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8)] 다석은 왜 "나를 정음교라 해도 좋다"라고 했나
2021-03-01 10:26
다석사상의 재발견 - 정음(正音, 바른소리)사상(上) - 신의 말을 받아쓸 수 있어야 참사람이다
정음교를 제시한 류영모
류영모는 제자 박영호에게 문득 이렇게 말했다. "대개의 종교 이름은 자신이 붙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붙여서 된 이름이 많은데 나를 보고 '바른소리치김(正音敎)'이라고 해준다면 싫어하지 않겠어요."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바른소리' 혹은 '정음(正音)'이라는 개념이 류영모 사상의 핵심이라고 스스로 밝힌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선 '바른소리' 뒤에 붙은 '치김'이란 말은 용례를 찾기 어렵다. '치킴'으로 볼 수도 있다. 류영모는 교육(敎育)이란 한자어를 '가라치킴'이란 우리말로 풀었다. '치키다'라는 말은 '눈을 치켜 뜨다'라는 말에 쓰이고 있다. 비슷한 말에 '추키다'라는 말도 있다. '부추기다'라는 말과 비슷하며, 무엇인가를 위로 올리는 것을 말한다. 가르침이란 주저앉은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거기에 더하여 종교 혹은 신앙이란 지상의 삶에 주저앉은 인간을 일으켜 세워 하늘로 돋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치키다'는 '위로 향하여 끌어올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바른소리치킴은 바른소리의 가르침이요, 바른소리가 위로 끌어올리는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우리 사리 사리 똑바른 말소리 : 우리 글씨
할우 지슴 맨듬듬! 오랜 우린 앞틸람 ! 참 잘
암은요 우리 씨알이 터낸 소리 아름답
으이 나투신남게 달린 사람 밑이 : 예수
등걸(단군) - 우리 나라님 한울나라 거룩함
대강의 풀이를 해보자면 이렇다. '우리의 살이살이를 똑바르게 하는 말소리를 적는 우리 글씨/ 하늘로 가는 하루를 지어 쓰고 만들어 들어올린다, 역사가 오랜 우리의 앞이 트일지어다, 참이며 잘한 일이다/ 그래요 우리 백성이 지어 싹을 낸 소리가 아름답다// 오세요 이리 와요 부르신 으뜸 중에 으뜸 바른소리 세종이요/ 위(하느님)로 나타난 나무(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아들 예수요/ 단군은 우리 나라의 님으로 하느님 나라의 거룩함이라'
류영모가 평생 '한글과 우리말로 신학하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어가 삶의 실존을 반영하며 믿음의 단초를 이룰 뿐 아니라 최종의 지향까지도 포함하는 종교행위의 전부를 이룬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가 말한 정음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에서 나왔으며, 우리말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 사실이지만, 류영모는 그 이상을 생각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세종 당시에 만들어진 명칭인 '훈민정음'은 '어린(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이 말이 좀 길기에 대중화하는 차원에서 '한글(혹은 언문)'이란 말이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류영모는 한글보다 훈민정음이 더 훌륭한 표현이라며, 그 말이 자주 쓰이지 않게 된 것을 아쉬워했다. 그 아쉬움은, 훈민정음이란 말이 조선 군주가 한자 문맹(文盲)의 백성을 불쌍히 여긴 뜻을 가리키는 그 마음이 신(神)이 '하늘의 말씀' 문맹인 인간에 대해 가지는 측은지심과 다르지 않다고 본 데서 나왔다. 즉, 훈민정음을, 한글 창제의 취지를 밝히는 말을 넘어서서 신이 남긴 말씀을 제대로 읽어내기를 바라는 하늘의 뜻을 표현하는 말로 풀어낸 것이다. 훈민정음을 류영모처럼 풀어낸 사람도 없었고, 신의 말씀을 '훈민정음 관점'으로 읽어낸 사람 또한 지구상에 류영모 외에는 없었다.
정음사상을 읽는 두 가지 방법
류영모의 '정음사상'은 두 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첫째, 한글을 신학 용어로 숙성시킨 관점으로 읽어내면서 그가 이룬 성취를 살피는 방법이다. 둘째는, 성서의 첫머리에 기술된 '말씀'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류영모의 신학적 모색을 살피는 방법이다. 정음사상은 전체를 통합하면 하나가 되지만, 그 영역은 다를 수 있는 두 가지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읽은 류영모의 한글 예찬 시를 찬찬히 살펴보면, 창의적이면서도 능란하게 우리 말글을 구사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 속에는 예수가 들어가 있으며 하늘나라가 기입되어 있다. 서구 기독교의 곁불을 쬐어 그 온기를 활용해 그곳의 오랜 믿음의 역사에 편승하는 구조로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가 포착한 믿음의 정수인 신(神)과 신의 말씀이 이 땅에도 태초부터 있었으며 깊은 소통을 해왔음을, 류영모가 평생을 통해 꾸준히 발견하고 인식하고 체계화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음교는 그런 과정에서 빚어진 소산이라 할 만하다.
