 하는 일이 갈수록 흔해졌다. 1977년 잠실 아파트는 72㎡에 370만~700만원이, 1978년 압구정 한양아파트는 161㎡에 1000만원의 웃돈이 붙었다.
서울 전역에 '아파트 불패 신화'
부동산 투기 붐이 일면서 강남뿐 아니라 서울 전역에 '아파트 불패 신화'가 생겨났다. 1977년 화곡 시범아파트 분양 경쟁률은 178대1, 여의도 목화아파트는 45대1을 기록했다.
1970년대 후반 중동 건설경기 호황으로 늘어난 유동자금이 아파트로 몰려 '투기열풍'을 빚기도 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가장 큰 주택형인 전용 156㎡가 571만원에 분양됐는데, 입주 두 달 만에 1000만원을 넘어섰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에 따르면 한 부동산업자가 89㎡ 아파트 100가구를 현금 2억원을 내고 신청하는 일도 있었다. 청약 결과 발표 현장은 "당첨되면 웃돈을 얹어 팔아주겠다"고 명함을 돌리는 중개업자들로 북적였다.
이때부터 이미 아파트 가격 상승은 임금 노동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노동연구원과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1970~1980년대 실질임금은 2배 올랐으나 전국 지가는 15배 올랐고, 강남 지가는 200배가 폭등했다.
1기 신도시, 발표 전 '강남 복부인'이 싹쓸이
1989년 1기 신도시와 함께 시작된 신도시도 투기로 점철됐다. 서울 집값 하락이라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하게 강남 복부인, 정부 부처 고위 공무원, 토지공사의 먹잇감이 돼버렸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성남시 분당, 고양시 일산, 부천시 중동, 안양시 평촌, 군포시 산본 등 5개 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서울 아파트 가격은 강남을 중심으로 크게 올라, 서초동 삼풍 아파트 전용 165㎡가 1987년 9월 2억원에서 1989년 4월 4억5000만원으로 두 배 이상 폭등했다.
신도시 발표에 앞서 정부가 "땅으로 재산증식을 하겠다는 생각을 뿌리뽑겠다"며 토지거래실명제를 도입했으나 정부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당시 다수 언론은 "정부가 극비리에 마련한 신도시 계획마저 발표되기 최소 열흘 전부터 약삭빠른 투기꾼들이 몰려 한바탕 북새통을 치렀다"며 사전 정보유출 가능성을 제기했다.
기밀누설 의혹이 돌자 검찰, 국세청 등이 합동 조사를 벌였으나 사전정보누설은 무혐의로 끝났다. 정부 부처 국장급이 조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뚜렷한 혐의가 없어 내사를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투기 레이스는 계속됐다. 아파트 입주권과 보상을 노리고 개발지구로 무단 전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비닐움막에 판잣집이 무더기로 생겨날 정도였다.
안양 평촌과 군포 산본지구는 신도시 개발 발표 후 한달 만에 1500가구가 늘어나는 등 무단 전입으로 몸살을 앓았다. 판자, 비닐 등으로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12시간 동안 판잣집 33채씩 이틀간 총 66채를 지어 1채에 200만~400만원씩 팔다가 덜미를 잡힌 업자도 있었다.
투기가 들끓자 정부는 1990년 검찰, 경찰, 국세청 등으로 구성된 '부동산투기사범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다. 수사본부는 1년간 1만3000여명을 적발하고 987명을 구속했다. 이 중 공직자는 131명에 달했다.
분당 개발도면을 빼내 판 한국토지개발공사(토개공) 간부 A씨도 수배됐다. A씨는 부동산업자에게 분당 등 택지개발예정지구 2곳에 대한 개발계획 도면과 관련 자료를 복사해 1100만원을 받고 넘겨줬다. 또 다른 토개공 간부는 개발정보를 이용한 상습 땅투기로 50억원대의 재산을 모아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군인도 투기에 가세했다. 대령 등 현역 군인과 군무원 등 21명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 일대 토지가 군사시설보호구역에서 해제된다는 정보를 사전에 빼돌려 투기를 하는 식으로 총 31억6000여만원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본 사실이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땅투기 1번지, 2기 신도시
2003년 참여정부가 성남 판교 등 2기 신도시를 발표하자, 1기 신도시 때 벌어졌던 투기판이 되풀이됐다.
판교는 신도시 발표 후 1년 새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신도시 발표 전 신도시 예정지 판교 주변 땅값은 3.3㎡당 500만원 선이었으나 발표 후 3.3㎡당 1200만원까지 폭등했다. 김포와 파주신도시 주변도 배 이상 오르며 택지개발지구 주변은 땅투기 1번지가 돼 버렸다. 참여정부 때는 행정수도 이전까지 거론되면서 충청권 땅값도 급격하게 올랐다.
판교신도시 인근 녹지를 매입해 전원주택 부지 등으로 되팔아 150여억원을 챙긴 전원주택 업자와 부동산 브로커 등 16명이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들에게서 땅을 매입한 137명 중에는 건설교통부 고위 공무원을 비롯해 대기업 전현직 이사, 전현직 은행장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다수 섞여 있어 국민들의 충격이 컸다.
이에 정부는 2005년 7월 부동산 투기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고, 검찰·국세청 등으로 부동산 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했다. 검찰이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벌인 것은 15년 만이었다. 이때 검찰이 단속한 부동산 투기 사범 중에는 성남 분당의 임야가 그린벨트 지역에서 풀린다는 정보를 부동산업자에게 제공하고 1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건교부 5급 공무원 등 총 30여명이 포함됐다.
2006년에는 토지공사 직원 9명이 파주 교하 및 화성 동탄 등지에서 내부정보를 이용해 택지 매입에 따른 보상용으로 주어지는 이주자택지를 차명으로 사들인 뒤 되파는 수법으로 수천만원의 차익을 남긴 것이 알려져 비난을 받았다.
'강남 복부인'도 다시 등장했다. 정부가 서울 거여·장지·마천동 일대에 강남 신도시를 건설키로 하자, 속칭 '강남 아줌마부대'는 부동산개발업체 등과 짜고 조직적으로 부동산을 대량 매입하기도 했다.
1·2기 신도시는 현재 3기 신도시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정치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지자체 공무원 등의 땅 투기 의혹과 쏙 빼닮았다. 1·2기 신도시 모두 공직자의 투기 비위가 터져 나오고, 이때마다 국민들의 공분을 샀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 3기 신도시에서 투기사(史)가 되풀이되는 이유다.
3기 신도시에 대한 공직자들의 투기수법은 과거보다 더 교묘해졌다. 왕버들나무를 심거나 공동매입해 필지를 분할하는 등 제도 허점을 파고들었다. 전문가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더구나 앞선 신도시에서 일반 투기꾼이 다수였다면 3기 신도시에서는 LH직원뿐 아니라 지자체 공무원, 정치인 등 내밀한 정보를 손에 쥔 이들이 개인의 잇속을 챙겼다는 점에서 투기의 죄질이 더 나빠졌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