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9)] 우리말 5개로 신학사상을 혁명하다
2021-03-08 10:42
다석사상의 재발견 - 정음사상(下) - 우리 말글 신학의 정수,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재조명하다
서구 기독교는, 서구 언어로 보편의 신을 찾은 것
한국의 철학자 사상가 중에서, 우리말과 글의 특징과 개념을 활용해 독창적 사유체계를 만들어낸 사람은 류영모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를 연구하는 여러 후학들은, 류영모의 '우리말 철학하기'에 갈채를 보냈지만, 그런 언어 주체성이 어떻게 그의 사상을 완성시켰는지를 밝혀내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 같다. 그가 활용한 우리말과 글이, 다른 언어 문화권 철학과 차별화를 이뤄냈는지를 밝혀야 비로소 그 작업이 의미있기 때문이다.
류영모가 종교사상의 개념들을 우리 언어로 심화시킨 그 생각의 바탕에는, 인간 신앙의 일원성(一元性)에 대한 그의 신념이 있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신앙은 저마다 다른 신앙적 대상(신(神))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동일한 신의 지향'에서 우러나온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세계 각지의 문화적 다원성(多元性) 안에서 변용을 거쳐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하면, 동서양의 많은 영적인 감성들은 동일한 신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문화의 차이와 신앙을 추구하는 방식의 차이가, 다양한 변이를 일으킨 결과 다르게 보이는 믿음과 사상 체계가 생겨났다. 이 점에 대한 류영모의 확고한 신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가 우리 언어로 철학한 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짚기도 어렵다.
류영모가 한글 혹은 우리말로 종교적 사유를 펼친 일은, 단순히 애국애족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한글과 우리말로 신에게로 교통하는 길을 찾으러 나선 결과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서구 기독교를 통해서 오히려 본질적인 통찰을 얻었기 때문이다. 서구 언어의 소통수단으로 삼은 기독교가 '서구의 하느님'을 향한 종교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하느님을 서구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체계화해놓은 종교라는 인식이다.
"한글엔 하늘의 계시가 있다"고 말한 류영모
그는 말했다. "우리 한글은 참 이상합니다. 우리말에는 하늘의 계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다석강의'). 이 말에 대해 다석을 연구한 학자 이기상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만이 만들어낸 말과 글은 어느 말이나 어느 글이나 하느님의 계시로 안 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 말이 생긴 것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의 기도에서 얻은 산물이다. 글은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도구이다." 이런 말들이 품고 있는 핵심 또한, '인간 언어'와 '신의 말씀' 사이의 내통하는 '신비(神秘, 신의 비밀)'를 드러낸다. 천지창조는 신의 말씀을 통해 이뤄졌고, 신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신-인(神-人) 사이의 영적 교통을 가능케 했다. 인간의 말과 글은, 신의 말씀을 받아쓰면서 터득하고 발전시킨 인간 고유의 소통체계라고 볼 수 있다.
류영모는 정음(正音, 바른 소리)을 강조했다. 정음은 신의 말씀이며, 그것을 받아쓰는 인간의 말이다. 세종이 만든 한글의 원래 명칭이 '훈민정음'인 것에 류영모는 감명을 받았다. 글자를 만든 군주의 이 뜻이, 바로 말씀으로 천지를 만든 신의 뜻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 신의 뜻을 전달하는 영성 언어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여기에 근거했을 수 있다. 그는 우리말과 글에 하늘의 계시가 있다는 근거로, 한글 모음이 · (하늘) ㅡ(땅) ㅣ(사람)을 가리키는 형태로 고안되었다는 점을 든다. 이 천지인(天地人) 사상은, 우리 겨레의 고유 경전으로 추정되는 천부경(天符經)의 근본사상이기도 하다.