류영모는 우리말글로 사상을 펼쳤다는 이유만으로 위대한 사람인 건 아니다. 정음교 또한 그런 우리 얼과 문화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만 언급한 것도 아니다. 서구의 사상과 동양의 여러 사유체계를, 뛰어난 언어 체계인 우리말글로 아울러 뚜렷한 통합을 이룬 것이다. 그 속에서 신에 대한 '참'을 재발견하여 제시했다. 이 점을 놓치면, 그를 '한글 전도사' 정도로 오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는 한글을 사랑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한글 속에 있는 말씀의 생명을 숨쉬고 '치킨(북돋아 위로 올린)' 것이다.
우선, 성서의 말씀에 관한 류영모의 창조적인 관점부터 살피려 한다.
그는 '천음인언(天音人言, 하느님 말씀과 인간의 말, 1956.11.16)'이란 한시를 남겼다.
生來有言借口能(생래유언차구능)
死去無口還本音(사거무구환본음)
代代斷言猶遺志(대대단언유유지)
世世欲言大蓄音(세세욕언대축음)
태어나 말할 수 있으니 빌린 입으로 할 수 있고
죽어선 입이 없으니 하느님 말씀으로 돌아가네
죽어 대대로 말이 끊기지만 하느님 뜻이 남고
살아 대대로 말하려 하니 하느님 말이 크게 쌓이도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어도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이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그 시간 속에 쌓이는 축음(蓄音)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말을 하다 다 못하고 죽고, 그 말은 끊기지만 그 말한 만큼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남는다. 그것이 전승되고 전파되고 하느님 말이 쌓인다고 류영모는 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믿음이며 사상이며 철학이며, 지혜의 실체다.
인간의 말은 덧없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준 것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신에게서 빌린 입으로 하는 것이다. 죽으면 그 입이 사라지지만, 입이 한 말은 하느님의 말 속에 돌아가 합류한다는 생각. 류영모가 얼마나 말을 귀하게 여겼으며, 그 말 속에 곧 신의 뜻이 존재함을 간절하게 믿었는지 깨닫게 하는 한편의 시다. 지금 그 입으로 하는 말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며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인간이여. 그는 이렇게 신앙을 강의하고 있다.
성경은 왜 신보다 말씀을 앞세웠는가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한다. 성경의 이 말은 신과 인간이라는 간명한 신앙 구조를 처음부터 뒤흔들어 놓고 있다. 태초에 존재해야 할 것은 창조주여야 하는데, 성경은 창조주를 앞세우지 않고 창조주와 함께 있었던 말씀을 앞세운 것이다. 창조주가 그의 뜻대로 말씀을 하는 것이라면, 굳이 둘을 분리할 필요도 없고 또한 말씀을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말씀'이 먼저 나왔는가. 이 미스터리가 기독교가 이룬 신앙의 근원적인 것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은 인간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음성(音聲) 기호다. 그것은 목구멍과 입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로서, 그것을 듣는 대상을 전제로 하며 조직적인 언어 구성을 통해 의미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성서가 말하는 '말씀'은 물론, 인간의 말을 비유하여 신의 뜻이 구현되는 전달체계를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은 인격신(人格神) 신앙 체계의 산물이다. 신이 말을 한다는 것은 신을 인간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말'은 아니다. 인간의 말을 떠올림으로써 신의 '말씀'을 유추할 수 있는 효용이 있는 비유다. 신보다 신의 말씀을 앞세운 것은 신을 근원시(根源視)하고 신성시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보인다. 신과 인간의 소통은 절대세계와 상대세계의 무접점(無接點)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접점을 '말씀'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신이 상대세계로 들어와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상대세계의 무엇'이 바로 말씀이다. 상대세계로 들어와 창조를 한 것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곧 절대세계의 하느님과 같이 있는 것이며, 하느님과 다르지 않은 동일존재라고 밝혀놓은 것이다. 인간의 말은 저 하느님의 '말씀'의 기능적 측면(소통행위)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인간의 말과 신의 말이 어떻게 통하는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펼쳤다. "당나귀 귀는 말씀을 못 듣는다. 우리의 귀는 당나귀 귀와 다르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하느님 아들의 귀는 말씀을 듣는 귀다. 귀 있는 자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의 귀를 말한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고 있어도 하느님의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말이 다 쓸데없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귓구멍이 바로 뚫리지 않으면 보살이나 천사가 아니라 하느님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 "말씀을 하는 하느님을 누가 봤는가. 하느님께서 이 마음속에 출장을 보낸 정신을 통해서 위에서부터 말씀이 온다."