류영모의 '언어사상'은 신의 말씀을 한글과 우리말로 풀어내는, 그의 영성 언어화 능력의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한글과 더불어 우리의 생각과 개념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쓰인 한자를 결코 배척하지 않았다. 그 또한 우리의 영성 언어를 이루는 중요한 말들이며 사상의 수단이라고 여겼다. 이런 관점은 불교와 노장, 유교와 같은 중국이나 인도의 사상이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보(相補)하면서 때로는 보다 설득력 있게 절대세계의 신을 증거하고 있다고 보았던 관점과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
영적인 우리말을 찾아낸 '언어혁명가'
▶ 얼나 = 류영모가 정립한 가장 중요한 '영적인 한국어'는 '얼나'다. 류영모 사상이 최근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되는 까닭은, 2000년 이상 인간을 번성하게 해온 '밀착적 인간문명'의 '좁은 사이'를 코로나 바이러스가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의 종교 또한 신과 인간의 단독자 대면이 아닌, 밀착한 인간 군집(群集)이 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제의(祭儀)처럼 여겨져 왔다. 이런 종교적 형식이 코로나를 번성시키는 난감한 역설을 불렀다. 류영모는 교회의 이런 형식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 바탕이 바로 '얼나' 개념이다.
얼나는 인간 개개인의 생각 속에 들어있지만, 신과 개인을 잇는 매체이다. 다석에게 이런 사유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말의 힘일지도 모른다. '얼'은 한자의 '영(靈)'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얼은 '알(卵)'이며 '속(내면)'이며 '씨앗'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줏대'이며 '영혼'이며 '신의 정수'이다. 이 '얼'이라는 한 글자가 있었기에, 다석은 종교적 사유를 폭넓고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었다. 서구기독교에서 정착시킨 '성령'이란 말에는, '나'를 가리키는 뜻이 없다. 그런데 예수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성령을 받은 존재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부여받았기에 '나'라는 자아관 또한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그 '나'와 신의 뜻인 '성령'을 한 존재 속에서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자(人子)였다. 이 개념의 합일을 뚜렷이 하기 위해 성부-성자-성신이라는 삼위일체의 로직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류영모의 '얼나'는 굳이 그런 설득의 장치조차 필요없는 간명한 개념이다. 얼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나는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의 얼이라는 일견 모순적인 개념을 '얼나'라는 낱말로 빚어낸 것이다.
신의 존재론을 규명한 네 가지 열쇠말도, 우리말을 살린 것이다.
▶ 없이계심 = '없이 계심'은 신의 존재 논증이다.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서구 사회에선 오랜 질문과 회의가 있어 왔다. 신의 존재를 신앙하는 것이, 종교의 핵심일 정도로 그 문제는 치열하고 치명적인 중요함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다석은 '없다'는 말과 '계시다'는 말을 양립시킴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드러냈다. '신이 없다'는 것은 상대세계의 당연한 관점이다. 절대주(絶對主)가 상대세계에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절대세계의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신이 계신다'는 말을 붙였다. 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이 상대세계에 없는 것일 뿐이다. '없다'는 상칭(常稱, 높이지 않은 말) 대신 '계시다'는 경칭으로 한 것을 보라. 인간이 감관으로 찾으려 하는 실물적 존재는 실물의 상태인 '없음'으로 표현했고, 참된 절대적 존재의 양상을 '계심'으로 표현했다. 신의 존재론에 대한 류영모의 공로는, 존재나 부재냐의 양자 택일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차원이 다른 부재와 존재를 양립하는 방식으로 간명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없이 계심'은 우리말의 의미를 심오하게 한, 독창적이면서도 놀라운 철학적 언술이었다. 그 말은 또한 노자의 사유인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있음이 없는 것은, 사이가 없는 것 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을 근거로 삼아, 신이 상대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인 '성령'의 작동을 정밀하게 설명해내는 효용이 있기도 하다.
▶ 빈탕한데 = 인격신의 오래된 전통과 상상력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서구적인 신앙의 애매한 '신'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낸 말이 있다. 한글 표현이지만 류영모의 창안에 가까운 낱말 '빈탕한데'이다. 이 말의 뜻을 풀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빈'은 허공을 가리키며, '탕'은 한 바탕이나 바탕이란 말에서 보이듯이 동일체인 근본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며, 그것을 짚어 읽으면 '한 허공으로 이뤄진 어떤 곳'이 빈탕한데이다. 이 말은 단일허공으로 표현되며, 공간적 넓이와 형상을 초월한 무엇을 가리킨다. 신은 단일허공인 '빈탕한데'라고 류영모는 언급했다. 사람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형상도 없으며, 실체도 없다. 그 단일허공이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단일허공을 움직이는 뜻이 있다. 그것이 성령이며 '얼'이다. 절대세계의 신이 존재하는 양상을 인간의 영적 감관으로 이만큼 생생하게 드러낸 것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 긋 = ㄱ(위에서 내려온 존재, 신)과 ㅅ(땅에 있는 인간) 사이에 접속(ㅡ)이 있는데 그것이 '긋'이란 말로 표현된다. 그 접속이 상대세계에도 있다면 그것의 존재 또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류영모는 '긋'을 점(點)과 같이, '개념으로 상정할 수는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점'은 아무리 작게 찍어 그 실상을 표현하려고 해도 찍는 순간 점이 아니라 면이나 입체적 실체로 되어버린다. 왜 그런가. 그것은 3차원인 상대세계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가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 접속하는 '긋'이란 말을 활용하여, 류영모는 '제긋(내 속에 있는 긋, 즉 얼나)'이란 개념을 만들어낸다.
▶ 말씀 = 말씀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말씀은 우리말에서 '말'을 높인 표현이지만, 류영모는, '신의 말을 인간이 받아씀'이란 혁신적인 의미를 찾아냈다. 성서에 등장하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을, 새롭고도 의미심장하게 만든 '해석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은 '말'을 통해 서로 태초 이래로 접속해왔고, 예수는 바로 '신의 말을 받아쓰는 인간'의 전범을 보여준 모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무한한 신의 사랑이다. 우리말 '말씀'이, 신학의 지지부진하던 신인관계 규명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킨 키워드가 되었다.
류영모의 '우리말 신학'은, 위에서 골격으로 삼고 있는 저 다섯 개의 개념만으로도 이미 신학혁명이라 할 만하다. 의미가 정밀할 뿐 아니라, 동서양이 그간 추구했던 신앙의 맹점 같은 자리에 서슴없이 들어간 영적 직관이 표현된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생명성과 근본성을 표현한 '씨알'이라든가, 하느님을 표현한 '한얼(하나의 얼, 큰 얼)'이란 개념 또한 류영모 신학의 중심을 형성한다.
그가 즐겨쓴 시조나 한시를 비롯한 다양한 시편과 노래는, 한글과 우리말 그리고 한자 속에 들어있는 다채로운 말빛과 어감과 다중적 의미를 통해 그의 영적인 소통의 면모를 신명나게 보여준다. '진달래'라는 꽃을 노래하면서, 지다(落, 죽음)와 지다(敗, 죽음), 진(眞, 참), 달래다(慰), 달라하다(請與), 달(月)과 같은 의미들을 중첩하고 어긋지게 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제들을 거듭 흔들어 새롭게 돌이키게 한다. '참'이라는 노래는 참이란 말이 진(眞), 참음(忍), 적합함(適), 짧은 시간, 기회, 간절함의 감탄사 등으로 쓰이면서 진리파지(眞理把持)를 생동감있게 풀어낸다. 이런 점에서 류영모는, 이 땅이 낳은 세계적인 영성시인(靈性詩人)으로 새롭게 가치 매김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류영모의 공은 우리말을 사랑하고 이 땅의 언어를 스스로의 사상에 활용하려 애를 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 언어를 채택한 것은, 서구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신을 보편의 신관으로 바로잡고, '비(非) 서구적인' 우리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영적 소통체계가 새롭게 필요하다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류영모가 직조해낸 우리말 신학이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의 담론과 강의와 문학을 해석하고 경탄을 보태는 일도 의미 있지만, 그가 왜 그 일에 이토록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왔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우리 언어로 독보적인 신학적 경지를 구축하고 있는 그를, 과연 우리가 그에 걸맞게 제대로 조명해 왔는지 그 성취의 크기가 지금 평가된 정도가 맞는지를 심각히 돌이켜봐야할 때가 되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