이제 성서를 읽어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니라."(요한 1:1) "본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느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 1: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는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이다. 천지창조 당시에 말씀과 하느님은 함께 이미 있었으므로, 말씀과 하느님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창조 이전에 있었던 창조의 주체다. 말씀과 하느님은 천지의 근원이다. 말씀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이다. 이 뜻은 명령으로 구현된다. 말씀은 천지창조의 프로그램이며, 하느님은 천지창조의 설계자라고 비유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설계자와 같은 시공(時空)에 있었고, 이 프로그램은 곧 설계자라고 동일화했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프로그램과 설계자가 완전일치하기에 설계자의 프로그램이 여럿일 가능성과 여러 설계자가 이 프로그램에 가담했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다. 즉, 하느님은 오직 하나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독생하신 하느님이 하느님을 나타내셨다= 독생하신 하느님은 인자(人子) 예수다. 예수가 하느님을 나타내셨다. 한 인간이 하느님의 현현(顯現)임을 말한 것이다. 예수는 인간으로 독생했다는 점에서 피조물이다. 피조물이 조물주를 나타냈다는 이 파격(破格)의 구절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재설정한 위대한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조물주가 피조물과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태초에 이미 존재했던 것 중에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말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예수에게 말씀 즉, 신의 창조 프로그램에 가담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신은 천지창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보였으나 스스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천지창조라는 프로그램이 실현되는 모습을 통해서만 드러났다. 그런데 예수란 인간의 육신을 입고 등장한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그 프로그램의 핵심을 직접 전했다. 천지창조의 핵심은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에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한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천지를 끝없이 사멸해 새로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지속성임을 말한 것이다.
독생한 하느님이 전한 말씀은 '잘 살려고 애쓰는 만큼 잘 죽어라'는 메시지였다. 이 말은 살려고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만을 깨우치는 절망적인 선언이 결코 아니었다. '육신의 삶'이 프로그램의 전부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통해 육신과 동봉했던 하느님의 뜻인 말씀을 부양하여 프로그램의 진정한 본체가 되는 길을 알려준 것이었다.
말하는 신, 받아쓰는 인간
류영모 사상의 출발점은 '말씀'이었다. 아니 그의 사상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말씀'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었다. 그 말씀은 성서의 구절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었고, 영성의 귀를 열고 치열한 수신(修身)으로 직접 신의 말씀을 수신(受信)하는 것이었다. 그는 '말씀'이라는 존댓말을 다르게 해석했다. 말씀은 '윗사람이 말을 쓰심'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그는 오히려 '하늘의 말을 인간이 받아 쓰는 일'이라고 풀었다. '씀'이라는 표현을 발화자(發話者)의 행위가 아니라 수화자(受話者)의 행위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인간과 신의 긴밀한 소통은 천지창조 때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즉, 태초에 신의 말이 있었고, 그것을 받아서 삶과 믿음에 쓰는 인간이 있었다는, 정교한 복합어로 '말씀'이 재정의된 것이다.
류영모의 '말씀론'은 인간 신앙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이며 주체적이라는 그의 신념을 담고 있다. 동양에선 '깨달음'이 종교사상적 화두로 정착되어 왔다. 그 깨달음은 우연한 행운으로 닥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철저한 수련과 집요한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신의 말을 인간이 쓰는 '씀'은 바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깨는 것인 파사(破私)는 신의 말을 쓴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는 '씀'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백척간두에 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궁극의 수행이다. 그 앞의 허공에 내딛는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허공에 내딛는 '일보(一步·한 걸음)'는 바로 신의 말이며, 그것을 행하는 '진(進·나아감)'이 바로 씀이다. 말씀은 바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그 결단의 행위를 가리킨다. 류영모는 신의 말씀을 찾아 적극적인 전진을 했을 뿐 아니라, 그 말씀 안에서 살고 말씀을 딛고 일어서고자 했다. 말씀을 숨쉬는 것을 '말숨'이라고 했고, 말씀으로 서는 것을 '말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런 이유다. 우리의 몸생명을 목숨이라 하면 얼생명은 말숨이다. 그 말숨을 쉼으로써 '말씀이 하느님'이라는 성서의 명제를 실천할 수 있다고 했다. 말숨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도 했다.
정음(正音)은 류영모가 새롭게 닦아 그 면모를 찾아낸 복음(福音)이며 말씀이다. 말씀은 신에게서 그저 '자비'에 의해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쓰는 인간의 영적 교통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사모하면서 해야 할 모든 일은 참말씀을 받아 쓰는 일이며 그 말씀으로 숨을 쉬는 일이며 제대로 서는 일이다. 그 말을 받기 위해서는 신과의 교통을 유지하라고 류영모는 말했다. 그릇된 말이 나오는 까닭은 신과 말씀의 교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현존재를 마음속에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는 성화로(聖火爐)라고 표현했다. 인간 현존재를 누가 이렇게 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말숨을 쉬어야 사람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단언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